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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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본(일본어: 中日本, 영어: central Japan)은 일본을 크게 나눌 때 일본의 중앙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주로 태평양을 접한 지역에서는 미에현에서 시즈오카현 사이를 말하며, 미에현의 우에노 분지와 시즈오카현의 누마즈시 동쪽은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내륙에서는 기후현과 나가노현을 포함하고, 야마나시현을 제외한다. 동해 측에서는 기노메 고개에서 요네야마 고개 사이로 지칭한다. 즉 후쿠이현의 에치젠 지방에서 니가타현의 조에쓰 지방까지이다.
일본을 동일본과 서일본으로 양분할 때에는 이토이가와-시즈오카 구조선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의도적으로 주부 지방(특히 태평양을 접한 지역과 내륙 지역)을 동일본이나 서일본, 혹은 미나미칸토 지방이나 기나이와 구분할 필요를 가질 때 중일본이란 표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법령 등에서 거론한 것은 아니다. 동일본이나 기타니혼과 같은 방위를 이용해 일본을 표현하는 다른 표현과 비교하면 쓰이는 일이 적다. 여기는 동북일본호, 서남일본호, 7도 메리애나호가 회합하기 때문에 지형의 배열도 복잡하고, 산지도 가장 높아 일본 알프스가 북동·서남 방향으로 배열됐다.
역사
구석기 시대 일본은 빙하기로 인해 한반도 및 타이완, 남중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시기에 인류가 일본에 첫 발을 딛었다.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일본은 섬이 되었고,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는 길게 보면 기원전 1만 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는 기원전 한반도에서 유입한 도래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래인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기원전 400년 경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시기를 야요이 시대라고 한다.
기타큐슈와 혼슈 서부 및 남부를 중심으로 소국들이 세워졌으며, 이합집산을 거쳐 4세기 경에는 현재의 나라현에서 미약하게나마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갖춘 야마토가 등장하였고, 주변 소국들을 하나하나 복속시키며 외교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고훈 시대(古墳時代)라고 한다. 일본이 국가로서 틀을 잡은 6~7세기 아스카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가 불교를 공인하는 한편, 견수사가 파견되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국의 선진 문화를 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을 압박하여 강제 개국시키게 된다. 또한 청일전쟁에서 동아시아의 기존 패권국인 청나라에 승리하여 타이완섬과 관동주를 얻었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에 승리하여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명실상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에 지속해서 간섭하다가, 결국 한반도는 일본에 강제적으로 합병되었다.
이후 서구 열강들과 함께 패권을 부리며 대놓고 제국주의를 표방하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친선관계였던 영국에 도움을 준 사례를 들어 승전국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지 않고 좋은 포지션을 차지하게 된다. 미크로네시아와 칭다오를 비롯한 독일 제2제국의 아시아권 구 식민지들을 추가적으로 차지한 것도 이 시기. 보통 일본 제국을 말할 때, 메이지 시대 ~ 다이쇼 시대를 전성기로 본다. 이후 일본 제국이 1923년 관동대지진을 기점으로 사회상의 동요가 시작되었고 1930년대 들어서면서 군국주의화 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사상적으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같이 민주주의, 자유주의를 비롯한 근대 서구권의 신 사상들이 크게 퍼진 첫 시기가 1910~1920년대였다.
세계 대공황 당시, 미국은 기본적인 경제적 체급이 이미 전 유럽과 맞먹을 정도인 데다 공공 건설을 늘리는 뉴딜 정책이 성공하면서 다시 극복했고, 영국과 프랑스 등 기존 열강들은 막대한 식민지를 이용한 블록 경제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는 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었을뿐더러 처음부터 경제 체제가 이들 국가에 비해 미약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1차 대전에 패배하면서 안그래도 부족한 식민지를 전부 잃어 큰 위기를 맞이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결국 나치당에게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기며 나치 독일로 재탄생, 1차 대전의 승전국임에도 기껏해야 배상금 일부와 티롤 지방 정도만을 받은 이탈리아 왕국도 공황 상태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군부가 정권을 획득하며 2차 대전의 씨앗이 싹텄다.
