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레이드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애들레이드(영어: Adelaide, 문화어: 아델레이드)는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주도로, 남극해로 통하는 세인트빈센트만에 있는 도시이다. 인구는 약 142만 명으로 호주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1]
목차
개요[편집]
애들레이드는 세인트빈센트만(Gulf St Vincent)의 동안(東岸), 마운트로프티산맥(Mount Lofty Ranges)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며, 토렌스강(River Torrens)에 의해 남북으로 양분되어 있다. 호주 횡단 철도(Trans-Australian Railway)의 출발점으로서, 호주 남부 지역의 중심 도시이자 교통 요지이다. 이름은 19세기 영국 국왕 윌리엄 4세의 왕비 애들레이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오스트레일리아 각 주의 주도 중 다섯 번째 규모로,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시가지는 강의 남안에 있으며 윌리엄 라이트(William Light) 대령의 도시계획(1836)에 따라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이 반듯하다. 계획도시로서 중앙에 도시의 주요 시설을 놓고 외곽부에 공원과 주택지를 놓는 식으로 개발하였다. 이곳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1836년 스튜어드에 의해 발견되어 개발되었으며, 1940년 주 최초의 자치도시가 되었다. 특히 제l차 세계대전 후 철광개발에 따라 근대공업이 발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그리스, 네덜란드, 폴란드, 기타 많은 유럽인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왔다. 베트남 전쟁후 미국에서 이민자가 늘어서, 민족구성이 다양해졌다. 이러한 문화가 섞여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요리와 활기찬 식당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기후는 지중해성기후로, 배후에 비옥한 농목지가 있어 밀, 과일, 양모의 집산지를 이룬다. 제분업, 직물공업, 자동차공업 등이 이루어지며, 특히 밀의 적출항으로서 유명하다. 애들레이드와 주변 지역 대부분은 한때 와인의 포도 생산지였기 때문에, 와인 생산 지역(바로사 밸리)는 애들레이드의 외곽에 존재하고 있다. 주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일 뿐만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의 동서남북을 향한 교통의 연결점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애들레이드 대학교는 호주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호주 8대 명문대학 중 하나로서, 남호주 최고의 대학교로 꼽힌다. 애들레이드대학을 비롯해서 신학교, 광산학교, 농업연구소 등이 있어 오스트레일리아 산업문화의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다. 애들레이드 동물원은 남반구에서 하나뿐인 판다를 보유한 동물원이다.[2]
역사[편집]
현대의 애들레이드 주변 지역은 원래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많은 원주민 국가 중 하나 인 카우르나 원주민이 거주했던 곳이다. 도시와 공원 지역은 현재 탄다냐 국립 원주민 문화 연구소의 짧은 이름인 탄다냐(Tandanya) 또는 현재 빅토리아 광장의 이중 이름인 탄다냥가(Tarndanyangga)로 알려져 있다. 그 이름은 '수컷 붉은캥거루 바위'라는 뜻으로, 현재는 파괴된 현장의 암석을 가리킨다.
주변 지역은 수백 세대에 걸쳐 관리되어 온 나무와 관목이 있는 탁 트인 풀이 무성한 평원이었다. 카우르나 원주민 국가는 타르탄야의 북쪽과 남쪽으로 뻗어있는 평원과 숲이 우거진 고원의 기슭을 포함하고 있었다. 토렌스강은 카라위라 파리(Karrawirra Pari)로 알려졌다. 약 300명의 카우르나 주민이 애들레이드 지역에 거주했고, 정착민들에 의해 코완딜라라고 불렀다.
평야 전역에는 반유목 생활을 하는 20개 이상의 지역 씨족이 있었으며, 수세기에 걸쳐 반복적으로 오두막이 건설된 광범위한 마운드 정착지 와 일반 사회에서 분리된 마법사 계급을 포함하는 복잡한 사회 구조가 있었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 유럽인들이 정착한 지 몇십 년 안에 카우르나 문화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카우르나어 언어의 마지막 사용자는 1929년에 죽었다. 초기 선교사들과 다른 연구자들에 의한 광범위한 문서화는 두 가지 모두의 현대적인 부활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많은 지역 장소들의 이름을 바꾸거나 카우르나 이름을 포함시키기 위한 지역 및 주 정부의 약속을 포함했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는 1836년 12월 28일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자유 식민지였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초대 측량국 장관 윌리엄 라이트(William Light) 대령이 주도 조사 계획 디자인을 담당했다. 라이트 안은 식자의 비판 등을 받고서도 토렌스 강 주변의 언덕을 적지로 선정했다. 토렌스강 초기 식민지 사람들에게 중요한 수원이 되었다. 애들레이드는 도시가 성장 번영에 대한 초기 계획을 많이 수정하지 않고도 끝낼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었다. 오래된 도시는 이후 도로 확장, 공원 정비 등이 필요할 수 있지만, 애들레이드는 처음부터 넓은 로컬 도로와 공원을 정비하고 있었다.
