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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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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20일 (수) 21:55 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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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위치
시칠리아주 위치

시칠리아주(이탈리아어: Sicilia, 문화어: 씨찔리아, 영어: Sicily 시실리)는 이탈리아의 자치주이자 지중해 최대의 이다. [1]

개요

시칠리아주의 면적은 25,711㎢로 한국의 약 4분의 1 정도이며 인구는 5,030,000(2022)명 이다. 북서쪽에는 사르데냐, 북동쪽에는 이탈리아 본토의 칼라브리아 반도, 남서쪽에는 아프리카 대륙튀니지, 남동쪽에는 몰타 영토인 몰타섬이 있다. 지중해 최대의 섬인 시칠리아섬과 주변의 에가디·펠라지에·판텔레리아·리파리 등의 섬들로 구성되였다.

흰 대리석'이라는 뜻의 시칠리아는 역사적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예로부터 그리스·로마·페니키아·아랍 등 '외세'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려왔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의 공화제 이행(移行)에 따라 자치주가 되었다. 트라파니·팔레르모·메시나·칼타니세타·엔나·아그리젠토·라구사·시라쿠사·카타니아의 9개 현이 있고, 주도(州都)는 팔레르모이다

이탈리아 본토로부터 불과 3.2㎞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다리를 건설할 법 하지만 추진은 지지부진하다. 건설 비용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해당 지역에 지진활동이 빈번해 어려움이 많다.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꼽혀 역사적으로 지배세력이 숱하게 바뀌어온 지역이다. 덕분에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시칠리아만의 특색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시칠리아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인 에트나 화산이 있다. 에트나 화산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한때 엄청난 유황을 생산하며 이를 노린 영국이 전쟁을 일으킨 적도 있다.

고대부터 지중해 세계를 먹여살려온 밀은 물론, 속이 빨간 블러드오렌지(Blood Orange), 피스타치오, 레몬, 올리브, 토마토, 아몬드, 포도 등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웬만한 식재료는 모두 잘 난다. 덕분에 시칠리아 요리가 이탈리아 요리의 뿌리이자 정수로 꼽힌다. 관광지휴양지로 유명하다.

남쪽에는 몰타섬이 있으며, 시칠리아 제2의 도시 카타니아(Catania)에서 배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몰타와 함께 난민들이 리비아나 튀니지 등지에서 배를 타고 오는 관문으로 알려져 있다.[2][3]

자연환경

시칠리아는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칼라브리아 반도에 인접해 있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삼각형 모양의 모습을 따서 트리나크리아(라틴어 Trinacria)로 불렸다. 북쪽 해안과 남서쪽 해안의 직선 길이는 각각 280km이고 동쪽 해안의 길이가 180km인 이등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시칠리아의 가장 큰 강은 살소강으로 시칠리아 중앙을 가로질러 에나와 칼라니세타의 인근을 지나 남부의 항구 리카타 인근에서 지중해와 만난다. 이 외에도 시칠리아 동부의 메시나를 지나는 알칸타라 강과 서부의 벨리스 강과 플라타니 강 등이 있다.

시칠리아와 인근의 부속 도서는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화산섬이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트나 산으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이다. 시칠리아 북동부의 메시나 인근에 있으며 높이는 3,320m에 달한다. 메시나 북부의 스트롱보리 화산도 활화산이다. 인근 부속 도서인 에올리에 제도에도 활화산과 온천이 있다. 시칠리아의 지형은 산과 언덕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시칠리아에서는 집약적인 농경이 이루어진다. 화산 지형 덕분에 땅까지 비옥한 시칠리아는 농사가 매우 잘 되어 시칠리아의 농산물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편이다.

아열대성에 가까운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평균기온은 18℃, 강우량은 970mm 정도이다. 시칠리아에 부는 '시로코(Sirocco)'라는 바람은 고온다습한 것이 특징이며 아프리카에서 불어온다.

역사

문화적인 면에서도 엄청난 역사를 자랑한다. 청동기 시대에 시크리인, 시카니인, 엘리미인이 거주, 주석(錫)무역의 중계지로 그리스의 미케네 문화와도 접촉하며 고유의 문명을 지녔다. 심지어 에트루리아나 로마 제국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시칠리아인들은 자부심이 강하다.

고대

B.C. 8세기에 그리스인이 도래한 뒤, 카르타고인의 모튜에 건설에 따라 그리스화한다. 낙소스, 쉬라쿠사이(현재 시라쿠사:Siracusa), 게라(현재 제라:Gela), 메가라 히부라이아 등 그리스 식민도시의 건설에 따라 선주 민족은 내륙으로 밀리고 해안 지역은 완전히 그리스화했다.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군을 마그나 그라키아(Magna Graecia)라 부른다.

