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시트로엥
앙드레 시트로엥(André Citroën)은 2021년 1월에 설립된 다국적 자동차 회사인 스텔란티스 산하의 자동차 브랜드인 시트로엥의 창시자이다. 그는 자동차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최초로 전륜구동이 적용된 자동차를 출시하고 애프터서비스를 도입하였다.[1]
개요
앙드레 시트로엥은 1878년 2월 5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다이아몬드 상인이었다. 6살 때 시트로엥의 아버지는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광산 사업의 실패로 자살하였다. 시트로엥은 20살에 에콜 폴리테크닉 대학에 입학하고 1900년 포병대 소위로 군복무를 하였다. 1912년 앙드레 시트로엥은 미국 포드에 견학을 가게 되면서 대량 생산 방식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 방식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1913년 사업 구상 초기에 우연히 접한 V형 톱니 기어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톱니 기어의 판권을 얻어서 납품을 하면서 성장했다. 그는 기어를 납품하던 중 모스(Mors) 자동차 공장에 고용되어 생산 공정을 개선하는 일을 했고 1914년 세계 1차 대전 때는 포병대 소위로 포탄 생산을 담당하며 포드의 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단 몇 달 만에 하루 5만 5천 개의 포탄을 생산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휴전협정 이후 공장의 업종을 바꿔야 했던 그는 라 소시에테 데 엥그렌게스 시트로앵(La Societe des Engrenages Citroen)을 설립하고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통한 대중화로 목표를 세우고 1919년 시트로엥의 첫 차인 타입 A를 탄생시키며 자동차 역사에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400cc인 타입 A는 1921년까지 만들었으며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싼값과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보름 만에 1.5만 대를 팔고 한 달 만에 3만 대의 주문을 받게 되면서 대박을 친다. 1920년대 초에는 차체들은 금속 패널의 새시에 나무틀로 만들어졌다. 앙드레 시트로엥은 이러한 차체를 전체 강판으로 교체하였다. 그는 버드(Budd)의 전 금속 차체 구조 제작법에 관한 권리를 매입하고 전체 강판 차체라는 새로운 차체를 사용하였다. 새로운 차체는 더욱 견고하고 단단해졌고 기존 차체에 비해 안정성을 가짐과 동시에 안락함을 줬다. 이 차체는 1924년 10월 B10 모델에 최초 사용되었으며 2년 후 뉴 B14 모델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1920년대 프랑스 도로 표지판은 광고 부착이 가능했는데 시트로엥은 1921년 프랑스를 포함해 자국 식민지의 모든 도로 표지판에 브랜드 엠블럼을 삽입했다. 1922년에는 파리 상공에 비행운으로 시트로엥을 새겨 넣기도 했다. 제품 및 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독창적인 마케팅 능력은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총 네 번에 걸쳐 진행된 위대한 도전 하트-오두앙뒤브레이유(Haart-Audoin-Dubreuil)로 이어진다. 최초의 원정은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진행된 세계 최초의 사하라 사막 횡단이다. 1.4L 직렬 4기통 가솔린엔진과 3단 수동변속기를 탑재한 시트로엥 B2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무한궤도차 B2 하프트랙을 몰고 사하라 사막 횡단에 성공한다. 시트로엥은 다시 원정대를 꾸렸고 알제리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을 잇는 2만km 원정에 또 한 번 성공한다. 이것 역시 세계 최초의 아프리카 횡단 기록이다. 1931년에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중국 베이징을 잇는 1만 3,000km 원정에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했고 1934년에는 로키산맥의 2,400km를 자동차로 주파했다. 