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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채프먼의 풀네임은 안토니 콜린 브루스 채프먼(Anthony Colin Bruce Chapman)이며 1928년 5월 19일 영국 머즈웰 힐(Muswell Hill)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호텔을 운영하였다. 그가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London)에 다녔던 1940년대 후반만 해도 자동차 엔지니어와 항공기 엔지니어는 크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아버지 덕분에 항공 기술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다. 콜린 채프먼은 1948년 마지막 학기 수학 논문의 제출을 거부해 졸업이 유예되자 영국 공군의 장교로 입대하였다. 영국 공군의 그의 재능을 인정해 장기근속을 제안했지만 그는 복무 1년 후에 제대하였다. 그는 공군에서의 경험과 항공 기술을 자동차에 접목하는데 보다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조사를 설립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품의 개발과 판매 그리고 자동차 애호가들을 위한 원 오프 카피 기종 생산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가 첫 번째로 주문에 의해 개조한 자동차는 1930년대 오스틴 살룬이었다. 그가 1948년 미니의 MK1을 개조한 자동차로 처음 레이스에 참여한 것도 이런 인연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가 MK1을 개조해 만든 첫 경주차의 이름이 로터스였다. 로터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꽃을 의미하며 이는 후에 콜린 채프먼 본인의 레이싱팀과 제조사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다른 제조사와 달리 제작자의 이름이나 힘센 동물들을 상징하는 이름을 택하지 않은 것이 흥미롭다. 그는 생전 그 이유에 대해 밝히진 않았지만 그의 아내인 헤이젤 윌리엄스의 별명인 블루밍 로터스에서 왔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둘은 결혼하기 10년 전쯤 채프먼의 부친이 연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헤이젤 윌리엄스는 1952년 남편 채프먼의 레이싱팀인 로터스가 제조사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지원하여 로스터자동차를 설립하였다. 즉 창업 대주주였던 셈이다. 레이싱 팀이자 제조사인 로터스를 설립한 후에도 채프먼은 회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물론 그 일들은 수익과 동시에 자신의 회사에서 비전을 찾고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회사 설립 전 F1 머신들의 부품 수리 등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F1 자동차의 차체 디자인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채프먼은 그 이전까지 다른 제조사들이 쉽게 찾을 수 없던 디자이너였다. 무엇보다도 항공 기술을 대학에서 전공하고 공군 장교로 복무한 경험까지 있는 채프먼만큼 에어로 다이내믹을 이해하는 엔지니어가 드물었던 것이다. 채프먼과 로터스가 F1의 포디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우연처럼 찾아온 필연이었다. 당시 F1 머신을 디자인하는 한편 자신의 자동차를 연구하던 채프먼은 자신이 스태프로 있던 밴월 팀의 머신을 테스트하던 중 드라이버이자 팀 동료인 마이크 호손이 차량 파손 사고로 인해 드라이버를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가벼운 차체에 미드십엔진을 얹은 밴월의 머신은 날카로운 조향성을 보장했으나 강한 출력의 엔진을 프론트에 배치한 페라리나 마세라티에 비해 출력이 부족했다. 여기에 차체 강성도 약해 충격으로 인한 파손이 잦았다. 채프먼은 노력 끝에 이 차량의 단점을 보완한 로터스 25를 만들었고 BRM으로부터 이적한 명 드라이버 짐 클락을 영입했다. 그리고 짐 클락은 이를 타고 1963년 브리티시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당시 미국의 명 레이서인 댄 거니는 로터스 25를 눈여겨보았고 콜린 채프먼에게 인디 500을 위한 레이스카 제작을 의뢰했다. 채프먼은 포드와 손잡고 모노코크 섀시를 비롯해 로터스 25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로터스 29를 제작했다. 여기에 긴 거리를 달리는 인디 500의 특성을 고려해 리어에 엔진을 탑재했다. 이 자동차를 탄 댄 거니는 1963년과 1964년 우승을 놓쳤지만 1965년에 드디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로터스의 가치를 입증했다. 1960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스털링 모스가 우승을 차지하고 그로부터 27년 후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아일톤 세나가 우승을 거둘 때까지 로터스는 월드 챔피언십 그랑프리에서 무려 79회의 우승을 기록을 세웠다. 콜린 채프먼은 1982년 12월 16일 만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고 1994년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1997년 미국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ref>온갖차,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5267958&memberNo=21396082 ‘덕업일치’로 살다 간 로터스의 아버지, 콜린 채프먼]〉, 《네이버 포스트》, 2016-10-17</ref><ref>글로벌오토뉴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8717934&memberNo=32414000 엔지니어 콜린 채프먼과 로터스]〉, 《네이버 포스트》, 2019-03-2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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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채프먼의 풀네임은 안토니 콜린 브루스 채프먼(Anthony Colin Bruce Chapman)이며 1928년 5월 19일 영국 머즈웰 힐(Muswell Hill)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호텔을 운영하였다. 