B.C. 6세기부터는 세리누스(현재 세리눈테:Selinunte), 아크라가스(현재 아그리젠토:Agrigento), 세게스타(현재 세제스타:Segesta) 등이 건설되어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일부로 됐다. 미술도 그리스 본토와 이오니아 지방과는 달리 부드러운 요소를 지니게 되어 B.C. 4세기 후반 이후 첸투리베 등에서 독특한 도기도 만들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B.C. 241),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B.C. 202)을 거쳐 고대 로마의 속주가 되어 이후 로마의 곡창으로 번영했다. 고대 말기에는 피아차 알메리나메(Piazza Armerina)에 대규모 모자이크 장식의 별장 등이 건설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이쪽으로 진출하자 공화정 로마에 구원을 청하여 그 이후로 길고 길게 이어진 포에니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포에니 전쟁 이후로 로마 세력권에 들어왔으며, 대규모 농장이 건설되어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었다. 로마로 밀 운송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시켈리아로 불렸고, 시라쿠사, 메사나 등의 폴리스가 있었다.

중세

로마가 동서로 갈라지고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는 동고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제국군이 반달 왕국을 멸망시킨 데에 이어 이탈리아까지 병탄하면서 다시 로마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도 사산조와의 전쟁, 페스트, 그리고 갑자기 출현한 이슬람 제국의 발흥으로 쇠퇴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차차 물러나게 되는데 시칠리아도 잃게 되어 이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과 이탈리아의 기독교 세력 사이에서 수시로 점령 세력이 바뀌는 혼란스러운 역사를 겪게 되었다.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9세기에 걸쳐 시칠리아에는 아글라브 왕조에 의한 시칠리아 토후국이란 이슬람 국가가 세워졌고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중흥기를 맞은 동로마 제국이 11세기 초에 시칠리아를 다시 정복하려 하였는데, 이때 북방에서 니타난 신흥 세력이 바로 노르만 족. 로베르 기스카르와 루지에로 1세의 지휘아래, 이들은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서 패권을 놓고 싸우던 동로마, 이슬람, 독일, 교황 세력 모두를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 ~ 시칠리아에 노르만계 왕조인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노르만 인들은 교황과 동맹하였기에 시칠리아 역시 기존의 동방 정교나 이슬람 대신 가톨릭이 주요 종교가 되었다. 시칠리아 왕위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우 로제 드 오트빌이 이어받았다.

이후 시칠리아 왕국은 남 이탈리아를 정복해 세력을 넓혀 근대까지 왕국이 존속하게 되었다. 이른바 양 시칠리아 왕국. 중세왕국의 특징에 따라 단일혈통 왕국이 아닌 결혼과 상속을 통해 계속해서 바뀌게 되었다. 왕국을 성립시키고 발전시킨건 노르만계(오트빌 왕조)지만 이후 이 계통이 단절되면서 사위인 호엔슈타우펜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이 물려받았다.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2세의 치세 동안 시칠리아에서는 “길게 기른 수염에 옷자락을 휘날리는 바그다드 출신의 천문학자들과 아랍어 저술을 번역하며 후한 급료를 받는 유대인들, 사라센의 무용수와 무희들, 축제 때면 은나팔을 불던 무어인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자신과 그의 아들 만프레디는 열렬한 아랍 문화 애호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이슬람 철학과 학문에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많은 중상을 받았다. 비난에 아랑곳 않던 이들의 후원 하에 아랍의 학문은 이탈리아의 여러 대학들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체를 원했던 호엔슈타우펜 왕가는 결국 교황과 반목하게 되었고 교황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원했던 프랑스와 결탁해 당시 카페 왕조의 왕인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백 샤를을 초빙해 호엔슈타우펜 왕가를 물리치고 시칠리아 왕으로 삼았다. 앙주백 샤를 카를루 1세를 칭한 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한 원정과 원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시칠리아에 물렸고 이는 많은 반감을 사게 되어, 결국 시칠리아의 만종(1282)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앙주 일가는 시칠리아에서 쫒겨났고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마지막 왕인 만프레드의 사위인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 반란군의 환영을 받고 시칠리아 왕이 되었다. 이에 반대한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시칠리아에 성무금지 조치를 내리고, 페드로 3세를 파문했다.

페드로 3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하이메 2세(1285~1295)는 발렌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아라곤 왕국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렸다. 1297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사르데냐-코르시카 왕국을 아라곤 연합 왕국에 추가시켰으나, 이는 1세기도 가지못했다. 프랑스와 또 다시 전쟁을 벌여 이번에는 승리해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프랑스, 나폴리, 교황은 서로 동맹을 맺고 아라곤 왕 페드로 3세(Pedro III)를 파문한 뒤 맞서 싸웠지만 아라곤 왕국의 군대는 그들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위엄을 떨쳤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카탈루냐 용병들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까지 진출해 아테네 공국(1311)과 네오파트라이 공국(1318)을 접수했다. 한때는 몰타와 사르데냐 섬도 잠깐이나마 지배했고 1442년에는 앙주 가문을 몰아내고 남부 이탈리아를 모조리 관할하는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까지 차지하면서 거대한 지중해 제국을 건설했다. 오늘날 스페인 국왕의 기나긴 공식 타이틀에 아테네 및 네오파트리아의 공작이 들어 있는데 이 때로부터의 흔적으로서, 당시의 아라곤 왕국이 현대 스페인으로 국가승계되면서 타이틀까지 덩달아 승계된 것이다. 물론 무려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에 대한 영유권을 오늘날 진지하게 주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동로마 통치 시대인 827년에서 아랍 통치 시대의 요소는 다음 노르만 왕조 시대(1071~1266)의 미술에 계승되어 팔레르모의 궁정예배당(카펠라 팔라티나:Cappella Palatina), 몬레알레 대성당(Cattedrale di Monreale), 체팔루 대성당(Chiesa di Cefalù)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미술에는 동로마적 요소와 함께 이슬람 파티마 조의 미술 전통이 존속되었다. 견직물은 아랍인에 의해 시칠리아에서 제조가 시작되고 다시 유럽으로 퍼져갔다. 남이탈리아와 함께 상아 세공이 발달하여 일군의 채화장식으로 된 상아상자는 12~13세기의 시칠리아 제로 되어 있다. 13세기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는 동서문화의 융합을 꾀하여 시칠리아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시대로 문화적으로 활발하였으나 섬 내에서 당시의 미술 유물은 적다.

