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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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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yj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5월 27일 (목) 15:26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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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학 자일상용차 회장
자일대우상용차㈜(Zyle Daewoo Commercial Vehicle Co., Ltd.)

백성학은 한국의 사업가이며 영안모자의 회장이다. 6.25 전쟁시절에 전쟁고아로 지내다가 19세 되는 1959년 2월에 영안모자 상사를 차렸으며 수십년간의 노력을 거쳐 영안그룹을 육성하였다. 영안그룹은 산하에 클라크, 자일상용차, OBS경인TV 등 7개 계열사를 두고 있다.

2019년부터 경영권을 세 아들에게 맡기고 백학재단을 통한 봉사활동을 추진하면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생애

백성학은 1940년 4월 18일에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시(牡丹江市) 무링현(穆稜縣) 싱위앤진(兴源镇)에서 신흥백화점을 운영하던 백동원(白東元)과 김숙녀(金琡女)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조부 백운휘(白雲輝) 장로는 3·1운동 당시 신의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었다가 탈옥(脫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4년 7월에 장티부스로 아버지를 잃고 1945년 10월에 할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용암포로 갔으며 할아버지는 그 곳에서 벽돌공장 등의 6개 사업체를 운영하였다. 1946년에 북한 공산당정권으로부터 가정신분을 부르주아로 분류받아 자산을 몰수당했으며 1949년에 용암포 일대에 장티푸스가 유행되면서 그 해 가을에 원산으로 이주하였다. 인민학교 3학년 재학중인 1950년에 6.25전쟁이 폭발하였으며 원산광석교회 신도들이 남쪽으로 피란가는 것을 전송해주다가 사고로 인해 원치않게 남쪽으로 가게 되었다.

전쟁고아가 되면서 생존으로 부대를 따라다니며 여러가지 심부름도 하였고 그러다가 부상도 입으면서 1955년 2월까지 지냈고 그 뒤에 서울에서 남학생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서 마룻바닥을 쓰는 일들을 하였다. 18살 때 공장 하나와 판매점포를 관리하는 자리까지 올랐으며 19살 때(1959년 2월) 조그마한 가게를 임대하여 청계천 4가 개천가에 노점형태의 모자점을 차리고 자립을 하였다.

수년간의 노력을 거쳐 1964년에 영안모자는 모자 생산업체로 성장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 한국 의상업계 처음으로 대중광고를 시작하였다. 1965년 지금의 KOTRA가 수출 진흥으로 조직한 산업박람회를 계기로 일본에 수출을 시작하였으며 1967년에 미국시장도 개척하였다. 1972년에 미국시장에 영안 브랜드를 런칭하였으며 1975년에 미국법인 에더위스트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글로벌경영을 시작하였다. 1967년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 말까지 한국에 5개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1978년 12월 기준으로 연간수출액은 1000만 달러를 초과하고 고용하는 종업원수량도 1,500명 수준을 이루었다. 1980년에 진입하면서 한국 인건비의 부담과 수출쿼터의 피면으로 해외진출을 시작하였으며 처음에는 코스타리카에 현지법인을 설립하고 경험을 모색하면서 안정화를 이룬 뒤에 1988년에 스리랑카,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에 해외공장을 설립하였다.

코스타리카에서 모자 사업을 추진하다가 1992년에 현지 버스업체 마우코와 손을 잡고 버스 사업에 진출하였으며 1995년에 마우코의 지분을 인수하고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의 대우버스와 미국의 클라크지게차가 매물로 나왔으며 이 때 마우코를 통해 자동차와 중공업에 관한 이해도가 높아진 백성학은 인수전에 뛰어들어 대우버스와 클라크지게차를 인수하였다. 이 시기에 영안은 매출 1조 클럽에 들어섰다.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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