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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히우주(우크라이나어: Чернігів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체르니히우주의 면적은 31,865㎢이며 인구는 976,701명(2022년)이다. 주도는 체르니히우다. 서쪽으로는 키예프주와 드니프로강, 남쪽으로는 폴타바주, 동쪽으로는 수미주,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호멜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브랸스크주와 접한다.
1932년 10월 15일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주로 생겨났다. 주로 우크라이나인이 대부분이며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들도 일부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인과 벨라루스인들은 북부쪽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도시[편집]
체르니히우[편집]
체르니히우는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있는체르니히우주의 주도로, 수도인 키이브로부터 북동쪽으로 150km 떨어진 데스나강의 강둑에 자리하고 있다. 동슬라브족 최초의 봉건국가인 키이브 루스의 문화 유산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당시 키이브 루스의 가장 큰 부속국가인 체르니히브 공국의 수도로, 건축과 회화가 특히 발달했다. 현재 체르니히브는 철도 및 고속도로의 분기점이며, 냉전 기간에는 공군기지가 이곳에 있었다. 구(舊)시가지는 데스나(Desna)강과 그 지류인 스트리젠(Stryzhen)강 사이에 있는 계단식 지역에 위치한다.
오늘날의 체르니히우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흔적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체르니히브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슬라브족의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고도(古都)다.
체르니히우가 건립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19세기에 발굴된 검은 고분(古墳)이라는 뜻의 초르나 모힐라(Чорна Могила)는 동유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무덤 중 하나다. 이 고분의 주인은 10세기 말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도시를 세운 왕자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역사적 기록에 이 도시가 처음 언급된 시기는 907년이다. 고대 슬라브족의 기원과 설화 등을 담은 연대기(Chronicles)에 체르니고프(Черниговъ)라는 이름으로 이 도시가 처음 등장한다. 그래서 공식적인 도시 건립 연도는 907년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9세기에 이미 정착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13세기 체르니히우는 키이브 루스(Kyivan Rus, 키이브 공국)의 부속국 중 하나인 체르니히브 공국의 수도였다. 체르니히브는 동슬라브족 최초의 봉건국가인 키이브 루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체르니히우 왕조는 키이브 루스에서 키이브 왕조와 우열을 가릴 만큼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체르니히브 공국의 지배력은 시베리아 지역의 도시들뿐 아니라 오늘날 러시아 서부 국경 지역의 외딴 도시들까지 뻗어 있었다.
체르니히우 왕조의 번성과 더불어 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특히 건축과 회화는 키이브 루스 전역에 확산되었다. 11~12세기 체르니히우에 세워진 건축물과 교회는 이 시기 동슬라브족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인구가 2만 5,000명까지 달했던 체르니히우의 황금기는 1239년 바투(Batu)가 이끄는 몽골 타타르족의 공격으로 막을 내린다. 1353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5~17세기 체르니히우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모스크바 대공국(1408~1420년, 1503~1618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1618~1648년) 등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 사이에 타타르족의 침략도 계속됐다. 특히 1482년과 1497년에는 크림한국(Crimean Khanate)의 습격으로 불타 거의 폐허가 되었다.
체르니히우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치를 받던 1623년 마그데부르크 도시법(Magdeburger Recht)에 따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635년에는 체르니히브주(州; voivodeship, 폴란드의 행정 구역 단위)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이 지역의 중요성은 17세기 중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항한 카자크(Cossack)의 흐멜니츠키(Khmelnytsky) 봉기 이후 다시 높아졌다. 카자크 연대가 이곳에 주둔했다.
1667년 이 지역의 법적 소유권은 러시아 제국에 넘어갔다. 하지만, 한동안 체르니히브는 카자크 자치체제의 중심지였다.
헤트만(Hetman)이라고 불리는 단장을 중심으로 한 카자크의 자치체제가 붕괴되면서 체르니히브는 러시아 제국의 평범한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797년 말로로시스카야(Malorosiyskaya; 러시아어 Малороссiйская)현(縣; Guberniya, 러시아 제국의 행정구역 단위)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행정개편이 된 후인 1808년에는 체르니고프주의 주도(州都)가 되었다.
당시 체르니히브에는 4,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인구는 1844년 1만 2,000명, 1897년 2만 7,000명, 1913년 3만 5,000명으로 늘어났다.
189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체르니히브 인구 총 2만 7,000여 명 중 유대인이 약 1만 1,000명이었다. 담배 농장과 과수원의 상당수가 유대인 소유였다. 1926년 인구조사에서는 주민 3만 5,200명 중 57%는 우크라이나인, 20%는 러시아인, 10%는 유대인이었다. 1930년대에 산업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인구는 6만 9,000명으로 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인 1941년 9월 9일부터 1943년 9월 21일까지 체르니히우는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독일-소련 전쟁을 거치며 체르니히우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후 도시의 생산성은 1950년대 초까지 전쟁 전 수준으로 복귀됐다.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1959년에는 9만 명에 이르렀다. 그중 69%는 우크라이나인, 20%는 러시아인, 8%는 유대인, 그리고 1%는 폴란드인이었다.
