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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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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19일 (토) 22: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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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鄭周永, Chung Ju-yung)
현대그룹의 창업주
현대자동차㈜(Hyundai Motor Company)
기아자동차㈜(KIA Motors)

정주영(鄭周永, Chung Ju-yung)은 한국의 사업가이고 전직 정치인이다. 현대그룹의 창업주이며 삼성그룹이병철 창업주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기업인으로 인정받는다.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회장이고 범현대가 특유의 기업 문화 때문에 '왕회장'이라는 별칭도 따라다닌다.

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가지고 현대그룹이라는 거대 재벌을 일군 역사는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처절한 가난 속에서 한국이 이루어 낸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산업화의 상징처럼 기억되는 인물이며 대한민국 최고의 부호가 되었음에도 평생동안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 많은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기업인 중 하나였다.

1998년에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것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한 대북 사업의 선구자이며 2006년에 미국 타임스지가 평가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오른 인물이기고 하고 한국갤럽이 2019년에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리스트에서 기업인 신분으로는 최고 순위인 전체 6위에 오르기도 했다.

단순히 경제인을 넘어서 대한민국 건국 이후 대통령(들)을 제외한 다른 인물 중에서는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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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정주영은 1915년 11월 25일에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 2녀 자식중의 첫 째와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1930년에 통천 송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도와 농사도 지었으며 가난한 생활에서 탈피하고자 4번 가출을 하였으며 1933년에 했던 마지막 가출 때 인인천항만 공사장과 풍전엿공장(동양제과),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건물 공사장에서 막노동으로 지내다가 경성으로 상경하여 이듬해에 복흥상회(福興商會)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하였다. 3년 뒤인 1938년에 복흥상회를 인수하고 쌀가게 경일상회를 개업하였으며 1939년에 변중석 여사와 결혼하였다. 경일상회는 개업해서 2년이 되는 1940년에 중일전쟁의 연고로 일본점령군 정부에서 식량배급제를 실시하면서 폐업하였다.

1940년에 차량정비기사이자 지인인 이을학(李乙學)에게서 경영난에 처한 아도 서비스(Art Servic)의 소식을 접하고 이를 인수하여 자동차 수리공장으로 운영하였으며 1942년 5월에 중소기업정리령(中小企業整理令)이 실행되면서 기업이 정리되었다. 그 뒤 황해북도 연산군 동부에 있는 홀동광산(笏洞鑛山)의 광석을 평양 선교리까지 운반하는 일을 3년 하다가 타인에 넘겼으며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할 때 초동의 땅 200여 평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하고 1947년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고 건설업에 진출하였다. 1950년 1월에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하여 자본금 3,000만 원의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3월에 현대상운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나갔으며 전쟁기간과 전쟁직후에까지 그 당시 미군 통역장교이던 동생 전인영의 도움으로 미8군이 발주한 토목공사의 거의 전부를 맡아 부를 쌓았다.

6.25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사업에서 일을 맡아 1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와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제1한강교 복구공사와 인천제1도크 복구공사 등을 추진하였으며 1960년에 한국 건설업체중에서 도급한도액 1위를 차지하였다. 1964년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완공하고 1965년에 국내 최초로 해외 건설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를 건설하였으며 1967년에 다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어 현대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현대건설 내 시멘트공장을 확장하여 1970년 1월에 정식으로 현대시멘트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현대건설과 현대시멘트의 사주로 해외건설시장 확보와 낙찰 등을 이끌어 해외건설시장으로 진출하고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기업을 확장하였다.

1971년 1월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으며 1973년 12월에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중공업에 진출하였다. 1977년에 전국경제인연합회 13대 회장을 맡아 1987년까지 5선 연임을 하였으며 1987년에 재단법인 세종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특별초빙되고 그 해에 회장직에서 물러나 경영일선에서 손을 뗏다.

1992년 1월초에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가칭 통일국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김동길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을 창당, 조직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과의 수교를 대비하여 조직된 한·소 경제협회 회장에 피선되었고, 1992년 3월의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입후보,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에는 통일국민당의 원내진출을 이룬 뒤 그해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아쉽게도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밀려 3위로 되었다.

