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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8일 (금) 09:39 기준 최신판

바클라프 클레멘트(Vaclav Klemen, 1868년 10월 16일~ 1938년 8월 13일)
바클라프 형제
라우린 & 클레멘트(Laurin & Klement)
스코다(SKODA)
폭스바겐(Volkswagen)
Laurin & Klement A(1905)
Laurin & Klement Škoda 110

바클라프 클레멘트(Vaclav Klemen, 1868년 10월 16일~ 1938년 8월 13일)는 체코의 자동차 산업의 개척자이자 라우린&클레멘트(L&K)사의 공동 설립자이다.

어린 시절[편집]

클레멘트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그는 계모 밑에서 자랐다. 14세 때부터 그는 육체노동을 했지만 또한 좋은 학생이었고 중등 공부를 마치는 동안 Slaný 마을의 서점에서 견습생이 되었다.

프라하에서 얼마 동안 일한 후 클레멘트는 믈라다 볼레슬라프(Mladá Boleslav)로 이사하여 다른 서점에서 일했다. 서점 주인이 죽자 클레멘트는 그것을 인수했지만 사업이 번창하지 않았고 클레멘트는 빚을 갚기 위해 서점을 팔아야 했다.

사업경력[편집]

바클라프 라우린과 함께 클레멘트는 클레멘트의 사업 감각과 로린의 기술적 지식을 바탕으로 자전거를 수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895년, 그들은 슬라비아 자전거라고 알려진 그들만의 자전거를 생산하기 위해 라우린&클레멘트 회사를 설립했다. 1899년, 그들은 국내와 국제 시장에서 판매된 오토바이를 생산했고, 스포츠 경기에 사용되었다. 1902년 파리-비엔나 경주에서 라우린&클레멘트가 1430km를 31시간 만에 고장없이 완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모터사이클이었다.

곧 회사는 오토바이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자전거 생산을 중단했다. 1903년까지 이 회사는 약 200명의 직원이 있었고 매년 약 2,000대의 오토바이를 생산하고 있었다. 1905년에 자동차 생산을 시작했고, 1907년에 증설하여 증권거래소에 등록하고 오토바이 생산을 중단했다.

1925년 라우린&클레멘트 회사는 Pilsner Škoda Concern에 합류했고 공장 이름은 Laurin & Klement - Škoda로 변경되었으며 이후에는 스코다(Škoda)로만 변경되었다.

라우린&클레멘트[편집]

라우린&클레멘트 설립일은 무려 1985년 12월, 일반적인 자동차 브랜드보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독특한 점은 바로 그 시작에 있다. 흔히 '키워'라고 말하는 '글을 통한 싸움'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1894년, 당시 서점을 운영하던 바클라프 클레멘트가 자신의 자전거를 위한 부품을 구매하기 위해 독일에 한 업체에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독일의 업체는 '독일어로 편지를 써라'라는 비아냥을 답장으로 보냈다.

이에 바클라프 클레멘트는 분노를 표출, 기계공이자 자신의 형인 바클라프 라오린(Václav Laurin)을 설득, '로린&클레멘트(L&K)' 사를 설립, 스코다 브랜드의 첫 시작을 알린다.

자전거, 모터사이클 그리고 자동차

1895년,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L&K사의 첫 제작 부품은 자전거 부품이 되었지만 라우린은 자신의 기계공 경험을 살려 모터사이클 제작에 나섰다. 다만 자전거 제작 경험만으로는 '온전한 모터사이클' 개발의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독일의 로베르트 보쉬(Robert Bosch)에 도움을 받아 '온전한 모터사이클'을 생산, 판매하게 되었다. 이들의 모터사이클은 체코는 물론 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 등에도 판매되었다. 참고로 로베르트 보쉬는 현재에도 각종 기계 공학 및 부품 업체로 유명한 보쉬의 창업주다.

바클라프 형제는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1905년, 자동차 사업에 대한 의지와 함께 첫 작품을 선보이며 자동차 시장에 뛰어든다. 이는 체코 역사 상 타트라(Tatra) 사 이후 두 번째 자동차 제조사의 등장이었다.

첫 번째 차량인 '브와튀레트 A(Voiturette A)'는 1905년부터 1097년까지 매우 짧은 시간만 판매된 차량이었지만 당대의 자동차 설계, 개발 기술 및 사상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차량이었고, 완성도 역시 우수해 시장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세계대전을 마주하다

첫 번째 차량을 선보이며 L&K는 말 그대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감과 달리 국제 정세는 불안했고, 결국 세계대전의 포화가 전 유럽을 혼란으로 이끌었다.

