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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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북투(Timbuktu) 또는 통북투(프랑스어: Tombouctou)는 말리의 통북투주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약 5만 명이다. 14, 15세기경 지어진 유명한 이슬람 사원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1]
개요[편집]
팀북투는 아프리카 서부, 말리의 중부지방, 니제르강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니제르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남북방향으로 사하라사막의 교통지역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팀북투는 1828년 프랑스인 르네 카이에의 소개로 세상에 알려졌다. 13세기말 말리 제국의 술탄이 거대한 이슬람 사원과 왕궁 등을 건축하면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팀북투는 상코레 대학과 마드라사스라고 불리는 이슬람 학교 등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번성했던 아프리카의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이다. 징가레이버, 상코레, 시디 야햐 등의 3대 모스크는 팀북투의 옛 영화를 떠올리게 해 주는 유적들이다. 14~15세기 경에 이슬람 고등 교육기관인 마드라사, 1327년 코란 상코레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들이 들어서며 서아프리카 최대의 종교, 학술,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코레 대학의 재학생은 약 2500명이었다. 이슬람 교리와 논리학, 천문학, 의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우기 위해 머문 학생들의 수가 2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고서가 남아있다. 복구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나, 이러한 유적들은 지속적인 파괴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팀북투의 건축물들은 기본적으로 진흙으로 지어져 있다. 유명한 이슬람 사원인 징가레베르 사원, 상코레 사원, 시디 야히아 사원 등이 있다. 14~15세기경에 지어진 유명한 이슬람 사원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곳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8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말리의 다른 세계유산인 젠네가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300km, 또 다른 세계유산인 아스키아 무덤이 있는 가오는 동쪽으로 약 300km 떨어져 있다.[2]
팀북투는 사하라사막의 남쪽 끝 부분에 있으며 지중해와 모로코, 알제리, 말리, 부르키나파소, 가나를 거치는 내륙 종단 대상로(隊商路)와 세네갈과 말리, 니제르, 차드, 수단 공화국, 이집트로 이어지는 내륙 횡단 대상로의 교차점에 있다. 처음에는 투아레그족 유목민들이 주기적으로 머물기 위해 막사를 세워 숙영지로 출발했는데 사막 교역 및 교통의 요지였기에 곧 부유한 무역 거점으로 성장했으며, 14세기부터 말리 제국과 송가이 제국의 도시로서 번영하였고 15세기에는 중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중심지로 부상했다. 전성기인 16세기에는 4만 5,000명의 인구를 자랑했다. 아프리카 내륙의 지리 및 기타 정보에 어두웠던 유럽인들에게는 미지의 도시였으나 말리 제국의 술탄이던 만사 케이타 무사 1세가 이슬람교도로서 메카를 순례하며 이 신비한 도시의 소문이 널리 퍼진다. 1324년부터 1325년에 이르기까지 만사 무사는 메카 순례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카이로에 들러 이집트 태수를 만났는데, 500명의 하인 행렬이 죄다 황금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카이로 시내를 행진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배포 큰 술탄은 이집트 총독부터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이 황금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바람에 이후 11년간 카이로의 금값이 폭락해버렸다. 1828년 프랑스인 탐험가 르네 카이예가 유럽인으로선 처음으로 이곳에 도착해 외부에 이 도시를 알렸다. 그러나 발견 당시의 팀북투는 이미 서아프리카 항구들의 발달로 내륙 대상무역과 함께 쇠퇴했다. 현재 팀북투는 가난하고 사막화로 고통받고 있다.[3]
지리 및 기후[편집]
팀북투는 니제르강의 주요 수로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사하라사막 남쪽 끝에 위치해 있다. 마을은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리는 모래로 덮여 있다. 카바라의 항구는 마을의 남쪽으로 8km 떨어져 있고 강의 한 부분과 3km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운하는 심하게 토사로 덮여 있었지만 2007년에 리비아에서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준설되었다.
팀북투는 쾨펜 기후 분류에 따르면 더운 사막 기후(BWH)를 특징으로 한다. 열대 수렴대(ITCZ)의 영향으로 6월과 9월 사이에 대부분의 도시 강우량이 발생하면서 연중 날씨가 매우 덥고 건조하다. 일교차는 건기가 우기보다 크다. 1년 중 가장 더운 달인 4월, 5월, 6월의 하루 평균 최고 기온은 40°C를 넘는다. 1년 중 가장 온화한 달들인 12월, 1월, 2월에 최저 기온이 나타난다. 그러나 평균 최고 온도는 30°C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겨울은 건조하고 먼지가 많은 무역풍이 사하라 티베스티 지역에서 남쪽으로 기니만까지 불어오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먼지가 도시에 정착할 때, 모래가 쌓이고 사막화가 다가오고 있다.[4]
역사[편집]
젠네(Jenne-Jeno), 가오(Gao), 디아(Dia)와 같은 다른 중요한 중세 서부 아프리카 도시와 마찬가지로 철기시대 정착지는 도시의 전통적인 건립 날짜보다 앞선 팀북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비록 두꺼운 모래층의 축적이 마을 자체의 고고학적 발굴을 방해하고 있지만, 주변 경관의 일부는 공기가 빠지고 표면에 도자기 파편이 드러나고 있다. 1984년 수잔 매킨토시(Susan McIntosh)와 로더릭 매킨토시(Roderick McIntosh)가 이 지역을 조사한 결과 현대 도시에서 동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고대 와디 시스템인 엘 아마르(el-Ahmar)를 따라 여러 철기시대 유적지가 확인되었다.