1993년 초 통일국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2월에는 국회의원직도 사직하고 탈당하였으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98년 6월 16일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같은 해 2차로 10월 27일 소 501마리를 가져갔다. 대북사업의 추진과 중계 사업을 위해 1999년 2월에 현대아산도 설립했다.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을 사퇴하였으며 2001년 1월에 병원에 입원한 뒤 2개월 뒤인 3월 21일에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인해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으며 5년뒤인 2006년 11월 타임(TIME)지가 선정하는 아시아의 영웅 리스트에 올랐으며 2008년에 DMZ 평화상 대상이 추서되었다.[1][2][3]

평가

□ 지혜

정주영은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없더라도 번뜩이는 재치를 앞세워 전문가보다 더 문제를 잘 해결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1983년 아산만 방조제 공사 당시 이른바 '정주영 공법'을 도입해 난공사를 마무리 지은 사례이다.

그 때 정주영은 유속이 너무 빨라 쌓아놓은 토사가 바닷물에 유실되는 상황을 보고 인천항에 정박해 있는 폐선박을 끌어와 물길을 아예 틀어막고 공사를 진행하자는 아이디어를 제출하였으며 많은 기술진들이 반대할 때도 "이거봐, 해보긴 해봤어?"라며 실제 폐선박을 가져와 난공사 구간에 인위로 가라앉혔고 물살을 막아 공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았을 당시 공기를 하루라도 앞당기기 위해 굳는 속도가 빠른 조강시멘트를 단양 공장에서 직접 공수해오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빠듯한 예산 속에서 실시됐기 때문에 시멘트가 얼마나 빨리 굳는가에 따라 비용이 크게 달라졌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항만공사'를 진행할 때도 현지에서 대형 구조물을 직접 건조하는 것이 비용이 많이 들어 울산에서 구조물을 건조한 뒤 바지선으로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까지 나르도록 지시하였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일감도 늘어났다.

6.25전쟁 당시 부산 UN군 묘지를 방문하러 미군 수뇌부가 현장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난 뒤에는 보리밭을 현금으로 매입해 당시 막 싹이 트던 보리를 현장에 옮겨심어 마치 푸른 잔디가 난 것처럼 보이게 해 미군의 신임을 얻은 적도 있다.

□ 직원관리

재계 1위인 현대그룹 총수임에도 불구하고 격식을 차리지 않고 직원들과 부대껴 어울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현대중공업이나 현대건설이 매년 실시하는 신입사원 연수회에 참가해 직원과 막걸리 파티를 여는 것을 잊지 않았고 직원 체육대회 때는 회장의 체면도 마다한 채 모자를 뒤로 눌러쓰고 씨름대회에 앞장서기도 했다.

□ 직원복지/사회 책임

울산에 대규모 공장을 지으면서 직원들이 살 수 있는 사택을 제공하는 데도 공을 들였고 또 유치원을 비롯해 중학교(2개), 고등학교(3개), 전문대학(1개), 종합대학(1개) 등을 지어 교육사업에도 큰 공을 세웠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은 지금도 근로자의 자녀들에게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비를 전액 지원하는 등 교육사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울산 유일의 대학병원인 울산대학병원을 비롯해 5성급 호텔인 현대호텔, 현대예술회관, 한마음회관, 미포복지회관, 문화회관 등의 여가시설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울산시민의 편의를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외에도 울산 동구주민이 시내로 수월하게 나갈 수 있도록 현대자동차 공장 인근에 ‘아산로’를 지어 울산시에 기부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에 북방외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으며 한국과 소련이 정식 수교를 맺기 직전 정주영은 소련을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예방하기도 했다. 국내 기업인중에서 남북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1989년에 그룹 핵심 수뇌부를 대거 이끌고 남한 경제인 가운데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고 1998년에는 소떼를 몰고 직접 북한을 찾아 전세계적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3]

사건

□ 1980년 현대양행(창원공장) 강탈사건 - 1979년 12월에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정부는 산업재정비 차원에서 기업 통폐합 작업을 추진하였으며 현대그룹과 대우그룹에게 서로 중복되는 사업 교환을 통한 통폐합을 요구했다. 그 결과로 현대는 대우자동차를 대우는 현대양행(창원공장)을 인수하기로 되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의 합작 파트너였던 미국의 GM이 현대로의 파트너 변경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자동차를 못 넘기는 대신 대우 본사 빌딩을 팔아서 창원중공업을 보상해줄 테니, '선 인수 후 청산'방식으로 계약을 진행하자고 하였으며 '조치를 이행하지 않으면 공수부대를 파견해서 현대를 내치겠다'는 무지막지한 협박을 보냈다. 유례 없는 특혜를 통해 1원도 내지 않고 창원중공업을 인수해간 대우는 이후 창원중공업의 경영 정상화에 실패하고 힘에 부쳐 결국 정부에 회사를 다시 내놓았으며 후에 한국전력과 산업은행이 한국중공업에 출자하여 한국중공업을 한전의 자회사로 만들어 국유화를 해버렸다. 이후 한국중공업은 두산그룹에 인수되며 오늘날 두산중공업으로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경제논리가 통하지 않던 시대에 신념과 소신으로 권력과 맞섰지만 결국 비이성적인 횡포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건이었다.[4][5][6]