체르니히우는 습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겨울엔 춥고 흐리고 눈이 많이 오는 편이며, 여름 날씨는 대체로 따뜻하고 화창하다.
연평균 기온은 7.0℃로, 1월의 최저 기온은 –5.6℃, 7월의 최고 기온은 19.5℃에 이른다. 일일 평균 기온 최고 기록은 39.0℃이고 최저 기록은 –36.0℃이다. 강수량은 여름철에 많고 겨울에는 적지만, 연중 강수량은 비교적 고른 편이다.[3]
프리루키[편집]
프리루키는 우크라이나 북부에 있는 체르니히우주(州)의 도시다. 프리루키군(郡)의 행정 중심지이지만, 시정은 별도의 시의회를 통해 운영되는 주정부 직할도시다. 프리루키는 우다이강(Udai River)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수도인 키이브에서 동북쪽으로 135km, 주도(州都)인 체르니히브에서 남동쪽으로 150km 떨어져 있다. 인근에 우크라이나 최대 규모의 비행장이자 냉전 시대의 전략폭격기 기지인 프리루키 공군기지가 위치한다.
프리루키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지금의 프리루키 지역에는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정착지가 존재했다. ‘강굽이 부근’이라는 뜻의 도시명은 지리적 특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보았을 때 강에 활처럼 한 바퀴 돌듯이 자리한 마을 모습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명도 있고, 또 다른 설은 강이 범람하면 물에 잠기는 강가의 초원지대에 위치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기록상으로 프리루키는 키이브루스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왕자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에 처음 등장한다. 모노마흐 왕자는 1085년 페레야슬라프 인근에서 폴로베치(Polovetsi) 무리를 마주치자 일단 프리루키로 피했고, 곧 군사를 재정비해 폴로베치를 격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폴로베치는 1092년 다시 한 번 프리루키를 공격해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후 프리루키는 동부 유목 민족들에게 잇따라 약탈당했고, 루테니아 왕자들 간 내전의 중심지가 됐다. 1239년에는 몽골에 의해 파괴됐고, 136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봉건 영주들에게 정복됐다.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수립되면서 프리루키는 폴란드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582년 폴란드의 왕 시기스문드 3세는 비슈네베츠키가(家)에 프리루키를 하사하면서 이 도시에 마그데부르크도시법에 따른 자치권을 부여했다. 1592년 비슈네베츠키 왕자들은 이곳에 본격적으로 정착지를 세우고 도시를 발전시켰다.
1604년 이 도시는 러시아의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의 군대에 급습을 받아 점령됐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600여 채의 집이 불타고 수많은 남녀 주민들이 폭행을 당하거나 살해됐다. 1648년 카자크의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의 영주들에 맞서 농민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헤트만(Hetman)이라고 불리는 수장이 이끄는 준자치적 정치·군사공동체인 카자크 수장국(Cossack Hetmanate)을 세웠다. 카자크 수장국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연대(聯隊; 폴크[полк])별로 나누는 행정제도를 도입했는데, 프리루키는 프리루키 연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약 2,000명으로 구성된 프리루키 연대는 1648~1654년에 있었던 많은 전투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651년의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는 연대장을 비롯한 전원이 장렬히 전사하기도 했다. 1692~1708년 프리루키 연대를 이끈 드미트리 고를렌코 대령은 이 도시에 초소와 요새화된 성을 건설하고, 공예와 무역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고, 두 개의 연례 박람회를 신설했다.
화포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프리루키는 매우 견고해 보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러시아제국의 국경선이 훨씬 먼 남쪽으로 옮겨지면서 프리루키와 같이 요새화된 도시들이 필요가 없게 됐다. 1781년 우크라이나 카자크 수장국이 붕괴되면서 프리루키는 러시아제국의 말로로시야현에 귀속되었고 1802년부터는 폴타바현에 속했다.
프리루키는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세력이 1917년에 세운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UNR)의 거점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UNR은 러시아 공산당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았고, 프리루키는 1920년 소련 정권에 완전히 넘어갔다. 프리루키는 1932년 체르니히브주에 귀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리루키는 1941년 9월 18일부터 1943년 9월 18일까지 독일군에 점령됐다. 점령기 동안 이 도시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학살됐다.[4]
니진[편집]
니진은 우크라이나 북부에 있는 체르니히우주(州)의 도시다. 오스테르강(Oster River) 유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수도인 키이브에서 북동쪽으로 126km, 주도인 체르니히브에서 남동쪽으로 83km 떨어져 있다. 니진군(郡)의 행정 중심지이지만, 시정은 별도의 시의회를 통해 운영되는 주정부 직할도시이다.