그가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London)에 다녔던 1940년대 후반만 해도 자동차 엔지니어와 항공기 엔지니어는 크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아버지 덕분에 항공 기술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다. 콜린 채프먼은 1948년 마지막 학기 수학 논문의 제출을 거부해 졸업이 유예되자 영국 공군의 장교로 입대하였다. 영국 공군의 그의 재능을 인정해 장기근속을 제안했지만 그는 복무 1년 후에 제대하였다. 그는 공군에서의 경험과 항공 기술을 자동차에 접목하는데 보다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조사를 설립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품의 개발과 판매 그리고 자동차 애호가들을 위한 원 오프 카피 기종 생산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가 첫 번째로 주문에 의해 개조한 자동차는 1930년대 오스틴 살룬이었다. 그가 1948년 미니의 MK1을 개조한 자동차로 처음 레이스에 참여한 것도 이런 인연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가 MK1을 개조해 만든 첫 경주차의 이름이 로터스였다. 로터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꽃을 의미하며 이는 후에 콜린 채프먼 본인의 레이싱팀과 제조사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다른 제조사와 달리 제작자의 이름이나 힘센 동물들을 상징하는 이름을 택하지 않은 것이 흥미롭다. 그는 생전 그 이유에 대해 밝히진 않았지만 그의 아내인 헤이젤 윌리엄스의 별명인 블루밍 로터스에서 왔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둘은 결혼하기 10년 전쯤 채프먼의 부친이 연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헤이젤 윌리엄스는 1952년 남편 채프먼의 레이싱팀인 로터스가 제조사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지원하여 로터스자동차를 설립하였다. 즉 창업 대주주였던 셈이다. 레이싱 팀이자 제조사인 로터스를 설립한 후에도 채프먼은 회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물론 그 일들은 수익과 동시에 자신의 회사에서 비전을 찾고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회사 설립 전 F1 머신들의 부품 수리 등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F1 자동차의 차체 디자인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채프먼은 그 이전까지 다른 제조사들이 쉽게 찾을 수 없던 디자이너였다. 무엇보다도 항공 기술을 대학에서 전공하고 공군 장교로 복무한 경험까지 있는 채프먼만큼 에어로 다이내믹을 이해하는 엔지니어가 드물었던 것이다. 채프먼과 로터스가 F1의 포디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우연처럼 찾아온 필연이었다. 당시 F1 머신을 디자인하는 한편 자신의 자동차를 연구하던 채프먼은 자신이 스태프로 있던 밴월 팀의 머신을 테스트하던 중 드라이버이자 팀 동료인 마이크 호손이 차량 파손 사고로 인해 드라이버를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가벼운 차체에 미드십엔진을 얹은 밴월의 머신은 날카로운 조향성을 보장했으나 강한 출력의 엔진을 프론트에 배치한 페라리나 마세라티에 비해 출력이 부족했다. 여기에 차체 강성도 약해 충격으로 인한 파손이 잦았다. 채프먼은 노력 끝에 이 차량의 단점을 보완한 로터스 25를 만들었고 BRM으로부터 이적한 명 드라이버 짐 클락을 영입했다. 그리고 짐 클락은 이를 타고 1963년 브리티시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당시 미국의 명 레이서인 댄 거니는 로터스 25를 눈여겨보았고 콜린 채프먼에게 인디 500을 위한 레이스카 제작을 의뢰했다. 채프먼은 포드와 손잡고 모노코크 섀시를 비롯해 로터스 25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로터스 29를 제작했다. 여기에 긴 거리를 달리는 인디 500의 특성을 고려해 리어에 엔진을 탑재했다. 이 자동차를 탄 댄 거니는 1963년과 1964년 우승을 놓쳤지만 1965년에 드디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로터스의 가치를 입증했다. 1960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스털링 모스가 우승을 차지하고 그로부터 27년 후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아일톤 세나가 우승을 거둘 때까지 로터스는 월드 챔피언십 그랑프리에서 무려 79회의 우승을 기록을 세웠다. 콜린 채프먼은 1982년 12월 16일 만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고 1994년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1997년 미국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ref>온갖차,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5267958&memberNo=21396082 ‘덕업일치’로 살다 간 로터스의 아버지, 콜린 채프먼]〉, 《네이버 포스트》, 2016-10-17</ref><ref>글로벌오토뉴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8717934&memberNo=32414000 엔지니어 콜린 채프먼과 로터스]〉, 《네이버 포스트》, 2019-03-29</ref>
  
