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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트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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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트후크
빈트후크 위치

빈트후크(아프리칸스어: Windhoek, 독일어: Windhuk, 문화어: 윈드후크)는 나미비아수도이자 최대도시이다. 인구는 43만 명이며 나미비아 전역에서 유입되면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네덜란드어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라는 뜻이다.[1]

개요

빈트후크는 나미비아의 중부, 고원 지대에 위치하며 해발은 약 1780m이다. 빈트후크는 이 나라의 사회, 경제,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거의 모든 나미비아 국가 기업, 정부 기관, 교육 및 문화 기관이 본부를 두고 있다. 월비스베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칼라하리 사막 방면 등에 이르는 철도가 부설되어 있다. 나미비아의 상업, 공업의 중심지로 주민의 대부분은 반투족 계열의 민족이 살고 일부 6%를 차지하는 독일계 주민도 있다. 도시는 작고 주위가 사막에 둘러싸여 있어 강수량은 적다. 예전에는 호텐토트의 중심적 취락이었으나, 1870년 그리스도교 전도의 기지가 된 이래 1890년 도시 건설이 시작되었고, 1892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수도가 되었다. 1897년에는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 스바코프문트와의 사이에 철도건설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군에 점령되었고, 전후 위임통치령의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카라쿨 양의 모피거래 중심지를 이루며 상공업도 발달하였다. 국제선 전용인 호세아 쿠타코 국제공항과 국내선 전용인 에로스 공항이 있다. 독일의 지배 당시에 지어졌던 건축물들이 다수 남아 있으며 언덕 위에는 독일 중세풍의 성이 있고, 아름다운 공원을 비롯하여 도서관, 미술관, 공회당, 국영병원, 공영운동장 등이 있다.[2]

지리 및 기후

빈트후크 도시 지역을 확장하는 것은 재정적인 제약과는 별개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남부, 동부, 서부 방향의 빈트후크는 바위투성이의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어 토지 개발 비용이 많이 든다. 남쪽은 지하 대수층이 존재하기 때문에 산업 발전에 적합하지 않다. 이로 인해 마을 북쪽의 광활한 브라크워터 지역은 빈트후크의 확장을 위한 유일한 실현 가능한 장소가 되었다. 빈트후크 시의회는 도시 면적이 5,133.4km²에 이를 정도로 도시의 경계를 극적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빈트후크는 1년에 300일 이상 맑은 날이 있다. 연평균 기온이 18°C 이상이기 때문에 쾨펜 기후 분류에 따라 고온 반건조 기후(BSH)를 경험한다. 일년 내내 기온은 고도에 영향을 받아 온화한 기온이라고 할 수 있다. 연평균 고온 및 저온 범위는 13.4°C이다. 가장 추운 달은 7월로 평균 기온은 13.1°C이고, 가장 더운 달은 12월로 평균 기온은 23.5°C이다. 칼라하리 사막 근처의 위치 때문에, 그 도시는 3,605시간의 햇빛을 받는다. 강수량은 여름에는 많고 겨울에는 적다. 연평균 강수량은 367.4mm이며, 2018/19 장마철에는 최저 106.7mm, 1929/30년에는 97mm이다.[3]

역사

1840년 존커 아프리카너(Jonker Afrikaner)는 빈트후크에 오르람(Orlam) 정착촌을 세웠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오늘날 클라인 빈트후크 교외에 위치한 주요 온천 중 한 곳 근처에 머물렀다. 그는 5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석조 교회를 지었다. 그것은 또한 학교로도 사용되었다. 두 명의 라인강 선교사인 칼 휴고 한(Carl Hugo Hahn)과 프란츠 하인리히 클라인슈미트(Franz Heinrich Kleinschmidt)가 1842년 후반에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2년 후 그들은 두 명의 감리교 웨슬리교 신자인 리차드 해디(Richard Haddy)와 조셉 틴달(Joseph Tindall)에 의해 쫓겨났다. 정원이 조성되었고 한동안 빈트후크는 번영했다. 나마(Nama) 부족 과 헤레로(Herero) 부족 사이의 일련의 전쟁으로 결국 정착지는 파괴되었다. 오랜 공백 끝에 칼 휴고 한은 1873년 다시 빈트후크를 방문했는데, 그 마을에 이전의 번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실망했다. 1885년 6월, 스위스의 한 식물학자는 방치된 과일나무들 사이에서 자칼과 굶주린 기니새만 발견했다.

뤼데리츠부흐트(Lüderitzbucht) 상인들의 요청으로 1884년 독일 남서아프리카( Deutsch-Südwestafrika), 현재 나미비아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한 독일 보호령이 선언되었다. 독일 식민지의 국경은 1890년에 결정되었고 독일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쿠르트 폰 프랑수아(Curt von François) 소령 휘하의 슈츠트루페라(Schutztruppe)는 보호 부대를 파견했다. 폰 프랑수아는 전쟁 중인 나마족과 헤레로족 사이의 완충지로서 전략적으로 위치한 빈트후크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12개의 강한 샘은 농작물과 곡물을 재배하는 데 물을 제공했다.

