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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5일 (수) 09:31 판
카라카스(스페인어: Caracas, 문화어: 까라까스)는 베네수엘라의 수도이며 공식적 명칭은 산티아고 데 레온 데 카라카스(Santiago de León de Caracas)’이며 베네수엘라의 북해안에 있다. 카라카스는 베네수엘라 해안 산맥(Cordillera de la Costa)의 카라카스 계곡 내에 있는 과이레(Guaire) 강을 따라 위치하고 있으며, 분지도시로서 바다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위성도시 라과이라(La Guaira)를 통해야 한다.
목차
개요
- 행정단위: 베네수엘라 수도
- 면적: 433km²
- 인구: 3,242,000명(2022년)
- 지역어: 스페인어
- 시장: Jacqueline Faría
역사
메스티소였던 프란시스코 파하르도(Francisco Fajardo)는 1555년부터 1560년 사이에 라과이라(La Guaira) 지역과 카라카스 계곡에 정착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정착지는 스페인 정복자들과 맞서 싸운 원주민 부족의 카시케 과이카이푸로(Cacique Guaicaipuro, 1530~1568.11.5)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후 1560년과 1561년의 시도도 원주민들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후안 로드리게스 수아레스(Juan Rodríguez Suárez)라는 스페인 정복자가 카라카스 계곡에 도착했을 때도 스페인인들의 정착지는 원주민들에 의해 거의 매일 공격받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후안 로드리게스가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567년 스페인 정복자 중 한 명인 디에고 데 로사다(Diego de Losada)는 카라카스 계곡에 정착지를 설립하라는 왕실의 명령을 받고 도착하였다. 디에고 데 로사다는 카라카스 계곡을 점령하기 위해 당시 스페인인들의 정착을 방해하던 여러 원주민 부족을 각개 격파했으며, 이 중 일부 부족과는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후 디에고 데 로사다와 부족민 연합군은 과이카이푸로가 이끄는 카리브해 부족 연합군을 격파해 카라카스 계곡을 차지할 수 있었다. 새롭게 건설된 정착지는 해변가와 가까웠고, 원주민 노동력을 이용해 카라카스와 마르가리타(Margarita) 사이의 무역 네트워크를 개발할 수 있었다. 카라카스 계곡은 상업을 활성화할 수 있는 농업 및 경작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실현시켜줄 원주민 인구수는 많지 않았다.
도시가 생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은 주변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지역이 기후가 매우 좋았고, 카리브 해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1576년 스페인 정복자 후안 데 피멘텔(Juan de Pimentel)이 카라카스에 그의 거주지를 만들면서 행정수도가 되었다. 1580년대에 카라카스에 있는 사람들은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스페인 군대에게 음식을 팔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종종 남미지역에서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해안도시에 정박했다. 이때 스페인인들은 카라카스 농부들로부터 밀을 사서 이익을 얻었고, 이러한 점을 계기로 카라카스는 ‘제국의 무역도시’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베네수엘라 해안은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자주 해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반면에 카라카스는 산을 장벽으로 삼고 있어서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했다. 하지만 1595년 영국의 Preston-Somers 원정대가 카라카스를 침공한 사례도 있다. 이 당시 영국군은 카라카스를 점령하였고, 이후 몸값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군은 서인도제도로 떠나기 전 카라카스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후 카라카스는 밀 무역과 도시 구성원들의 많은 희생을 통해 서서히 복구가 이루어졌다.
1620년대 카라카스 농부들은 카카오가 판매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처음에 멕시코 원주민에게 판매했으나 이후 카리브해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스페인 정복시기 카라카스가 중요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노예무역 때문이다. 17세기 중반인 1650년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주요 노동력은 원주민에서 아프리카 노예로 이동했고, 카라카스는 노예무역과 카카오 생산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이후 과야킬(Guyaquil)에서 카카오 생산량이 증가하여 카라카스가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1739년 카라카스는 현재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누에바그라나다(Nueva Granada) 부왕령의 세 지역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후 30년 동안 부왕령은 다양하게 분할되어 카라카스주(province)가 베네수엘라주로 되었다. 1777년 루이스 데 운사가(Luis de Unzaga)는 베네수엘라 총독부( Captaincy General of Venezuela)를 만들고, 이곳의 수도로 카라카스를 지정했다.