이 세국가들은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물든 채로 1930년대를 맞이하였고 서로간의 동맹을 맺으며, 추축국이 된다. 군부 세력이 권력을 차지한 이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더욱더 미쳐간 일본은 중국을 침략해 만주국을 세우고 중일전쟁, 난징대학살을 일으키며 온갖 패악, 깽판을 벌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점 폐단이 심해지고 있었으며, 중일전쟁 이후, 일본의 대아시아 확장정책에 반감을 느낀 미국이 '계속 그렇게 놀면 석유 등 중요 물자를 안 팔겠다'는 초강수로 나서자, 이성을 잃은 일본 군부는 미 해군의 중핵인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전격 기습하는 최악의 수를 두고 본격적인 대미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권 전체를 순식간에 침략하여 싸그리 식민지로 만드는 등 야심을 키웠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정적인 대패,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중추 전력을 이때를 기점으로 상실했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압도적인 체급으로 버티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술, 전략적인 성과를 내며 선전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 전력의 상당 부분이 중국 전선에 묶이게 되었고, 의미 없는 소모전이 강요되었다. 이후 이미 전쟁을 수행할 만한 물자와 기반이 한계에 다다른 일본과는 달리 타국과의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쉴새 없이 터져 나오는 미국의 먼치킨 공업생산력에 밀려 일방적으로 미 공군의 공습에 본토가 유린당했으며 반자이 어택 및 카미카제와 같은 기행을 반복하며 전력만 소모했다.
일본이 정신나간 기행을 반복하며 항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하자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원자폭탄을 터뜨린다. 사실 도쿄 대공습이 있었던 시점에서 이미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본토의 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한 일본은 일상적으로 폭격을 당하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대놓고 미군기가 일본 본토 상공을 비행하면서 안전하고 쉽게 원자폭탄을 투하할 수 있었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유에 대해 소련군이 한반도 근처까지 진격해 오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소련군이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8월 8일로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8월 6일 후의 일. 사실 미국은 친소 성향의 루즈벨트 행정부 당시 소련이 전쟁에도 참여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으나 반소 트루먼 행정부가 들어선 후 극동에서의 소련의 지분을 최소화하려 하였고 소련 견제가 원자탄 투하의 여러 목적 중 하나가 맞긴 했다. 일본은 원자폭탄을 맞아도 절대 항복하지 않고 죽창을 잡을 것이며, 일본군의 저항도 상당하리라고 미국이 과대평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이미 원폭이 먹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시나리오로 1946년을 겨냥한 올림픽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자마자 곧바로 항복하면서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고, 태평양 전쟁에서 경험했던 격렬한 일본군의 저항과 이로 인한 미군의 큰 손실과는 다르게 이미 독소전에서 지옥을 맛봤던 소련군은 오합지졸이던 만주의 관동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한반도까지 진격했고 해상에서도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몰아붙여 사할린과 쿠릴 열도 전역을 차지했다. 일본 제국은 패망하고 강점하였던 식민지와 점령지가 해방되었으며, 일본은 주권을 상실하고 연합군 점령하에 들어간다.