오늘날의 니진이 자리한 지역에는 매우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도시 외곽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 고대 슬라브 등의 고대 정착지와 서기 1세기 로마의 동전 등이 발굴되었다. 고대 슬라브족의 기원과 설화 등을 담은 ‘원초연대기(네스토르 연대기, Primary Chronicle)’에 1078년 키이브루스 왕자들 간의 전투 장소로 언급된 ‘니자틴 니바(Nyzhatin Niva)’가 오늘날의 니진 지역인 것으로 추정된다.
니진의 원래 이름은 고대 슬라브어의 남자 이름인 ‘니자트(Nizhat)’에서 유래된 니자틴이고, 인근 지역을 니자틴 니바라고 불렀다. 니자틴은 1135년 폴란드인에 의해 불타버린 도시 목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1147년의 사료에는 이 지역이 ‘우네니즈(Unenizh)’라는 이름의 마을로 언급됐다.
12세기 니진은 키이브루스(Kyivan Rus, 키이브 공국)의 부속국 중 하나인 체르니히브공국의 요새화된 마을이었다. 1239년 10월 몽골 군대가 체르니히브로 진격하는 길에 니진의 요새를 파괴했다. 니진 외곽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13~14세기 니진 주민들이 오스테르와 스몰리안 늪지에 의해 보호되었음을 알려준다.
니진 정착지라는 이름으로는 1385년의 사료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로 처음 언급되었다. 이후 모스크바대공국과 리투아니아 사이의 전쟁(1500~1503)의 결과로 니진을 포함한 체르니히브-세베르스키 지방은 모스크바대공국의 영토가 됐다.
1618년 체르니히브를 포함한 세베르스키 지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폴란드의 왕 시기스문드 3세(Sigismund III Vasa)는 주요 도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니진의 옛 정착지 자리에도 신도시와 성곽이 세워졌다. 1625년 니진은 마그데부르크 도시법에 따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648년까지 이 도시는 폴란드의 부유한 명문가 출신 군사령관 미콜라 포토츠키(Mycola Potocki)의 영지였다. 니진의 카자크와 농민들은 폴란드 봉건 영주들의 압제에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1648년 6월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 군대는 니진을 폴란드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이곳에 카자크 연대를 결성했다.
1654년 니진은 드니프로강 좌안(左岸)의 다른 지역과 함께 모스크바 차르국에 넘어갔다. 1659년 코노토프 전투에서 우크라이나 카자크와 농민세력은 모스크바의 침략자들을 물리쳤지만, 1693년 카자크 수장(首長; Hetman) 선출을 위해 니진에서 열린 총회를 전후로 카자크 내부의 세력 다툼이 커지며 카자크 수장국은 좌안과 우안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분할되고 자치권을 잃게 됐다.
17~18세기 니진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제국, 모스크바 차르국을 잇는 무역로에 자리한 덕분에 다국적 도시가 됐다.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 폴란드인은 물론, 그리스인, 불가리아인, 유대인, 투르크인, 페르시아인, 독일인 등이 이 도시에 함께 거주했다.
그리스인들은 니진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카자크 수장들과 러시아의 왕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다양한 특권을 주었다. 1696년에는 그리스 형제단이 설립됐고, 이것은 18세기 초 그리스 상인 공동체로 개편됐다. 니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은 금과 은, 천 등의 무역을 하며, 자체적인 법원과 교회, 학교를 운영했다. 1746년에는 니진 인구의 7%인 1800명이 그리스인이었다.
1675년부터 약 100년 간 니진은 좌안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가장 큰 무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 니진의 박람회에서는 크림반도의 소금과 돈강 지역의 숫양, 그리고 니진의 오이 등이 거래됐다. 니진의 대장간, 금은방, 구둣방 등은 솜씨가 매우 좋다고 알려졌다.
니진은 한때 하시드파 유대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유대인들은 폴란드가 분할된 후 19세기 초 니진에 처음 정착했다. 1847년 1299명의 유대인이 니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897년에는 니진 주민의 24%인 7361명이 유대인이었다.
19세기 니진은 체르니고프주 니진군의 중심지로, 체르니고프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1805년에는 고등교육기관인 베즈보로드코 리체움(Bezborodko Lyceum)이 설립됐다. 오늘날 니진 고골 주립대학(Nizhyn Gogol State University)의 전신(前身)으로, 우크라이나 폴타바 지방 출신의 러시아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 1809~1852)이 바로 이 학교의 졸업생이다.
1869년 니진-키이브-쿠르스크 간 철도 노선이 개통되고 철도역이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니진은 1941년 9월 13일부터 1943년 9월 15일까지 독일군에 점령됐다. 오늘날 니진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간직한 도시 중의 하나로, 오래된 건물과 유물들로 관광객을 모으고 있다. 특히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성당들이 유명하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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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체르니히우주〉, 《위키백과》
- ↑ 〈체르니히우주〉, 《나무위키》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체르니히브〉,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프리루키〉,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니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체르니히우주〉, 《위키백과》
- 〈체르니히우주〉, 《나무위키》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체르니히브〉,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프리루키〉,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니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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