베네수엘라 독립과 공화국 시기
1811년 베네수엘라 총독부에 속한 10개 주 중 7개 주가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 왕실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결정했다. 베네수엘라 독립과 관련한 대부분의 회의는 카라카스에서 실시되었는데, 1811년 7월 3일, 카라카스의 산타 로사 데 리마(Santa Rosa de Lima) 예배당에서 제1차 제헌의회 대표들이 독립 문제에 관해 회의를 하였고, 이틀 후 독립에 대한 투표를 하여 독립을 가결하였다. 베네수엘라 독립선언서는 7월 5일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1811년부터 1823년까지 베네수엘라 공화군과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812년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던 카라카스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최소 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신이 도와주지 않는 전쟁’을 더 이상 진행하면 안된다는 선전 선동을 했고, 이에 대해 시몬 볼리바르는 이것이 스페인 왕에게 유리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더욱 독립운동을 독려하였다. 이후 독립군은 1823년까지 카라보보 전투와 마라카이보 호수 전투 등에서 승리하면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1821년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통합하는 그란콜롬비아공화국이 만들어짐에 따라 공화국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하지만 콜롬비아 공화국이 해체된 1830년 카라카스는 다시 베네수엘라 연방의 수도가 되었다.
20세기 초 카라카스는 상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빨간 지붕의 저층 건물이 많은 농업도시였다. 하지만 이후 석유산업이 발전하면서 도시의 규모와 인구, 경제적 중요성이 커졌다. 1930년까지 도시의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1940년 처음으로 자동차가 도시에 등장하였다.
1908년 우안 비센테 고메스(Juan Vicente Gómez) 장군이 카라카스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정부를 수립하였다. 엘레아자르 로페스(Eleazar López Contreras, 베네수엘라 30대 대통령)는 대통령 첫 임기에 카라카스 재정비를 위한 여러 계획을 추진하면서 미래의 도시 확장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 건축가 그룹을 고용하였다. 1939년 이들은 카라카스의 ‘기념비적인 계획(Monumental Plan)’을 승인하였다. 이들은 도시 역사지구 중심지를 재배치하고, 도시 중심 축 내에 정부청사와 넓은 도로 건설 및 도로 확장을 추진했다. 1940~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카르카스는 카라카스 시우닷 대학교(Ciudad Universitaria de Caracas)의 설립과 도시의 물리적 공간 변화, 도로 등의 건설, 주택단지 조성, 대중교통 시스템 확립 등이 진행되었다.
카라카스에서 발생했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 중의 하나는 1989년 2월 27일과 28일에 발생한 대중운동 ‘카라카소(Caracazo)’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 대통령이 시도한 휘발유 및 대중교통 요금 인상안에 대한 민중봉기였다. 이 폭력시위 진압을 위해 군과 경찰이 출동했으며, 정부는 공식적으로 수백 명의 민간인 및 군인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3,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카라카소는 향후 우고 차베스로 대표되는 좌파 정권의 출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1999년 카라카스 메트로폴리탄 지구(El Distrito Metropolitano de Caracas) 창설이 합법화되어, 미란다주의 4개 지역(Baruta, Chacao, Sucre, El Hatillo)이 카라카스 시장의 통제를 받는 수도권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카라카스 시는 모두 5개의 지자체(수도권 1, 미란다주 4)로 구성되었다.
지리
카라카스는 와라이라 레파노 국립공원(Waraira Repano National Park)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라 코르디예라 데 라 코스타(Cordillera de la Costa) 계곡 내에 둘러싸여 있다. 계곡 내 도시 면적은 약 845㎢이고, 해발 고도는 도시 내부에서 평균 870미터에서 1443미터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가진 곳은 피코 나이구아타(Pico Naiguat, 2765미터)이다. 와라이라 레파노 지역의 산악지대는 카라카스 시내 내부에서 가장 매력적인 관광 도구인 텔레페리코 데 카라카스(el Teleférico de Caracas, 카라카스 케이블카)를 통해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카라카스는 35㎞ 길이의 과이레(Guaire) 강과 교차되고 있다. 과이레 강은 계속 흘러 투이(Tuy) 강과 엘 바예(El Valle) 강, 산 페드로(San Pedro) 등의 지류와 만나게 된다. 카라카스 지역의 계곡은 카리브해와 남미의 두 지각판이 만나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어서 강력한 지진대를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카라카스에서 발생한 가장 강력한 지진은 1812년이었고, 당시 사망자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10,000명을 상회했을 것으로 본다. 최근에는 2018년 진도 7.3의 지진이 발생하여 도시 전역이 흔들렸고, 특히 콘피안사스 금융센터 타워와 ‘토레 데 다비드(Torre de Davis)’를 포함한 여러 건물에 손상을 입혔고, 토레 데 다비드의 꼭대기 층들은 약 35도 각도 정도로 기울었다.
기후는 열대 사바나 기후로서, 연평균 기온은 18℃이면서 연간 900-1300㎜, 산간 일부 지역에서는 최대 2000㎜의 강우량을 기록한다. 12월부터 3월까지는 습도가 낮고 맑은 날이 많은 온화한 날씨를 보이지만, 4월부터 11월까지는 부분적으로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다. 장마철에는 높은 기온과 습도, 직접적인 자외선으로 인해 사람들이 스모그로 착각할 수 있는 일종의 연무가 도시를 뒤덮기도 한다. 건기에는 습도와 기온이 상당히 감소하여 산에서 화재가 발생하기도 한다.