체코는 주요 전장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흐름 속 L&K의 주요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실제 L&K 역시 전후의 활동을 언급할 뿐 '전쟁 당시'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L&K는 트럭을 생산, 판매했으며 이후 자동차 사업을 담당하는 새로운 사업부, 즉 'ASAP(Akciová společnost pro automobilový průmy)'를 설립했다.

ASAP는 여전히 L&K의 엠블럼을 내세우는 구조였으나 당대 체코슬로바키아의 대기업인 ‘스코다 웍스(Škoda Works)’가 이를 인수 ‘스코다 엠블럼’을 앞세우게 만들었다.

1930년대 L&K 대신 세 개의 날개를 단 화살, 즉 스코다 브랜드를 앞세우게 된 회사는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했다. 실제 새로운 디자인, 설계 그리고 백본 섀시 및 독립식 서스펜션 구조 등 독특한 기술 구성은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게다가 파퓰러, 래피드, 슈퍼브 등 소형부터 중형의 각 세그먼트의 차량들을 빠르게 개발, 시장에 선보이며 1933년 체코슬로바키아 내수 시장 3위의 점유율을 자랑하게 되었고, 1936년 시장 선두에 오르는 쾌거를 누리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겪다

제1차 세계대전은 막이 내렸지만 그 불씨는 어둠 속에서 계속 타올랐고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곧바로 스코다의 공장을 군수공장으로 전환했다.

나치 독일의 군수공장으로 전락한 스코다의 공장은 당시 경전차인 'LT vz. 35'을 생산했으며 이를 개량한 LT vz. 38 또한 생산하게 되었다. 경전차 외에도 각종 전차용 주포 개발과 전차 개발 기획 등을 담당하게 되어 자동차 제조 업체의 미래를 밝히는 소재 및 제조 기술의 발전을 간접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다.

다만 '유산'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전쟁은 무릇 많은 산업, 공학 부분에 큰 발전을 돕지만 그의 대가를 지불할 때에도 있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나치 독일의 '패망'이었다. 이에 나치 독일의 전력에 도움을 주었던 스코다의 생산 공장 및 헤드쿼터 등 많은 거점들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전후 재건'에 대한 먹구름을 떠올리게 했다.

공산주의의 도래 그리고 국영기업 ‘스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은 말 그대로 '공산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이러한 흐름을 피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 정권은 국가 경제 및 산업 발전을 위해 당연하게 '스코다'를 국영화했으며 대중들을 위한 자동차 생산 기지로 전환했다.

흔히 '공산주의'의 도래가 산업의 경쟁적 발전을 저해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스코다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듯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우수한 품질의 자동차를 꾸준히 선보였다. 실제 1101 튜더 로드스터나 440, 445 옥타비아, 1000MB 등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차량들이 이 시기에 꾸준히 등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1959년에는 소형 컨버터블 모델인 '펠리시아'가 미국 시장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당대 미국 시장 정서를 감안한다면 작은 차체와 작은 엔진, 그리고 '사후관리'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동구권 차량이 미국 시장에 판매되었다'라는 사실만으로도 인상적인 기록이다.

공산주의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는 와중에도 스코다는 대외적인 활동에 많은 공을 들였다. 특히 영국 등과 같은 서방국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모터스포츠 대회에 꾸준히 도전해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스포티한 성격을 가진 래피드 등은 일반 시장에서 ‘빈자의 포르쉐’라는 표현 아래 서유럽에서의 활약을 이어갔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냉전 말기 동유럽의 산업 수준이 서유럽 및 미국 등에 밀려가는 상황 속에서도 스코다는 ‘경쟁력 있는’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벨벳 혁명, 그리고 폭스바겐 그룹과의 만남

냉전이 끝났고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벨벳 혁명은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이별'을 낳게 되었고 수많은 국영기업들의 민영화, 매각 등과 같은 여러 활동이 이어지게 되었다.

경쟁력 있는 자동차 제조사, '스코다' 역시 민영화의 대상이 되었고 시장의 수 많은 기업들이 스코다 인수, 합병에 관심을 보였다. BMW, GM, 르노는 물론 포드, 피아트와 메르세데스-벤츠 등 수 많은 업체들이 스코다 인수 의사를 드러냈다.

그 결과 최종 인수 협상자로 낙찰된 것이 폭스바겐이었다. 폭스바겐은 스코다 브랜드의 브랜드 폐지보다는 유지하는 것이 옳다 생각했고, 이를 바탕으로 '스코다 브랜드의 성장'을 비전으로 제시해 체코 정부의 이목을 끌었다.

체코 정부의 승인을 받은 폭스바겐은 이후 지분 매입과 출자, 합작 등 다양한 절차를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2000년 폭스바겐 그룹은 스코다의 지분 100%을 모두 인수하며 '완전한 자회사 전환'을 이뤄냈다.[1]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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