패전 후 더글러스 맥아더 휘하의 군정기를 거치면서, 경제나 식량사정이 피폐해져 있던 일본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UN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전쟁특수로 공업기반을 재건하였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어 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주권을 되찾았다. 패전 이후 향후 10년 동안 전국의 복구화를 발빠르게 추진하였고 반공정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하며 냉전기에 들어서 공산주의 확산에 예민해져 있던 미국의 신뢰를 다시금 얻어갔다. 덕분에 미국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진무 경기를 맞이하며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54년 12월부터 1957년 6월까지 31개월 동안 이어진 전후 첫 번째 대형 호경기. 진무 경기 동안 일본은 미국의 원조경제에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하는 발전을 이뤘다. 이름도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 덴노에서 따왔다. 일본 정부가 1956년 경제백서에서 '이제 전후(戰後)는 끝났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이 시기 이루어진 자유당 - 민주당의 합당으로 자민당이 만년 여당이 되는 55년 체제가 문을 열었다. 1960년대에는 서독을 제치며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 경제 규모 3위에 도달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보 조약에 이어 오키나와에 미군의 장기 주둔을 인정하는 개정을 1960년에 자민당이 강행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본의 본격적인 시민운동의 시작이다. 1964 도쿄 올림픽 개최를 위한 개발붐이 일었고, 올림픽의 성공 개최를 통해 전 세계에 일본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였음을 알렸다.[1]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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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지역
주부지방
주부지방, 츄부지방, 또는 일본 중부지방은 일본의 혼슈섬의 중앙에 있는 광역지자체를 분류하는 말이다. 일본 열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동으로는 도호쿠 지방과 간토 지방, 서로는 긴키 지방, 남으로는 태평양, 북으로는 동해와 접한다. 동해와 접한 호쿠리쿠 지방, 나가노 현·기후 현 일대는 동해측 기후이며 세계적으로도 강설 지역에 속한다. 야마나시 현, 동해측 기후의 지역을 제외한 나가노 현은 중앙고지식 기후로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이가 심하고 일본 알프스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시즈오카 현, 아이치 현 등 태평양과 접한 지방은 태평양측 기후로 대체로 온난하다. 크게 동해에 접한 호쿠리쿠 지방, 내륙의 주오 고지, 태평양에 접한 도카이 지방으로 나눈다.
- 호쿠리쿠 지방 - 주부지방 가운데 동해에 접하는 네 현, 즉 니가타현, 도야마현, 이시카와현, 후쿠이현을 말한다. 세계적으로 눈이 많은 지역이며, 옛 지방 구분인 호쿠리쿠도에서 유래한다. 니가타현의 경우 지리적으로는 호쿠리쿠 지방에 포함되지만, 지금은 고신에쓰 지방으로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고속교통망 정비에 따라 도쿄 및 간토 지방의 영향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호쿠리쿠 지방과 신에쓰 지방을 합쳐서 호쿠신에쓰 지방이라고도 말한다. 호쿠리쿠 지방은 니가타 현을 제외하면 경제적, 문화적으로 교토시, 오사카시 등 긴키 지방의 영향력이 강한데 특히 긴키 지방에 접하는 후쿠이 현은 긴키 지방에 포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 주오 고지 - 혼슈 중부(주부 지방)의 산악 지역을 말한다. 마쓰모토 분지나 스와 분지 등 분지가 많으며, 선상지가 발달해 있다. 주오 고지는 행정적으로 명확한 구분이 아니며, 출처에 따라 기후 현 내의 범위가 조금씩 다르다.
-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기후현의 산악 지대
- 야마나시 현, 나가노 현, 기후 현 히다 지방
- 야마나시 현, 나가노 현, 기후 현 도노 지방
- 도카이 지방 - 주부 지방 남쪽의 네 현, 즉 기후현, 미에현, 시즈오카현, 아이치현이 속한 지방을 말한다. 주로 주쿄권과 영역이 겹치는 편이다.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한 지방이며, 경제적 관점에서는 시즈오카 현을 제외한 세 현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행정 구역이 동서 쪽으로 넓은 시즈오카 현의 경우, 서부 지역은 나고야의 영향력이 강하지만 중부 및 동부 지역은 오히려 도쿄 및 간토 지방의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시즈오카 현에서도 특히 이즈 반도 등 동부 지역은 간토 지방 일부로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는 고키시치도의 도카이도에 속한 미에 현, 시즈오카 현, 아이치 현을 말할 경우가 많다. 바다에 접하지 않는 기후 현은 고대에는 혼슈 섬의 동부 내륙 지방에서 도호쿠 지방을 그 범위로 한 도산도에 속해 있었다. 미에 현은 메이지 시대에 정해진 후 현재도 학교 교육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방 구분으로는 긴키 지방에 포함되고 있으며 방언도 교토, 오사카 등 긴키 방언을 사용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나고야의 영향력이 강하므로 도카이 지방에 포함된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