1442년부터 다시 나폴리 왕국과 함께 동일한 스페인 왕의 관할 하에 있게 되어 남 이탈리아와 문화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게 된다. 15세기에 활약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는 시칠리아가 탄생시킨 가장 유명한 화가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은 스페인의 영향이 강하고 바로크 도시로서의 노토(Noto)는 당시의 양상을 가장 잘 전해주고 있다. 시칠리아의 미술은 지중해 중심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항상 외래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근현대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전투의 당초 목적은 한참 소련과 혈전을 벌이고 있던 독일에게 이른바 '제2 전선'을 강요함으로써 독일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소련의 부담을 덜기 위한 전투였다. 연합군은 독일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시칠리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도 상륙하게 됨으로써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게 된다.

산업

농업과 관광업을 제외한 나머지 산업의 발달이 미약하기 때문에 이탈리아 내에서는 경제적으로는 낙후된 곳이다. 2018년 기준 1인당 GDP 17,800유로로, 39,700유로나 되는 롬바르디아의 절반, 한국의 2/3일 정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정부에서 실시한 남부 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에 대규모 석유 화학단지와 공업단지가 개발되면서 정유업과 석유 화학공업이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유황과 천연가스가 많이 생산되며, 식품 가공업·섬유업·조선업 등이 발달되었다.

카타니아 평야와 몇몇 해안 평야를 중심으로 밀·옥수수·감귤류·아몬드·포도·면화 등이 생산되며, 양·당나귀 등이 방목된다.

문화

시네마 천국, 말레나 등을 연출한 이탈리아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 속 배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상 시칠리아 올로케이션. <말레나>에서 모니카 벨루치가 걸어가던 광장은 시라쿠사의 광장이고, <시네마 천국>의 마을은 팔레르모 남쪽의 작은 시골마을 서너군데에서 촬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팔레르모에서 근교 투어를 알아볼 때 여러 마을들이 서로 시네마 천국의 배경이라고 홍보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시칠리아에서는 이탈리아어 외에도 시칠리아어라는 독자적인 언어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는 시칠리아 아랍어라는 아랍어 방언이 쓰인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소멸되었다.

건축

1693년의 대지진으로 시칠리아의 동쪽의 도시마을들이 파괴되자 당대의 유명 건축가들이 새로운 도시계획안을 들고 시칠리아를 재건하는데, 이를 "시칠리아 바로크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카타니아(Catania), 라구사(Ragusa), 노토(Noto), 모디카(Modica), 시클리(Scicli), 칼타지로네(Caltagirone) 등의 도시/마을들이 그 영향을 받아 재건되었고 그 특유의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하며 웅장한 건축양식으로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다. 이 바로크 타운들은 대부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피아

현대에는 마피아 코사 노스트라의 본거지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외국인이 관광가서 마피아와 마주치거나 범죄에 휘말릴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 이미 시칠리아에서 마피아는 합법적인 지위(혹은 그렇게 보이는 지위)에서 각종 행정과 이권 사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대놓고 강력범죄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 공권력을 집어삼켰으니 관광객 주머니 털기 같은 좀도둑질을 할 필요가 없는 셈. 정부보다 마피아를 더 믿는 경우도 있다지만, 팔레르모 공항은 마피아와 맞서 싸운 법조인 둘을 기리기 위해 개칭된 것을 보면 무조건 마피아를 두둔하는 분위기는 아닌 셈이다. 시칠리아 출신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서 역시 마피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한때 굉장히 문제가 심각했으나 현재는 정부에서 단속에 나서면서 다소 잠잠한 편이다.

분리주의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지방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주세페 가리발디와 그가 이끄는 붉은 셔츠단에 의해 통일 이탈리아에 편입되었다. 이탈리아 본토와는 이질적인 지역이라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이탈리아 중앙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아서 다시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시칠리아〉, 《위키백과》
  2. 시칠리아주〉, 《네이버 지식백과》
  3. 시칠리아〉, 《나무위키》

참고자료

같이 보기

서유럽 같이 보기

서유럽 국가
서유럽 도시
서유럽 지리
지중해
서유럽 문화
서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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