철기시대 텔 단지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예일대 고고학자들과 미션 컬처 드 톰부크투(Mission Culturel de Tombouctou)에 의해 와디 엘 아흐마르(Wadi el-Ahmar) 근처 팀부크투(Timbuktu) 남동쪽 9km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이 결과는 이 지역이 기원전 5세기에 처음으로 점령되었고, 서기 1천년 후반에 걸쳐 번성하였으며 결국 서기 10세기 후반이나 11세기 초반에 붕괴된 것으로 나타났다.
팀북투는 머나먼 신비한 장소로 가정에서 언급되는 곳이지만, 도시 자체는 한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역 중심지이자 중세 세계의 학문적 중심지였다. 팀북투는 많은 통치자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독특하지만, 도시는 13~14세기 말리 제국 치하에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말리의 저명한 만사 무사(Mansa Mūsā)는 팀북투에 이슬람 학습 대학을 설립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학은 역사, 수사학, 법, 과학,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의학의 주제를 포함하여 이슬람 학문보다 훨씬 더 많이 가르쳤다. 만사 무사는 또한 팀북투와 말리 제국을 그의 하지를 통해 중세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에 소개했는데, 그의 메카에서의 시간은 곧 아랍 여행자들이 북아프리카를 방문하도록 영감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어렵고 긴 여정 때문에 훨씬 나중까지 도시에 도착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 도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얻었다.
팀북투는 주로 지역의 금과 소금 채굴, 그리고 사하라사막을 횡단하는 노예무역으로 부를 얻었다. 금은 지중해 지역에서 매우 가치 있는 상품이었고 소금은 도시의 남쪽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지만, 팀북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산은 그것의 위치였다. 이 도시는 니제르 강에서 9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좋은 농경지가 되며 사하라 사막 근처에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무역로를 제공한다. 팀북투는 또한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의 지역들 사이의 중간 지점의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팀북투는 문화적 용괄로로 발전했다.
말리 제국은 1400년대 중반에 꾸준히 쇠퇴하고 송가이 제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팀북투시는 송하이족에게 함락되기 전에 투아렉족의 지배를 잠시 받았다. 권력의 대대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팀북투는 일반적으로 모로코인들이 1590년 송가이 제국을 침공 하고 톤디비 전투 이후인 1591년 팀북투를 점령하기 시작할 때까지 번영했다. 1593년, 대부분의 대학 교수진들은 새로운 통치자들에 대한 충성심으로 처형되거나 추방당했고, 이로 인해 새로 이용 가능한 대서양 횡단 항로와의 경쟁이 심화되어 무역이 감소하고 도시의 관련성을 잃게 되었다. 1890년대가 되어서야 팀북투는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 말리에 편입되었고, 1960년에 말리라는 독립 국가의 일부로 선언되었다.
오늘날 팀북투의 인구는 중세 시대에 250,000명으로 추정되는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상당히 감소했다. 도시는 생존의 수단으로 정부의 자금에 의존하면서 몇 년 동안 엄청난 가난에 시달려왔다.
2012년 4월 1일, 아자와드 해방을 주창하며 투아레그족 반군(MNLA)이 팀북투와 가오 등 말리 북부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 후 샤리아를 두고 알 카에다, 보코 하람, 안사르 딘(Ansar Dine) 등 이슬람 단체들과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었고 곧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유네스코는 팀북투를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이슬람 단체들은 MNLA가 차지한 지역을 공격했고 가오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결국 이슬람 단체가 가오를 점령했는데 그들은 가오 뿐 아니라 팀북투의 세계문화유산인 이슬람 성인들의 무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안사르 딘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슬람 영묘 16기 중 14기를 부수는 등 막장짓을 하자 온건한 무슬림이 대다수인 말리 남부에선 안사르 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2013년 1월 말리 내전에 프랑스군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전투에 휘말려 도시의 여러 고건축물과 아메드 바바 도서관에 소장된 30만 점의 귀중한 고문서가 소실될 위기에 처했으나 1월 28일 프랑스-말리 정부 연합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에 확인해 보니 고문서는 대부분 무사했다고 한다.
2023년 8월 8일, 팀북투는 자마 누스라트 울 이슬람(Jama'at Nasr al-Islam wal Muslimin, JNIM) 에 의해 전면 봉쇄되어 빈곤을 악화시키고 식량 부족을 초래했다. 포위 공격이 시작된 이래로 33,000명이 도시와 주변 지역을 떠났고, 1,000명이 모리타니로 탈출했다. 포위 공격은 말리 전쟁 중 말리 주둔 유엔 사절단인 MINUSMA가 철수한 이후 시작되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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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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