 
==주요 활동==
 
==주요 활동==

2021년 5월 7일 (금) 17:53 판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
로터스자동차(Lotus Cars Ltd.)
지리자동차그룹(吉利控股集团)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은 중국의 지리자동차그룹(吉利控股集团)에 소속된 영국의 스포츠카 제조업체인 로터스자동차의 창시자이다. [1]

개요

콜린 채프먼의 풀네임은 안토니 콜린 브루스 채프먼(Anthony Colin Bruce Chapman)이며 1928년 5월 19일 영국 머즈웰 힐(Muswell Hill)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호텔을 운영하였다. 그가 유니버시티 칼리지(University College London)에 다녔던 1940년대 후반만 해도 자동차 엔지니어와 항공기 엔지니어는 크게 구분되지 않았으며 아버지 덕분에 항공 기술 엔지니어 교육을 받았다. 콜린 채프먼은 1948년 마지막 학기 수학 논문의 제출을 거부해 졸업이 유예되자 영국 공군의 장교로 입대하였다. 영국 공군의 그의 재능을 인정해 장기근속을 제안했지만 그는 복무 1년 후에 제대하였다. 그는 공군에서의 경험과 항공 기술을 자동차에 접목하는데 보다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조사를 설립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품의 개발과 판매 그리고 자동차 애호가들을 위한 원 오프 카피 기종 생산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가 첫 번째로 주문에 의해 개조한 자동차는 1930년대 오스틴 살룬이었다. 그가 1948년 미니의 MK1을 개조한 자동차로 처음 레이스에 참여한 것도 이런 인연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가 MK1을 개조해 만든 첫 경주차의 이름이 로터스였다. 로터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연꽃을 의미하며 이는 후에 콜린 채프먼 본인의 레이싱팀과 제조사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다른 제조사와 달리 제작자의 이름이나 힘센 동물들을 상징하는 이름을 택하지 않은 것이 흥미롭다. 그는 생전 그 이유에 대해 밝히진 않았지만 그의 아내인 헤이젤 윌리엄스의 별명인 블루밍 로터스에서 왔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설이다. 둘은 결혼하기 10년 전쯤 채프먼의 부친이 연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헤이젤 윌리엄스는 1952년 남편 채프먼의 레이싱팀인 로터스가 제조사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금전적으로 지원하여 로터스자동차를 설립하였다. 즉 창업 대주주였던 셈이다. 레이싱 팀이자 제조사인 로터스를 설립한 후에도 채프먼은 회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물론 그 일들은 수익과 동시에 자신의 회사에서 비전을 찾고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회사 설립 전 F1 머신들의 부품 수리 등을 맡았던 경험을 살려 F1 자동차의 차체 디자인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채프먼은 그 이전까지 다른 제조사들이 쉽게 찾을 수 없던 디자이너였다. 무엇보다도 항공 기술을 대학에서 전공하고 공군 장교로 복무한 경험까지 있는 채프먼만큼 에어로 다이내믹을 이해하는 엔지니어가 드물었던 것이다. 채프먼과 로터스가 F1의 포디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우연처럼 찾아온 필연이었다. 당시 F1 머신을 디자인하는 한편 자신의 자동차를 연구하던 채프먼은 자신이 스태프로 있던 밴월 팀의 머신을 테스트하던 중 드라이버이자 팀 동료인 마이크 호손이 차량 파손 사고로 인해 드라이버를 그만둔 것이 계기였다. 가벼운 차체에 미드십엔진을 얹은 밴월의 머신은 날카로운 조향성을 보장했으나 강한 출력의 엔진을 프론트에 배치한 페라리나 마세라티에 비해 출력이 부족했다. 여기에 차체 강성도 약해 충격으로 인한 파손이 잦았다. 채프먼은 노력 끝에 이 차량의 단점을 보완한 로터스 25를 만들었고 BRM으로부터 이적한 명 드라이버 짐 클락을 영입했다. 그리고 짐 클락은 이를 타고 1963년 브리티시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당시 미국의 명 레이서인 댄 거니는 로터스 25를 눈여겨보았고 콜린 채프먼에게 인디 500을 위한 레이스카 제작을 의뢰했다. 채프먼은 포드와 손잡고 모노코크 섀시를 비롯해 로터스 25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로터스 29를 제작했다. 여기에 긴 거리를 달리는 인디 500의 특성을 고려해 리어에 엔진을 탑재했다. 이 자동차를 탄 댄 거니는 1963년과 1964년 우승을 놓쳤지만 1965년에 드디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로터스의 가치를 입증했다. 1960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스털링 모스가 우승을 차지하고 그로부터 27년 후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아일톤 세나가 우승을 거둘 때까지 로터스는 월드 챔피언십 그랑프리에서 무려 79회의 우승을 기록을 세웠다. 콜린 채프먼은 1982년 12월 16일 만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고 1994년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1997년 미국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2][3]

주요 활동

로스터 25

각주

  1. "Colin Chapman", "wikipedia"
  2. 온갖차, 〈‘덕업일치’로 살다 간 로터스의 아버지, 콜린 채프먼〉, 《네이버 포스트》, 2016-10-17
  3. 글로벌오토뉴스, 〈엔지니어 콜린 채프먼과 로터스〉, 《네이버 포스트》, 2019-03-29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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