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린주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볼린주(우크라이나어: Волин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북서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볼린주의 면적은 20,144㎢이며 인구는 1,021,356명(2022년)이다. 주도는 루츠크이다. 서쪽으로는 폴란드 루블린주, 북쪽으로는 벨라루스 브레스트주, 동쪽으로는 리우네주, 남쪽으로는 리비우주와 접한다.
역사적으로 볼히니아 지역이라고 하며 볼로디미르 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다만 역사적 볼히니아는 오늘날의 볼린주에 더해 리우네주 전체와 지토미르주, 흐멜니츠키주, 테르노필주 일부를 포함하는 오늘날 볼린주 보다 넓은 지역이다.
역사[편집]
역사적으로 키예프 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루테니아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 분할 이후 갈리치아 지방에는 명목상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을 계승했다는 명분 하에1772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설립되지만 정작 로도메리아 지방(볼히니아 지방)은 1795년부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결과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지만, 1939년 독소 폴란드 분할로 소련의 우크라이나 SSR에 편입된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군이 이곳을 점령하게 되었고, 우크라이나 국가 판무관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이 시기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볼린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볼린에서 지주 노릇을 하던 폴란드인들을 학살하였고, 폴란드인들도 이에 대응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을 보복 학살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다시 소련 땅이 되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 땅이 되었다.
루츠크[편집]
루츠크는 볼린주의 주도로, 우크라이나 북서부의 스티르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기록상으로는 1085년 슬라브족의 마을 '루체스크'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돼 있지만 10세기 초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키이브 루스 시대와 중세 유럽, 그리고 소련 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볼히니아 지방의 종교 중심지이기도 했다.
루츠크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다. 신석기 시대에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기록상으로는 고대 슬라브족의 기원과 설화 등을 담은 ‘이파티예프 연대기(Hypatian Chronicle)’에 1085년 슬라브족의 마을 루체스크(Luchesk)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돼 있다. 하지만, 적어도 10세기 초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역 설화에 따르면 이 도시의 시작은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츠크는 인근 도시인 볼로디미르-볼린스키(Volodymyr-Volynskyi)가 성장해 그 역할을 넘겨주게 될 때까지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Principality of Galicia-Volhynia)의 수도로서 기능했다. 목조 성채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돼 발전했다. 하지만 중세유럽에서는 수도가 바뀌는 경우가 많아 루츠크는 상업이나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지 못했다.
1240년 타타르인(Tatars)들이 인근 마을을 탈취하고 약탈했지만 성채는 무사했다. 1321년, 루츠크는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의 군대에 점령됐다.
리투아니아의 통치하에서 루츠크는 번영하기 시작했다. 영토를 루테니아(Ruthenia) 지역으로 확장하고 국가의 틀을 세운 리투아니아의 게디미나스(Gediminas) 대공의 아들 중 하나인 리우바르타스(Liubartas) 왕자는 이곳에 루바르트성(Lubart Castle)을 세웠다.
1392년부터 143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다스리며 영토를 가장 크게 만들었던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은 유대인과 타타르인, 카라임인(Karaims) 등 식민지 주민들을 루츠크로 데려와 마을을 만들었다. 비타우타스 대왕(Vytautas the Great)라고도 불리는 그는 볼히니아의 공작이라는 칭호를 쓰고 루바르트성에 거주한 리투아니아의 마지막 군주였다. 루츠크는 1429년 비타우타스 대왕이 타타르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소집한 유럽 군주회의가 열린 장소이기도 했다.
이 시기 루츠크는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비타우타스 대왕은 1427년 가톨릭 주교구를 볼로디미르-볼린스키에서 루츠크로 옮겼다. 15세기 말 이곳에는 19개의 정교회와 2개의 가톨릭 성당이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정교회 주교구도 있었다.
1569년 루블린 연합(Union of Lublin)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이 만들어졌다. 루츠크는 폴란드의 통치하에 들어가 볼히니아주(州)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와 16세기 루츠크는 주요 교역로들의 교차로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우크라이나의 무역 중심지 중 하나로 발전했다. 그러나 연방의 쇠락과 더불어 17세기 후반 루츠크도 성장을 멈췄다. 1781년에는 큰 화재로 440여 채의 집과 두 개의 성당 모두 피해를 겪었다.
1795년 폴란드 제1차 분할의 결과로 루츠크는 러시아제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러시아 전쟁(1830~1831년) 후 러시아제국은 도시에서 폴란드의 영향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공식적으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도록 했고, 그리스 가톨릭 성당은 정교회 성당으로 바뀌었다. 1845년 또 다른 대형화재로 많은 인명 피해를 겪었다.
루츠크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50년 루츠크 주위에 3개의 주요 요새가 세워졌다. 루츠크는 미하일로고로드(Mikhailogorod)라는 작은 요새가 되었다. 1897년 1만 4,800명(유대인 79%)이던 인구는 1912년 2만 6,600명으로 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인 1915년 8월 29일, 루츠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Empire of Austria-Hungary)에 의해 점령당했다. 1년 이상의 점령기 동안 루츠크는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Joseph Ferdinand) 휘하의 제4군단 사령부 주둔지였다. 1916년 6월 7일, 러시아군은 사흘간의 총공세 끝에 루츠크를 탈환했다.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루츠크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Ukraine People’s Republic)에 속했다. 1919년 5월 폴란드군은 우크라이나군을 제압하고 루츠크를 함락시켰다.
폴란드 정권하의 루츠크는 볼히니아주의 행정 중심지로서 성장했다. 1931년 루츠크의 인구는 3만 5,600명으로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루츠크는 서부 볼히니아 지방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정치 · 문화 중심지였다.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주교구가 자리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인을 위한 사립 김나지움(중등교육기관)도 있었다.
1939년 루츠크는 소련에 의해 점령당했다. 1941년 독일이 침공하자 퇴각하던 소련군은 수천 명의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죄수들을 살해했다. 루츠크를 점령한 독일 나치군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대학살을 벌였다. 또, 우크라이나 반군이 독일 나치군의 점령지 곳곳에서 벌인 대학살로 볼히니아 지방에서만 1만 여명의 폴란드인이 희생됐다.
1944년 2월, 루츠크는 소련의 붉은군대에 의해 탈환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루츠크에 남아 있던 폴란드인들은 대부분 추방됐다. 루츠크의 인구 구성은 완전히 바뀌어 우크라이나인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루츠크는 소련의 구성국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우크라이나 SSR: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의 산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냉전 기간에는 공군기지가 이곳에 있었다.
오늘날 루츠크는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다. 2003년에는 폴란드 총영사관이 문을 열었다. 주요 산업으로는 식품 가공, 제련, 기계 제조, 의류 · 신발 제조업 등이 꼽힌다.[3]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볼린주〉, 《위키백과》
- 〈볼린주〉, 《나무위키》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루츠크〉,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