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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포르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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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7월 5일 (월) 00: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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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포르쉐(Porsche)
폭스바겐(Volkswagen)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는 공학 박사이며 독일의 고급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알려진 포르쉐(Porsche)와 국민차로 알려진 폭스바겐의 창업자이며 독일의 국민차였던 비틀의 디자이너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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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875년 9월 3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이고 현재 체코의 일부인 보헤미아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판금 기술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대한 대단한 재능을 보였고 10대에 공업대학에 들어갔다. 18살 때 비엔나의 벨라 에거(Bela Egger) 전기회사에 취직한 그는 일이 끝난 후에는 지역 공과대학에서 몰래 강의를 들었다. 전기회사에서 5년간 근무하는 동안 전기모터를 개발하는 등 엔지니어로서 그의 열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했다. 23살이 되던 해 그는 다른 국가의 황실이나 왕실의 VIP들에게 마차를 맞춤 제작하는 회사인 야콥 로너(Jakob-Lohner)의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동차 시대의 도래를 예감한 이 회사는 마차 대신 자동차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첫선을 보인 차가 로너-포르쉐(ohner-Porsche)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개발 작업을 주도한 이는 바로 포르쉐였다. 이 차는 엄청난 무게의 전기모터 2개를 장착했다. 각자 앞쪽과 뒤쪽 바퀴에 동력을 전달하는 형태로 휘발유 엔진과 전기모터를 조합한 최초의 하이브리드 차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돼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02년 군대에서 운전 요원으로 복무한 그는 1906년 오스트로-다임러(Austro-Daimler)에 디자인 책임자로 부임했다. 포르쉐는 이곳에서 85마력의 프린츠 하인리히(Prinz Heinrich)를 제작했다. 오스트리안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동생 헨리 왕자가 이 차를 개발해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임러 입사 10여 년 만에 그는 임원으로 승진했고 1916년 강의를 훔쳐들어야 했던 비엔나공과대학교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고 1924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명예박사 학위 및 명예 교수직을 받으며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931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에 스포츠카와 경주용 자동차를 전문 제작하는 포르쉐 엔지니어링 오피스(Porsche Engineering Office)를 설립했다. 아들인 페리 포르쉐와 사위, 옛 동료들과 힘을 합쳐 회사를 설립한 포르쉐는 초기에는 중형차 위주로 제작을 하다 사세를 확장하면서 다른 자동차 메이커의 콘셉트카를 외주 받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경주차에도 관심이 많았던 포르쉐는 1934년 실버 애로우(Silver Arrow)로 불렸던 P-바겐(P-Wagen)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다 일생일대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바로 전쟁광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의 인연이다. 1933년 독일의 수상이 된 그는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우선 경제부흥을 위해 자동차 산업의 성장이 우선돼야 했고 같은 맥락에서 고속도로의 건설도 필요했다. 히틀러가 생각한 경제부흥책은 국민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해 산업 경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소형차에 관심이 많았던 포르쉐에 주목했고 이듬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히틀러는 포르쉐와 마주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다. 어른 2명과 아이 2~3명이 충분히 탈 수 있어야 하며 7L의 연료로 100㎞를 갈 수 있을 것, 또 값은 1,000마르크 이하일 것 등이다. 그러면서 이 차의 개발에 필요한 공학 연구소를 만들어주고 연구비 등도 전부 지원해 주기로 했다. 포르쉐가 우려했던 가격 문제는 국민들이 우표 900마르크 어치를 구입하면 차 한 대를 준다는 방식으로 국민차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공개된 프로토타입은 수평대향 4기통 1.1L 엔진에 최고 속도 98㎞/h, 최대출력 26.5마력의 성능을 지녔다. 간단한 구조와 우수한 내구성이 장점이었다. 특히 후면에 위치한 엔진과 후륜구동의 RR방식은 나중에 포르쉐가 설계한 차들의 시초가 됐다. 디자인에 불만을 가졌던 히틀러는 70일간의 성능 테스트 결과를 보고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이 차의 이름을 KdF(Kraft durch Freude)라고 불렀는데 기쁨의 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포르쉐는 히틀러와 달리 이 차의 이름을 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DLS 폭스바겐(Volkswagen)으로 불렀다. 독일의 소형차 생산을 예의주시하던 미국에서는 이때부터 이 차의 외관에서 모티브를 얻어 비틀(Beetle, 딱정벌레)로 부르기 시작했다. 비틀은 지금까지 2,100만 대 이상 판매하여 역대 3번째로 가장 많이 팔리는 역사적인 모델이 됐다. 천재적인 디자이너에 의해 탄생한 소형차 비틀은 뛰어난 성능과 내구성, 앙증맞은 디자인,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국민차 비틀의 판매로 거둬들인 돈은 고스란히 전쟁 준비에 쓰였다. 전쟁 중에 폭스바겐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바뀌었고 비틀은 생산이 중단됐으며 그동안 만들어 두었던 KdF는 전쟁에 이용됐다. 히틀러는 비틀의 주문과 함께 포르쉐에 군용 탱크의 개발도 주문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포르쉐의 공장은 군용차 생산공장으로 변했다.