애들레이드는 자유 이민을 위한 계획 식민지로 건설되었다. 이민자들은 종교의 박해를 받지 않고,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이 점에서는 죄수의 땅이라는 역사를 가진 시드니나 호바트 등의 다른 오스트레일리아의 도시와는 다르다.
애들레이드는 20세기 대부분 동안 호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1900년에 전기 가로등이 도입되었고 1909년에 전기 트램이 승객들을 운송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28,000명의 남자가 전투에 파견되었다.
애들레이드는 전후 호황을 누리면서 상대적으로 번영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인구가 증가하여 시드니와 멜버른에 이어 호주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 지역이 되었다. 그곳의 번영은 가뭄과 1930년대의 대공황으로 인해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애들레이드가 덜 취약한 위치 때문에 제조업을 위한 안전한 장소로서 애들레이드를 옹호했던 플레이포드 정부 하에서 산업의 자극과 다양화를 가져왔다.[3]
경제[편집]
애들레이드는 제조와 연구를 위한 광대한 단지가 있다. 홀든과 미쯔비시 자동차, 브리지 스톤의 공장이 있었으나 2000년대 후반부터 점차 모두 폐쇄되었다. 또한 군사 연구 기관 DSTO Defence Science and Technology Organisation)가 솔즈베리(애들레이드 시내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교외)에 있다. 다른 산업으로는 철광석의 정제, 국방, 전자 부품 생산 등이 있다. 1992년에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주립 은행이 금융 붕괴하여, 그 결과 국가 부채가 4억 오스트레일리아 달러가 되기도 했다. 이것이 줄어든 것은 최근이다. 그 이후 주 정부는 긴축 예산으로 재정을 절약하는 법률을 제정하였고, 이 때문에 도시와 국가의 새로운 경제 개발은 상당히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 3월부터 2010년 3월까지 10년간, 애들레이드 매트로 폴리탄의 부동산의 중간 가격은 약 3배가 뛰었다.
교통[편집]
메트로[편집]
애들레이드는 종합적인 대중교통 수단이 있고, 애들레이드 메트로로 알려져 있다. 유도버스인 애들레이드 오반(Adelaide O-Bahn)이나 애들레이드 해안 글레넬그까지 운행하는 역사적인 글레넬그 트램(Glenelg Tram)이 있다.
철도[편집]
장거리 열차는 시 서쪽에 있는 케즈윅(Keswick)에서 발착한다. 시드니에서 퍼스로 가는 인디안 퍼시픽의 중간 정차역이며, 멜버른에지 오버랜드, 앨리스/다윈까지 가는 터미널이 되기도 한다.
공항[편집]
애들레이드는 공공의 정기 항공편이 이용하는 애들레이드 공항과 개인이나 기업 등의 프로펠러기를 이용하는 패러필드 공항(Parafield), 오스트레일리아 공군(Royal Australian Air Force)의 에딘버러 기지 등 3개의 공항이 있다.
애들레이드대학교[편집]
애들레이드대학교(University of Adelaide)는 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의 주도(州都)인 애들레이드에 있는 국립대학교이다. 1874년에 설립되었다. 목축업자이자 구리 채굴업자인 월터 왓슨 휴스(Walter Watson Hughes)가 대학 설립을 위해 2만 파운드를 기부하였다. 1876년 첫 수업을 시작하였다. 1881년 과학학부에 대학 최초의 여자 신입생이 입학하였다. 공학컴퓨터수리과학학부, 건강과학학부, 인문학 및 사회과학학부, 전문가학부, 과학학부 등 5개의 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로빈슨 기관, 웨이트 연구기관 등의 부속기관이 있다. 영연방정부 및 연구기관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레일리아연구위원회(ARC), 국립건강의료연구위원회(NHMRC) 등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노스 테라스(North Terrace)의 메인 캠퍼스 외에 로즈워시 칼리지, 더 웨이트 인스티튜트, 내셔널 와인센터 등의 캠퍼스가 있다. 상업적 개발회사인 애들레이드 연구&혁신회사(Adelaide Research & Innovation Pty Ltd, ARI)를 세워 대학이 연구개발한 결과를 상품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 및 국외 업체들, 연방정부, 지방정부 등과 함께 다양한 공동연구 및 개발 작업을 관리하고 있다.
애들레이드 대학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세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학이다. 5명의 노벨상 수상자, 104명의 로즈 장학생(1902년 세실 로즈(Cecil Rhodes)에 의해 시작된 장학금 제도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미국, 독일, 영연방공화국 출신 학생들에게 주어진다)을 배출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8대 명문 대학교 연합인 G8 소속 대학이다. 싱가포르에 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영국의 글로벌 대학평가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실시한 ‘2011 세계 대학 순위’에서 92위를 기록하였다.[4]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애들레이드〉, 《위키백과》
- 〈애들레이드〉, 《요다위키》
- 〈애들레이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애들레이드대학교〉,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오세아니아 같이 보기[편집]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