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슈바이처
루이스 슈바이처(Louis Schweitzer)는 현직 프랑스 외국외교위원회 의장이고 프랑스 외교장관 일본사무 특별대표이며 프랑스 이니셔티브 의장이고 전직 르노(Renault) 그룹의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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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편집]
루이스 슈바이처는 1942년 7월 8일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아버지 피에르 폴 슈바이처(Pierre-Paul Schweitzer)와 어머니 캐서린 해트(Catherine Hatt)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1968년에 파리정치대학(Institut d'Études Politiques de Paris)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뒤 지속하여 국립행정학교(E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학생으로 2년간 수업하였으며 1970년에 재무감사관(Inspecteur des finances) 자격을 가졌다.
1970년에 프랑스정부 공중지원총괄 사무실(Office of the Director of General Public Assistance) 감사관으로 취직하였으며 그 뒤에 재정 감독총괄 사무실의 감사관으로 역할하다가 1974년에 예산부(Ministry of the Budget)에 편입되어 감사관을 맡고 1979년에 부총괄을 맡았으며 1981년에 수석 직원으로 되었다. 1983년부터 산업과연구부(Ministry of Industry and Research)에서 수석 직원으로 임직하다가 1984년부터 2년간 프랑스 총리사무실 수석직원으로 임직하였다.
1986년에 정부파견으로 르노(Régie Nationale des Usines Renault)의 파이낸스 부총재(vice president of finance)로 임직하였으며 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수석 재무관으로 역할하고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EVP로 임직하였다.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운영총괄로 역할하였으며 1992년부터 CEO와 이사장으로 2005년 4월까지 지냈다. 2001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이사장으로도 임직하였다. 2005년 4월 29일부터 2009년까지 르노 이사회 회장을 맡았으며 2005년부터 2012년 사이에 아스트라제네카( Astra Zeneca)의 회장으로 지내고 2010년부터 2012년 사이에 AB Volvo의 회장으로 지냈다.[1][2][3]
르노 경영[편집]
르노 임직 초기[편집]
1986년에 르노는 떨어진 제품품질과 비효율로 경영난에 처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경영적자 35억 달러를 발생하고 9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있었으며 도산 안하는 유일한 원인은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프랑스정부는 1986년에 수익을 달성하라는 마감 경고를 내림과 동시에 프랑스 총리 비서실장으로 있던 슈바이처를 재무감독으로 르노에 파견하였다. 슈바이처는 그 시절의 르노 CEO 인 조르주 베세(Georges Besse)와 손을 잡았으며 확실한 수익목표를 설정해놓고 각 공장들에 수익과 지출의 관리를 추진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르주 베세는 르노의 기업문화를 바꿀려면 기업의 사유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이에 동조하여 슈바이처도 르노의 사유화 추진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아쉽게도 베세는 1986년에 반자본주의 테러리스트에 살해되었다.
1987년에 르노는 미국시장에서 자동차판매를 중단하였으며 거기에서 르노자동차는 조잡한 제품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기존 르노제품의 좋지 않은 명성으로 슈바이처는 미국시장의 재 진출을 상당히 우려하였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1987년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 한 해로 되었으며 그 뒤 연속 9년 흑자의 개시년으로 되었다. 1988년에 슈바이처는 조르주 베세의 후임인 레이몬드 레비(Raymond Levy)와 공동으로 전사적품질관리(total quality management) 경영방침을 수립하고 고객의 소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동차를 제조하는데 전력하였다. 전사적품질관리 기법은 미국의 경제학가 에드워드 데망(W. Edwards Deming)이 제출한 품질관리 방법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고객중심의 자동차 개발로 르노의 재무건정성을 향상시키는 방안은 이를 주장했던 슈바이처의 승리였다. 1988년에 르노는 파트릭 르 케망(Patrick le Quément)을 수석디자이너로 영입하였으며 파트릭 르 케망은 슈바이처의 재임기간에 르노의 혁신적인 디자인을 책임지겠다고 본인의 태도를 밝혔다.
1990년 12월에 슈바이처는 르노의 운영총괄로 되었으며 1992년 5월에 레이몬드 레비의 후임으로 CEO와 이사회 회장을 맡았다. 슈바이처는 프랑스정부를 설득하여 기업사유화 추진을 개시하였으며 원활한 사건처리 방식으로 큰 논란이 없이 파리 근교의 불로뉴비양쿠르(Boulogne-Billancourt)공장을 폐쇠하여 본인이 직면했던 어려운 도전을 이겨냈다.[4]
구조조정과 글로벌 진출[편집]
1996년에 슈바이처는 미쉐린의 카를로스 콘(Carlos Ghosn)을 영입하여 EVP 신분으로 회사의 제조 프로세스를 전담하게 하였으며 그 해에 6개 버전으로 출시한 매건 세닉(Mégane Scénic) 모델의 양호한 판매추이에 비추어 글로벌 전략의 일환으로 브라질의 쿠리티바(Curitiba)에 신규 완성차공장을 구축하고 58,500명의 직원을 해고하였다.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900만 달러의 비용이 지출되었으며 연속 흑자 9년을 발생시킨 뒤 처음으로 적자를 발생시켰다. 언론에는 슈바이처가 물러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사회는 이의 조치를 찬성하였다.
1997년에 생산거점 조정으로 빌보르데(Vilvoorde) 완성차 공장을 폐쇄하고 3,100명의 직원을 해고하였으며 이로인해 사회적으로 큰 압박을 받았다.