시트로엥의 도전은 자연스레 대서특필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도전이 끝난 후 미국 국방부는 시트로엥의 무한궤도 기술을 구입해가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기술력을 과시하면서 브랜드를 잘 알리는 데에 성공한 일석이조의 사례였던 셈이다. 프랑스 정부는 1931년 앙드레 시트로엥의 이 같은 업적을 기려 레지옹 도뇌르 2급 훈장을 수여했다. 그의 도전정신과 창조적인 혁신이 프랑스의 문명은 물론, 세계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그는 르노가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 택시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1,000대의 노란색 시트로엥 택시를 전격 투입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에 옥외광고를 집행했다. 당장의 수익 창출에 앞서 노란 택시와 에펠탑에 광고하는 회사란 이미지를 유럽 내 소비자에게 각인시켰다. 이 같은 혁신적인 홍보·마케팅 전략을 바탕으로 1930년 8만 대 이상 판매되며 르노(6만대), 푸조(5만대)보다 많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시트로엥은 1932년 프랑스 1위 자동차 업체로 발돋움한다. 1931년 10월 또 한차례 미국 방문 이후 앙드레 시토로엥은 이전처럼 발전 엔진을 포함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돌아와 1932년 4월 MFP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C4 와 C6에 이 신기술이 적용되었다. 이로써 시트로엥은 다시 한번 유럽 경쟁 브랜드들을 앞지를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모든 시트로엥 차량들은 발전 엔진을 장착되었다. 1933년 3월 항상 혁신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있는 안드레 시트로엥은 그의 엔지니어들에게 전륜구동에 대해 연구하라고 지시하고 마침내 1934년에 그는 전륜으로 구동되는 차량인 트락숑 아방(TRACTION AVANT)을 만들어서 생산하게 되었다. 다양한 자동차들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려나간 시트로엥은 파격적인 홍보와 마케팅 전략을 내세우며 승승장구했지만 1929년 전 세계를 덮친 경제 대공황에는 당해낼 수 없었으며 자동차의 막대한 연구비와 공장의 무리한 신축으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하게 되어 미쉐린에 인수되고 1934년 말까지 청산 절차를 거친 시트로엥은 위궤양으로 괴로워하다가 1935년 7월 3일 세상을 떠났다.[2][3][4][5]
주요 활동
시트로엥 타입 A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곳은 수백 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의 만드는 차들은 대부분 여전히 산업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공방에서 만드는 수공예품에 가까웠다. 시트로엥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자동차 생산에 뜻을 둔 그는 공장을 확장하고 자동차 생산 설비를 들여놓았으며 1917년 초부터 기술자 줄 살로몬(Jules Salomon)과 함께 자동차 개발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본격적으로 자동차 개발과 생산을 추진했다. 첫차의 개발 목표는 합리적인 값에 유지비 부담이 적은 대중차였다.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던 포드 모델 T의 일관 생산 공정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프랑스에서도 자동차를 대중화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시트로엥의 첫 차는 1919년 6월 4일 샹젤리제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처음 공개되었고 6월 6일부터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10 HP 타입 A라는 이름의 차는 당시 대중차로는 꾸밈새가 고급스러웠다. 내장재는 직물 재질이었고 등받이 안에는 스프링이 있었다. 옆 유리에는 햇빛 가리개가 있었고 실내에도 전기식 조명이 있었다. 앞 좌석은 앞뒤로 거리를 조절할 수 있었고 등받이는 눕힐 수 있었다. 