포르쉐 박사는 1934년 히틀러와 괴벨스의 주도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고 1937년에는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통칭 나치당과 히틀러 친위대인 SS에 가입합니다. 1942년에는 SS 상급 지도자 직위를 수여받아 독일군의 군사 차량 개발 및 생산을 책임지게 됩니다. 그는 설계 노하우를 활용해 차량 외에도 전차 개발에 참여했는데 2차대전 독일군을 상징하는 티거 전차와 티거II 전차의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려던 나치 독일의 야망은 2차대전의 패배와 함께 무너졌고 독일은 소련과 연합군에 의해 동서로 분단되는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포르쉐 박사는 전후 복구를 위해 프랑스와 영국에서 밀려드는 자동차 주문과 설계 외주 의뢰를 받으며 지냈으나 1945년 12월 자국 독일이 패전국이 되자 차와 탱크를 군수물자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 머물던 포르쉐는 전범으로 체포됐다. 아들 페리 포르쉐는 잡혔다 바로 풀려났으나 포르쉐는 20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포르쉐 기업은 아들 페리가 이끌었다. 자유의 몸으로 1949년 독일로 돌아온 포르쉐는 아들과 함께 포르쉐 재건에 나섰다. 포르쉐 이름을 최초로 사용한 포르쉐 356이 공개된 것도 이 때다. 수작업으로 49대만 제작된 포르쉐 356은 이후 17년간 7만 8,000대가 생산됐으며 포르쉐 재기의 밑거름이 됐다. 1950년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1951년 1월 30일 75세를 일기로 슈투트가르트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인 1996년 그는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1999년에는 금세기 자동차 엔지니어 상을 받았다.[2] [3]

주요 활동

폭스바겐 비틀(1세대)

폭스바겐 비틀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중산층이 붕괴된 상태였고 미국인의 30% 이상이 자가용 승용차를 보유한 것과 대조적인 2%에 불과했다. 이에 히틀러는 독일 중산층 회복을 위한 KdF(Kraft durch Freude, 행복을 통해 얻는 힘)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KdF 프로그램은 2~3명의 자녀를 둔 독일인 가정을 위한 복지의 일환으로 국민차를 타고 주말에 휴양지의 리조트를 방문하고 유람선을 타고 여가를 즐기며 모든 가정에는 국민 라디오를 보급해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이상적인 중산층의 삶을 만드는 것이 골자였다.

히틀러는 국민차의 조건을 몇 가지 제시했는데 5인 가족이 타고 100km/h 이상으로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실내공간과 강력한 엔진을 탑재해야 하고, 연비는 14.3km/L 이상이어야 하며, 모든 부품은 쉽고 저렴하게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하며 차고가 거의 없는 독일의 주거 환경 상 냉각수 동파를 막기 위해 공랭식 엔진을 탑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차량 가격은 1,000마르크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무엇 하나 달성하기 쉬운 것이 없는 조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포르쉐 박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작고 실용적인 대중차를 연구 중이었습니다. 그는 췬다프 사를 위해 개발한 타입 12, NSU 타입 32 등의 프로토타입을 거치며 국민차 프로젝트를 구체화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작은 차체를 유지하면서도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타트라의 설계를 참고해 차체 뒤편에 엔진을 탑재했습니다. 공랭식 엔진은 특이하게도 수평대향 4기통 레이아웃을 채택했는데 덕분에 엔진 높이가 낮아져 스윙 액슬 방식의 서스펜션을 채택할 수 있었다.

1938년 마침내 타입 1의 시제품이 완성됐고 히틀러는 이 차에 KdF-바겐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생애 처음으로 자가용 차를 구입할 기대에 부푼 독일인들은 앞다퉈 자동차 적금에 가입했고 타입 1은 독일 최초의 국민차로 등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국민들이 모은 자동차 적금은 고스란히 군용차 제작에 쓰였다. 사실 히틀러가 지시했던 국민차 개발은 전쟁 시 신뢰성 높고 우수한 성능을 갖춘 군용차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타입 1의 설계를 바탕으로 군용으로 전용된 퀴벨 바겐과 쉬빔바겐이 생산됐고 이들은 나치 독일군의 주력 전술차량으로 사용되었다. 타입 1이 승용차로 생산되기 시작한 건 2차대전이 끝난 뒤의 일이다. 1945년 영국군이 2만 대의 타입 1을 주문한 것을 계기로 볼프스부르크 공장의 생산이 재개됐고 이후 독일 내수와 유럽에서 주문이 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타입 1은 이미 10년 가까이 된 설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시트로엥 2CV, 영국의 모리스 마이너같은 대중차보다 뛰어난 가성비를 자랑했고 귀여운 디자인과 높은 신뢰성, 경제성에 힘입어 미국 시장에도 진출해 큰 인기를 끌었다. 공식적으로 타입 1이 단종된 것은 출시로부터 무려 65년이 지난 2003년이며 긴 세월 동안 무려 2,100만 대 넘게 생산되면서 타입 1은 아직까지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생산된 단일 모델로 기록된다. 이후 비틀은 그 독특한 디자인을 계승한 뉴비틀, 그리고 더 비틀 등의 후속 모델로 이어졌다.[4]

로너 포르쉐 믹스테 하이브리드

로너-포르쉐 믹스테 하이브리드

전기회사에서 세계 최초의 허브 모터를 개발한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898년 빈의 코치빌더 로너(Lohner)로 자리를 옮겼다. 로너는 당시 납축전지를 탑재한 전기차를 개발 중이었는데 배터리 성능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포르쉐는 이를 보고 대량의 배터리를 탑재하는 대신 전기를 계속 충전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고안했고 이것이 바로 1901년 출시된 로너-포르쉐 믹스테 하이브리드이다. 이 차는 무겁고 충전량이 적은 배터리 대신 다임러 제 내연기관 엔진을 탑재했고 여기에 발전기를 연결해 전기차와 달리 기름만 넣으면 계속 전기를 충전해 달릴 수 있었다. 최고 속도는 당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빠른 56km/h에 달해 성능도 우수했다. 또 허브 모터 방식을 채택해 바퀴마다 모터가 탑재됐으므로 용도에 따라 2륜 구동은 물론 4륜 구동도 간편하게 탑재할 수 있는 매우 진보적인 설계를 갖춘 차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세계 최초의 가솔린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기록되며 1906년까지 약 300여 대가 팔렸다.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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