□ 1977년 현대 아파트 특혜 분양사건 - 1974년에 용산구용산동에 현대맨션을 건설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현대는 1,512 가구를 건설하면서 952 가구를 현대의 무주택 사원에게 분양하는 조건으로 당국의 건설허가를 받았다. 실제 집행과정에 사원들에 분양된 분량은 291 가구 였으며 나머지는 전부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기업인, 언론인, 현대그룹 임원들의 친척과 동창들에 분양되었다. 1978년 4월에 이 사건이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주영은 당시 건축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과 벌금 500만 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으며 차남 정몽구가 아버지를 대신해 75일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한국 기업 역사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아들이 옥살이를 한 최초의 사례로 되었다. 현대 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은 정부가 부동산을 새로운 부의 분배방식으로 택한 상징적 사건이었다.[7]

□ 1991년 세무조사 -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1년 현대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는 대표적인 길들이기식 세무조사였다. 당시 경부고속철 사업에 반대하는 등 미운털이 박혔던 정주영 회장이 대선에 나설 것이라고 알려지면서 현대그룹을 길들이기 위한 전방위적인 세무조사가 실시됐다. 당시 추징된 세금만 1360억원을 넘었다.[8]

□ 1993년 세무조사 -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현대는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시달렸으며 이를 놓고 정주영이 1년 전 대선에 출마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대선 당시 김영삼은 정 회장에게 "권력과 돈을 다 갖겠다는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했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응징으로 행동화했다. 정주영도 1년간 정치인 생활을 했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 창당과 총선, 대선을 겪으며 돈도 많이 쓴 데다 결과도 나빴기 때문이다.[9][3]

□ 1998년 대북지원 행보 - 정주영은 1998년 6월에 서산 농장에서 기르던 소 500마리를 데리고 북한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0월까지 총 1001마리의 소를 북한에 기증했으며 소를 싣고 갔던 트럭과 관계자들이 타고 갔던 미니버스 등도 모두 새차로 준비한 뒤 북한에 남기고 왔다.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만났다. 남북이 갈라진 뒤 한의 민간인에게 금강산이 개방된 것은 당시가 최초였는데 현대그룹은 '금강호'와 '설봉호'등 초호화 유람선 2척으로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했다.[3]

□ 2000년 200억 원 수준의 퇴직금 - 정주영은 2000년 현대그룹 24개 계열사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는 대가로 200억 원 수준의 퇴직금을 수령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당시 현대그룹이 정부에서 융자받은 돈만 5천억 원에 이를 만큼 경영상태가 나쁜데 그룹 총수가 막대한 금액을 퇴직금으로 받아가는 것이 과연 옳으냐를 놓고 설왕설래가 일었다. 이를 놓고 당시 야당은 현대그룹과 여당이 벌이고 있는 대북사업과 관련해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이 아니냐며 정주영을 비판하기도 했다.[3]

각주

  1. 아산 정주영〉, 《 아산나눔재단》
  2. 정주영〉, 《위키백과》
  3. 3.0 3.1 3.2 3.3 3.4 서정훈 기자, 〈(Who Is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비즈니스포스트》, 2015-12-22
  4. (20+) 정주영 - Posts〉, 《Facebook》, 2013-05-19
  5. 김화진, 〈현대양행 파란의 역사〉, 《더벨》, 2019-11-22
  6. 프리덤월드, 〈우리나라 중공업을 이끌어온 불굴의 개척자 - 운곡 정인영 회장〉, 《네이버 블로그》, 2013-04-30
  7. 여름가을, 〈한국 재벌 흑역사(상)현대〉, 《네이버 블로그》, 2021-02-06
  8. 이상원 기자, 〈`권력의 검은 칼` 세무조사〉, 《사이트》, 2016-12-21
  9. 성혜미 기자, 〈역대 ‘정경유착’ 역사④-김영삼 정권〉, 《주간현대》, 2015-10-08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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