슈바이처는 공식적으로 1990년대 말에 르노를 세계적인 존재로 육성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1998년에 르노가 400억 달러의 영업수익과 14억 달러의 순이익을 창출할 때 그의 계획은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998년 12월에 르노는 루마니아 자동차제조사 다치아(Dacia)를 인수하였으며 1999년에는 54억 달러를 투자하여 닛산의 36.8% 지분을 인수하고 회사통제권을 얻었다. 닛산은 1998년 한 해에만 57억 달러의 적자를 발생하였으며 누계 부채는 194억 달러로 지급하는 이자만 10억 달러가 되었다. 슈바이처는 1998년에 다임러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하면서 두 가지 기업문화를 강제 통합하는 방식을 보고 이는 재난이라고 평가하고 닛산과의 관계를 통합보다는 얼라이언스라는데 강조하면서 르노의 닛산 지분 인수는 르노가 지역회사로 남아있냐와 글로벌 회사로 될러냐의 선택이라고 밝혔다.
1999년 6월에 슈바이처는 르노와 임직계약을 체결하고 2005년까지 CEO와 이사회 회장을 맡기로 하였으며 그 뒤에 닛산의 회장과 CEO인 하나와 요시카주 회장을 르노의 이사회 이사로 임명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닛산과 르노의 얼라이언스 관계강화를 기대하였다. 이와 동시에 카를로스 곤은 닛산의 5개 공장을 폐쇄하고 30% 생산을 감축하였으며 21,000명을 해고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30억 달러의 경비지출을 줄였다. 2000년에 슈바이처는 2010년에 르노와 닛산의 자동차 모델 플랫폼을 공유하는 전략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양사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품질에 관한 공동의식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2000년 3월에 끝나는 회계연도에 닛산은 7.789억 달러의 순이익을 발생하였으며 수익 발생의 주요 원인은 곤의 구조조정에 그 공로가 있었다고 공인되었다. 2000년 11월에 슈바이처는 일본을 방문하면서 시위의 폭풍을 맞을가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놀랍게도 정부관원들과 기자들이 수익성과 고객만족도의 추구로 닛산 기업문화를 재구축하는 그의 노력에 호의적인 반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닛산에 관한 개변에 미디어들이 주의를 하고 있는 가운데 르노의 삼성자동차 통제권을 인수하는 활동은 미디어에 보이지를 않았다.
닛산과 다치아 인수의 초보적인 성공에 이어 르노는 중국시장의 진출에서 약간한 성공을 얻었고 인도 시장의 어려움을 발견하였으며 미국시장으로의 진출이 거의 막혀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2000년 말에 프랑스정부는 르노의 지분을 44.2%까지 줄였다.[4]
글로벌 자이언트로 된 르노[편집]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데는 인터넷의 잠재력을 발굴해야 한다고 판단한 르노는 2000년 2월 8일에 회사 웹사이트 자동차 판매계획을 발표하였으며 그 해 10월부터 공식판매를 시작하였다. 웹사이트를 통하여 고객들은 소원하는 자동차 사양을 정할 수 있으며 자동차구입에 관련된 파이낸싱 업무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르노뿐만 아니고 닛산에도 도입되었으며 그 뒤에는 포드, GM, 다임러 등 회사들과 웹 사이트 판매관련 제휴관계를 구축하고 공동으로 1개 웹사이트에서 자동차 판매를 추진하였다.
2001년 3월에는 르노 파운데이션을 설립하고 외국에서 프랑스 문화와 언어 이해를 촉진하는 활동을 조직하였으며 일본에서 시작하는걸로 한 뒤 같은 달에 토쿄에서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런칭하고 일본관리자를 대상으로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하는 방법에 관련된 트레이닝을 조직하였다. 유사한 시기에 르노는 카를로스 곤을 포함한 32명의 관리자를 일본으로 파견하였으며 닛산의 SVP를 르노의 이사로 임명하였다. 2001년 3월 30일에 닛산은 회계연도 순이익이 20.4억 달러가 발생하였다고 소식을 전하였다. 2001년 1월에 르노는 볼보의 주요 주주로 되어 합작하는 방식으로 산업용 자동차를 생산하기로 하였으며 그 때 볼보는 세계 2위의 트럭생산 업체였다.
2002년에 르노는 메간 해치백(Mégane hatchback)과 어반타임 미니밴(Avantime minivan)을 소개하였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슈바이처는 신규 모델 개발을 추진하는 외에 닛산과 르노의 순환출자를 추진하여 닛산이 르노 15% 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하고 닛산과 르노를 대상으로 연합지배위원회(joint governing board)를 구축하였다.
2003년에 슈바이처는 ACEA(The European Automobile Manufacturers' Association, 유럽자동차제조사연합회)의 2 번째 임기를 시작하였다. 닛산은 9.3억 달러를 투자하여 미국의 미시시피에 공장을 구축하였으며 메간 컴팩트(Mégane compact)는 유럽 2003년의 차(the Car of the Year)로 평가를 받았다.[4]
신규 도전[편집]
르노에서 맡는 직책외에 슈바이처는 2004년 3월에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제약회사 아스트라 제네카(Astra Zeneca)의 이사로 임명되었다가 2004년 말에 퍼시 바네비크(Percy Barnevik)의 후임으로 이사회 회장이 되었다.[4]
각주[편집]
- ↑ "Louis Schweitzer", Ashinaga
- ↑ "Louis Schweitzer 1942— Biography", Reference for Business
- ↑ "Louis Schweitzer (businessman)", Wikipedia
- ↑ 4.0 4.1 4.2 4.3 "Louis Schweitzer 1942— ", Reference for Business
참고자료[편집]
- "Louis Schweitzer", Ashinaga
- "Louis Schweitzer 1942— ", Reference for Business
- "Louis Schweitzer (businessman)", Wikipedia
- 〈루이스 슈바이처 르노자동차 회장 12일 한국 방문〉, 《매일경제》, 2000-06-05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