도시구조
2023년 현재 카라카스 수도권은 베네수엘라 수도 지구의 유일한 행정구역인 리베르타도르(Libertador Municipality)와 미란다 주(Miranda) 안에 있는 차카오(Chacao), 바루타(Baruta), 수크레(Sucre) 및 엘 아티요(El Hatillo)의 4개 시정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2000년 3월 8일, 베네수엘라에서 새 헌법이 도입된 후, 카라카스 대도시 자치구(Metropolitan District of Caracas)가 제정되며 형성된 것이다. 이로써 각 지방자치단체들에 있던 일부 권한이 리베르타도르 지역에 위치한 수도권 시장(Alcaldía Mayor)에게 위임되었다. 그 이전에는 수도권으로 리베르타도르만 분류되어 있었다.
대략적으로 볼 때 카라카스는 도시의 서쪽과 남동쪽 지역이 주거지이고, 남서쪽 지역은 중요한 산업 지역이 몰려 있다.
빈민지역
카라카스는 라틴아메리카의 도시들과 유사하게 인구밀도가 높고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공간이 제한적이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체계적인 공간 계획이 부재하면, 많은 빈민들이 산비탈 쪽으로 올라가 열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카라카스 시는 대체적으로 동카라카스와 서카라카스로 나뉜다. 대체적으로 동카라카스는 발전된 서구 도시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만, 서카라카스 지역은 빈곤한 풍경이 주를 이루고 있다. 동카라카스의 경우에도 페타레(Petare) 지역 혹은 바리오 지역에는 많은 빈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도시 팽창 과정에서 외곽으로 밀려난 빈민들은 주로 서부 카라카스와 동부 카라카스 외곽의 ‘바리오(Barrio)’ 산 중턱으로 몰리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민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이곳은 단순한 슬럼이었지만, 이후 각종 범죄조직과 마약 등의 문제가 확산되면서 범죄와 연관된 지역이 됐다. 왜냐하면 1970년대 후반부터 베네수엘라의 석유산업 이윤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빈민층에 대한 지원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라카스에서 대표적으로 바리오가 형성된 곳은 동카라카스 수크레(Sucre) 시 페타레 지역과 서카라카스의 카티아(Catia)이다. 바리오에는 말란드로(Malandro)라 불리는 조직폭력배들이 있으며, 이들은 마약 거래나 매춘, 유괴, 각종 범죄에 연관되어 있다.
교통
카라카스 교통의 핵심은 시내와 인접 지역을 어떻게 연결하는가이다. 카라카스와 인근 도시들을 엮는 대표적 도로로 ‘Regional del Centro’ 고속도로(31킬로미터)와 ‘Gran Mariscal de Ayacucho’ 고속도로를 꼽을 수 있다. 카라카스 지역의 교통은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많은 자동차가 밀집되어 있기에 항상 혼잡하다. 이러한 교통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카라카스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지하철 시스템이다. 카라카스에는 47개의 지하철역이 있고, 하루 평균 약 2백만 명을 수송하고 있기에 가장 중요한 교통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1983년 개설된 지하철은 총 71킬로미터 연장에 5개 라인이 건설되어 있어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긴 지하철 중 하나이다.
리베르타도르와 인근 지방자치단체를 연결하는 버스 대중교통시스템이 있는데, 이것을 버스 카라카스(Bus Caracas)라고 한다. 이 교통시스템은 베네수엘라 정부의 공공사업주택부(MOPVI)를 통해 승인되었고, 2012년 10월 3일 운행을 시작하였다. 첫 번째 노선은 총연장 5.2킬로미터에 11개 정류장으로 개통되었고, 카라카스 지하철 7호선 노선과 같다. 시민들은 이 버스 시스템을 이용해 카라카스 지하철의 여러 라인으로 환승할 수 있다. 메트로 케이블(Caracas Metrocable)은 산악 지역에 위치한 카라카스 지역 주민들이 빠르고 안전하게 도심을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교통 시스템이다. 이외에도 카라카스에는 케이블 트레인(Bolivarian Cabletrén)과 메트로부스(Metrobús) 등이 있다.
경제
의외로 물가가 비싼 도시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베네수엘라의 환율 제도가 복잡하기 때문에 벌어진 착시 현상으로, 암시장 환율을 반영해서 계산하면 실질 물가는 싼 편이었다. 사실 현재도 공공요금은 싼 편이다. 정확하게는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는 기초 생필품과 공공 요금이 저렴하지만 상점에 따라 다르다. 빈민층들이 이용하는 메르깔 등의 국영상점에서 파는 물품은 저렴하지만, 시내 중심가의 백화점에서 파는 물품은 대체로 가격이 매우 높다. 휘발유 값이나 대중교통비가 특히 싸다. 한화 500원도 안되는 돈을 가지고 차에 기름을 가득 채울 수 있다.