콜로니얼 빈트후크(Colonial Windhoek)는 1890년 10월 18일 폰 프랑수아(von Francia)가 현재 알테 페스테(Alte Feste, 옛 요새)로 알려진 요새의 초석을 수리하면서 설립되었다. 1907년 이후, 원주민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시골에서 성장하는 마을로 이주하면서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독일과 남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유럽 정착민들이 도착했다. 사업체들은 카이저 거리(Kaiser Street)와 도시를 가로지르는 주요 산 능선을 따라 세워졌다. 이때 빈트후크의 세 성, 하이니츠부르크(Heinitzburg), 잔더부르크(Sanderburg), 슈베린스부르크(Schwerinsburg)가 건설되었다.

독일의 식민지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끝났지만 남서아프리카와 빈트후크는 1915년에 이미 함락된 상태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도시는 남아프리카 군사 정부에 의해 관리되었고, 더 이상의 개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1920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그 지역은 국제연맹의 C등급 위임 아래 놓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의해 다시 관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지역의 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55년 이후, 새로운 학교와 병원의 건설, 도시의 도로 타르 공사, 급수를 안정시키기 위한 댐과 파이프라인 건설 등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가 수행되었다. 도시는 1958년에 세계 최초의 음용 재사용 공장을 도입하여 재활용 오수를 처리하여 마을의 상수로 직접 보냈다. 1966년 10월 1일 당시 남서아프리카 행정관은 빈트후크에게 문장을 부여했고, 이 문장은 1970년 10월 2일 남아프리카 문장국에 등록되었다. 처음에는 양식화된 알로에가 주요 상징이었지만 1972년 9월 15일 천연 알로에로 수정되었다. 문장은 "섬에 세 개의 꽃이 총상꽃차례 로 달린 빈트후크 알로에"로 설명되어 있다.

빈트후크는 1965년 10월 18일 폰 프랑수아(von François)가 두 번째 도시 설립 75주년을 기념하여 공식적으로 도시 특권을 받았다.

1971년 나미비아 일반 계약직 노동자들은 계약 노동 제도를 폐지하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며 나미비아의 독립을 촉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빈트후크에서 출발했다.

1990년 독립 이후 빈트후크는 국가 수도이자 중부 호마스 지역의 지방 수도로 남아있다. 독립과 전쟁이 끝난 이후, 도시는 성장과 발전을 가속화했다.[4]

나미비아

나미비아(영어: Namibia)또는 차드 공화국(영어: Republic of Namibia)은 남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이며 수도는 빈트후크이다. 북쪽에 앙골라잠비아, 동쪽에 보츠와나짐바브웨, 남쪽과 동쪽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접경하고 있다. 독립 전쟁 후 1990년 3월 21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나미비아는 유엔(UN), 남아프리카 개발 공동체(SADC), 아프리카 연합(AU), 영국 연방과 많은 다른 국제 기구들의 회원국이다. 많은 해 동안 나미비아는 남서아프리카로서만 알려졌지만, 나미브 사막의 이름을 따서 나미비아를 채택했다. 몽골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적은 나라이다. 나미비아의 건조한 땅은 부시먼족, 다마라족, 나마콰족이 초기 시절부터 거주했으며, 반투족 확장과 함께 왔던 이민 온 반투족이 대략 14세기부터 살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동안 영국과 네덜란드 선교사들이 방문했지만 1884년 독일령 보호국이 되었다. 1920년 국제 연맹은 그들의 법과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강요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나미비아를 위임시켰다. 1966년,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에 의한 봉기와 요구는 유엔이 그 영토에 관한 직접적인 책임을 취하도록 이끌면서, 1968년에 국가명을 나미비아로 개명했으며 1973년 나미비아족의 공식적인 대표로서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를 인정한다. 그러나, 나미비아는 이 시기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 아래 남게 되었다. 뒤 이은 내부 폭동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85년에 나미비아에 과도 정부를 설치했다.(199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치 아래 남아 있던 도시인 월비스베이를 제외하고) 나미비아는 199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나미비아의 인구는 약 180만명이며 안정적인 다당제 의회 민주주의 국가다. 농업, 가축몰이 (herding), 관광, 값비싼 보석과 금속의 채굴은 나미비아의 경제의 중추를 형성한다.[5]

지도

동영상

각주

  1. 빈트후크〉, 《위키백과》
  2. 빈트후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Windhoek", Wikipedia
  4. 윈트훅〉, 《요다위키》
  5. 나미비아〉,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남아프리카 같이 보기

남아프리카 국가
남아프리카 도시
남아프리카 섬
남아프리카 바다
남아프리카 문화
남아프리카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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