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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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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yj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5월 17일 (월) 11:54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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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기아자동차 창업주
기아자동차㈜(KIA Motors)

김철호(金喆浩)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기아자동차의 창업주이다. 자전거 부품회사 경성공업을 창립하고 자전거, 모토사이클, 자동차 제조사 기아산업을 창립하였다.

생애

김철호는 1905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출생하였으며 호는 학산(鶴山)이다.

1922년에 일본 오사카로 건너 가 막노동으로 직장생애를 시작하였으며 우연한 기회에 삼화제작소로 부르는 철공소의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자전거 부품인 볼트와 너트 제작을 배우기 시작했다. 철공소는 10여명의 작업자를 두고 있는 자그마한 기업이었으며 김철호는 입사 4년만에 회사의 지배인으로 승진하였다. 그 당시는 일본경제의 부흥기라서 사업은 잘 나갔으며 그러다가 1929년에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면서 영향이 일본에 미쳐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삼화제작소도 경영을 더 못하고 1930년에 퇴직금대신 기계를 나누어주었다. 이 때 김철호는 자그마한 창고를 빌려 퇴직금으로 받은 선반을 가지고 볼트와 너트를 가공하기 시작하였으며 삼화제작소라는 상호를 달았다. 그 뒤 만주사변(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칭한다)과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군수용 볼트와 너트의 주문이 밀려들어 회사의 규모는 3개의 공장으로 확장되고 직원도 300명이 넘을 정도로 되었다. 부품가공 외에 김철호는 자전거의 제조와 판매에도 착수하였으며 전쟁종료 후 자전거 소요의 증대에 대비를 하였다. 1941년 10월에 삼화제작소를 삼화정공㈜로 상호를 변경하였으며 그러다가 1943년에 진입하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때에 전쟁실패를 예감한 김철호는 사업을 정리하고 500만엔의 사업정리 대금을 손에 넣었다. 그 시절의 500만엔은 2017년 시절의 100억원을 넘는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었다.

1944년에 귀국하여 서울 남대문로 5가에 자전거부품을 생산회는 회사 경성정공㈜을 설립하였으며 일본에서 사용했던 장비들도 옮겨왔다. 한동안 중고 자전거 차체의 분해 재생 및 조립을 추진하다가 늘어나는 자전거의 소요에 대비하여 1946년 1월에 영등포 공장을 준공한 뒤 자전거 개발에 착수하였으며 대부분의 부품개발에 성공을 하였으나 바퀴에 들어가는 림(rim)개발은 성공을 못하였다. 1949년 10월에 림 도면을 얻은 뒤 1950년에 6.25 전쟁이 폭발하면서 영등포공장은 훼손되고 개발계획도 추진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51년에 잔여 생산시설과 원자재를 부산으로 옮긴 뒤 부산공장을 구축하고 그 해 9월에 일본기술자 와다를 기술고문으로 영입하여 림개발에 성공하였다.

1952년 1월에 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 12대 자전거 시제품을 완성하였다. 개발된 자건거의 브랜드는 삼천리호로 하였으며 전쟁으로 모든것이 침체되어 있는 시기에 큰 뉴스로 되었다. 1950년대 말까지 번창하게 나가다가 1959년에 사라호 태풍재해로 부산공장이 전부 파손되어 이듬해에 무리한 사채동원을 추진하였으며 이로인해 생산시설을 한성 자건거㈜에 넘겨주었다.

1961년 5.16 사변후 재기에 나서 9월에 자전거부를 회수하였으며 1965년에 2천대 자전거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1970년에는 10만대 이상 수출하여 2백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였다.

자전거사업을 추진하는 외에 김철호는 자동차사업을 목표로 단계별로 접근해 나갔다. 1959년에 일본 혼다, 마쓰다와 모토사이클과 삼륜차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추진하였으며 1961년에 2륜 모터사이클, 1962년에 3륜 자동차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1964년에 공채 1기 출신인 김선홍 차장을 일본 혼다자동차에 보내 엔진 생산기술을 배우게 하였으며 1970년부터 경기도 시흥에 엔진 주물, 기계가공, 금형, 프레스, 차체, 차축, 도장, 조립으로 이어지는 일관공정의 공장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1973년 6월에 1만 6천평의 현대식 공장 소하리공장의 구축을 완료하였으며 한국에서 첫 번째로 되는 자동차 종합공장으로 연간 25,000대 생산능력을 갖추었다.

사업을 추진해가는 반면에 김철호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으며 공장건설하는 기간에도 많은 시간은 병석에 누워있어야 했다. 1973년 11월 22일에 김철호는 별세하였으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유언을 남겼다. 자동차 엔진기술을 배워 오라고 일본에 파견한 김선홍 차장은 8년 뒤에 기아차의 최고경영자인 회장으로 되었다.

기아산업은 1973년 8월에 적재량 0.5톤 픽업트럭을 출시하고 1974년 10월에 마쓰다 패밀리아(3세대)를 기반으로 세단 승용차 브리사(KIA Brisa)를 출시하였으며 1976년에는 아시아자동차공업, 기아기공 등의 회사들을 인수하였다.[1][2][3][4]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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