동력은 수랭식 직렬 4기통 1,327cc 4기통 가솔린 엔진으로 최고출력은 18마력이고 최고 속도는 시속 65km에 이르렀다. 변속기의 최종 감속 기어로는 시트로엥의 상징인 이중 헬리컬 기어가 쓰였다. 섀시는 두 가지 길이로 만들어졌고 차체 옆에 발 받침이 필요 없을 만큼 낮아 타고 내리기 편리했다. 스티어링 휠은 차체 왼쪽에 달려 있었는데, 지금과 달리 당시 자동차에서는 흔치 않은 배치였다. 제동은 발로 작동하는 페달로 변속기 브레이크, 핸드 레버로 뒷바퀴를 제동했다. 차체는 3인승 토피도(Torpedo)부터 경 트럭과 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생산 첫해에 기본형 타입 A는 7,950프랑에 팔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저렴한 차였지만 꾸밈새는 두 배 이상 비싼 차와 비슷했다. 출시는 성공적이었지만 초기에는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1919년에는 2,810대를 판매하는데 그쳐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했다. 게다가 대량생산으로 수익과 효율을 높이려면 제품을 단순화하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타입 A는 그와는 반대였다. 1920년에는 섀시 길이를 단일화하고 값을 1만 2,500프랑으로 올렸는데 그럼에도 타입 A는 여전히 시장에서 가장 저렴했다. 1920년에는 판매가 크게 늘었고 생산 속도도 하루 100대를 넘겨 한 해 동안 2만 대 이상 생산되었다. 1921년에는 모델 종류를 한층 더 단순화해 기본형 스탠다드와 고급형 룩스, 스포티한 토피도 스포트 스페셜의 세 가지로 정리가 되었다. 타입 A 스페셜은 엔진 배기량을 키워 일반 모델보다 성능이 더 뛰어났다. 타입 A는 유럽 최초의 완성차이기도 했다. 소비자들은 차를 구매한 뒤 코치빌더에게 차를 맡겨 따로 차를 꾸미지 않아도 됐고 이런 장점으로 1919년 6월부터 1921년 12월까지 2년 반 동안 24,093대가 생산되었다. 유럽에서 처음부터 현대화된 생산 시설을 갖추고 대량 생산을 통해 대중차를 보급한 회사는 시트로엥이 처음이었고 그 덕분에 타입 A는 유럽 최초의 양산 대중차라는 타이틀과 더불어 합리적 값에 살 수 있는 믿음직한 차의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심을 수 있었다.[6]
마케팅 전략
시트로엥은 기술력에서는 항상 자신감을 보이는 브래드이며 그 자신감을 표현할 다양한 마케팅을 진행해 상징적으로 구술력을 보여주었다. 1921년에 발표된 B2의 자동차의 내구성을 보여주겠다며 대뜸 사하라 사막을 횡단해 성공하였고 1925년에는 B12의 강철 차체 강성을 보여주기 위해 코끼리를 차 위에 올려놓고 시내 주행을 해 사람들을 굉장히 놀라게 했다. 1925년에는 전구 25만여 개 90㎞ 길이의 전선을 이용해 CITROEN이라고 쓴 네온사인을 에펠 탑에 걸어 브랜드를 알리기도 했다. 실제로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에펠탑에 CITROEN 글자가 매달려 있었다. 월간 시트로엥이라는 잡지를 15만 부나 찍어서 프랑스 전역에 배포하기도 하였으며 아이들에게 미니어처 카를 선물하는 등 현재 말하는 바이럴 마케팅에서도 앞선 모습을 보여주었다. 발랄하고 독특한 마케팅과 혁신적 기술 아이디어는 모두 그의 자신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로지 자신의 브랜드와 자동차에 빠져 일생을 보낸 시트로엥은 행복한 괴짜 엔지니어이자 천재 마케터였다.[7]
각주
- ↑ "André Citroën", "wikipedia"
- ↑ 존 프레스널, 〈고지식한 완벽주의자, 앙드레 시트로엥〉, 《아이오토카》, 2019-11-25
- ↑ 〈앙드레 시트로엥〉, "Citroën Origins"
- ↑ 박홍준, 〈(주말의 MG) 당신이 마케터라면 시트로엥은 알아야죠〉, 《모터그래프》, 2020-03-28
- ↑ "Innovation", "Citroen Korea"
- ↑ 오토헤럴드, 〈브랜드 역사의 시작 #12 유럽 최초의 완성차 '시트로엥 타입 A'〉, 《네이버 포스트》, 2019-01-17
- ↑ devmin, 〈시트로엥의 역사〉, 《티스토리》, 2017-03-02
참고자료
- "André Citroën", "wikipedia"
- 존 프레스널, 〈고지식한 완벽주의자, 앙드레 시트로엥〉, 《아이오토카》, 2019-11-25
- 박홍준, 〈(주말의 MG) 당신이 마케터라면 시트로엥은 알아야죠〉, 《모터그래프》, 2020-03-28
- 오토헤럴드, 〈브랜드 역사의 시작 #12 유럽 최초의 완성차 '시트로엥 타입 A'〉, 《네이버 포스트》, 2019-01-17
- 〈앙드레 시트로엥〉, "Citroën Origins"
- "Innovation", "Citroen Korea"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