1989년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이 IMF의 권고로 휘발유 값을 현재의 두 배 수준으로 올리려고 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저유가로 소득이 크게 줄고 복지 혜택이 날로 축소되어 고통받던 베네수엘라 서민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일이었다. 결국 1989년 3월에 대규모 폭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휘발유 값 인상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라파엘 칼데라 정권이 1996년에 다시 대규모의 휘발유 값 인상을 단행하였다.
이렇게 싼 휘발유 값을 이용해서 콜롬비아 범죄 조직이 휘발유를 밀수해서 이득을 챙기거나 인접 국가(브라질과 콜롬비아, 가이아나 등)의 운전자들이 자국 주유소 대신 베네수엘라로 가서 헐값에 주유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국부 유출 등의 문제가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민간 업체에 보조금을 주고 일정 금액에 맞추어서 기초 생활 물품을 생산하게끔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된 물자를 메르칼에서 팔지 않고 암시장 환율로 팔면 차액이 몇 배나 남기 때문에 기초 생활 물품의 상당수가 뒤로 빼돌려진다. 그 때문에 기초 생필품은 수요에 비해 부족한데 2차 가공품이나 공산품 같은 것들은 넘쳐난다.
여기에 2014년 이후 유가가 급락하는 일이 생기자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유가 하락으로 국영 할인점의 운영비가 줄어들자 매대가 물건이 잘 들어서지 않아 텅 비게 되었다. 덕택에 국영 상점에서 값싼 생필품을 구하려면 하루종일 가게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민간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2016년 4월 기준으로 주요 생필품 52개 가운데서 30개가 공급이 부족하다고 하며, 공급이 부족한 생필품의 경우에는 물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2010년대 전반기 대비로 해서 공급이 30%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사실 2010년대 전반기에도 물량을 맞출 수준인 것을 감안한다면 심각한 것이다. 물가상승률이 1년에 수백% 가량을 기록하다 보니 물건을 많이 얻어 내려면 월급 받은 다음에 바로 날 잡아서 하루종일 땡볕 아래에서 길게 줄 서서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비만율도 크게 낮아졌다. 암시장 환율이 폭등하면서 2차 가공식품과 공산품의 가격이 급등해버리는 바람에 중간관료들과 기업들이 환차익을 노리려고 물품을 빼돌리는 등의 부정부패가 횡행하며 식료품과 생필품 물가가 임금대비로 친다면 터무니 없이 비싼 수준에 다다랐고 그래서 생필품이 부족하다고 난리가 나 버린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공식 환율은 10볼리바르지만 시장 환율은 650볼리바르이며, 암시장 환율은 2000볼리바르를 넘는다(2016년 말 기준). 이를 역으로 따진다면 그만큼 암시장에서 물건을 바가지를 씌워서 장사를 해먹는 것이 엄청난 돈이 된다는 뜻이며 당연히 달러를 많이 보유한 기업이나 부패한 관료들이 환차익을 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사회
카라카스 시내에는 총 9개의 공립대학교와 14개의 사립대학교가 있다. 이 중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La Universidad Central de Venezuela, UCV)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696년 왕립 카라카스 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이 대학의 캠퍼스는 도시 내부에 5개가 있지만, 이 중 메인 캠퍼스(Ciudad Universitaria de Caracas)가 가장 유명하다.
카라카스 시에 있는 가장 유명한 장소는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이다. 이곳은 카라카스의 ‘Catedral Parish’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또 다른 기념 장소로는 베네수엘라 유명 인사들의 묘지가 위치한 국립 판테온이다. 이외에도 식민지 시기 건물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아나우코 아리바(Anauco Arriba), 1665년에서 1674년 사이 건축된 산프란시스코 교회(시몬 볼리바르에게 해방자라는 칭호를 부여한 곳) 등도 유명하다.
카라카스는 1951년 제3차 볼리 바리안 게임(Bolivarian Games), 1959년 제8차 중미 및 카리브해 게임, 1983년 제9차 팬아메리칸 게임, 2007년 코파 아메리카 축구 대회 등 수많은 국제 경기를 치른 도시이다. 카라카스에는 국립 스포츠 연구소와 베네수엘라 올림픽 위원회가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스포츠 연맹 본부가 위치해 있다. 카라카스에는 두 개의 프로야구팀이 있는데, 레오네스 델 카라카스(Leones del Caracas)와 티부로네스 델 라 구아이라(Tiburones de La Guaira)이다. 또한 카라카스를 연고로 한 베네수엘라 프리메라 디비시온(Primera División de Venezuela) 팀은 카라카스 FC(Caracas Fútbol Club)로 1부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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