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알제(아랍어: الجزائر, 베르베르어: ⴷⵣⴰⵢⴻ, 프랑스어: Alger, 영어: Algiers, 문화어: 알좌자이르)는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의 수도이며 최대도시이다. 지명은 아랍어로 '작은 섬'이라는 뜻의 알자자이르가 변형된 것이다.[1]
목차
개요[편집]
알제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알제리 최대의 항구이다. 구릉지대에 있으나,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기후는 여름에 고온건조하고 겨울에 온난습윤한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이다. 알제는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부근 농산물의 집산지를 이룬다. 또한 육·공·해상 교통의 요지로, 특히 해안에는 l∼2만t급 상선(商船)이 정박할 수 있는 선창과 방파제, 하역설비 등 잘 정비된 부두가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수입되는 막대한 석탄 저장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지중해 무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사하라사막의 풍부한 석유, 천연가스의 개발과 더불어 공업화가 추진되어 정유소, 가스액화공장, 암모니아공장 등이 건설되었고 하시메사우드로부터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연결되어 있다.
알제 해안 거리에는 호텔, 상점들이 늘어서 있어 북아프리카 제1의 유럽식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시의 기원은 1529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 지방의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서 항구를 건설한 것에 비롯한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카르타고 시대부터 중요시되어, 당시에는 이코심(Icosim), 로마 시대에는 이코시움(Icosium)이라 부른 곳으로 지중해 서부의 요충지를 이루고 있었다. 950년경에도 옛 유적을 간직한 이 항구도시에 아랍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 후 해적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16세기에 투르크에게 지배당하면서 알제리의 행정,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1830년 프랑스군에게 점령된 이래 근대적인 항만설비와 프랑스풍의 근대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알제리의 주도로 정했다.
알제의 매력은 로마, 이슬람 시대의 유적과 카스바 지구에 아랍, 투르크가 건설한 구시가지와 프랑스가 건설한 신시가지가 서로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11월부터 1944년 8월까지는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 해방 조직의 본부와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사령부가 이곳에 있었다. 따라서 육군병원, 공장, 요새 등이 있는 군사 도시이기도 했으나, 1962년 알제리의 독립과 함께 이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가톨릭 성당과 이슬람교 사원이 많으며, 1870년 설립된 알제대학이 있다. 이 밖에 미술, 종교, 자연과학, 인류학 등에 관한 각종 연구기관, 도서관, 박물관 등이 있으며, 프랑스 문화와 아랍 아프리카 문화의 접점으로서 정비된 문화의 중심지이다.[2]
어원[편집]
알제의 아랍어 이름은 알자자이르(الجزائر, al-Jazā'ir)이며, 아랍어의 알제리 방언으로는 알자이르(الدزاير, al-dzāyīr)라고 한다. 수도 이름이 나라 이름이 된 것이다. '알자자이르'의 '알'은 아랍어 정관사이고 자자이르는 아랍어로 섬을 의미하는데, 베르베르인이 이곳에 처음 도시를 세울 때 알제 앞바다에 섬이 있는 것을 보고 거기서 도시 이름을 땄다고 한다.
기후[편집]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지중해성 기후(Csa)에 속한다. 강수량은 연간 약 600mm 정도이며 눈은 정말 드물게 내린다. 여름 평균 기온은 약 24°C이며 겨울 평균 기온은 약 12°C이다. 알제에서 측정된 역대 최고기온은 47.5°C이며 역대 최저기온은 -3.3°C이다.[3]
역사[편집]
설립[편집]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페니키아 인들이 기존 베르베르 인들의 작은 항구 도시에 정착하였다. 당대에 도시는 '갈매기의 섬'이란 의미의 익슴으로 지칭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이코시온으로 음차하였다. 마침 그리스어로 이는 20을 의미하였고, 헤라클레스가 아틀라스 산지를 방문했을 당시 그를 따른 20명의 동행자들을 기린 것이라고 연결시켰다. 한편 섬을 지칭하는 당초 지명은 현재의 아랍어 지명에도 의미상 계승되었다.
공화정 말기 로마령이 되었고, 비록 서기 1세기 들어 탁파린 (탁파리나스)의 베르베르 반란으로 파괴를 겪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퇴역병들을 정착시키며 복구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식민도시 이코니움은 1세기 후반 베스파시아누스 대에 콜로니아 라티나로 승격되었다. 라틴 영향이 짙게 남아있던 도시는 2세기 말엽 베르베르 인들의 이주로 현지화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기독교화되었다. 5세기 초엽 주교 라우렌티우스는 카르타고 공의회에 참가하였고, 인근의 아우구스티누스와도 친분이 있었다.
항구 일대의 거리는 지금도 로마시대 도시 계획을 따르고 있고, 수도교 유구는 19세기 중반까지 남아있었다고 한다. 3세기 무렵 베르베르 유목민들의 공격이 심화되며 도시는 성탑을 지닌 성벽이 둘러졌다. 그중 일부는 중세 카스바의 일부에 포함되거나 밥 엘 우에드 지구 일대에 현존하고 있다.
흰 대리석 분수가 로마 수도교 유구 대체 해안 평원과 언덕배기에는 정원이 딸린 빌라들이 자리하였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등 여러 조각상들이 출토되어 알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인구가 밀집된 시내의 중심 도로는 현재의 밥 아즈운 거리에 상응한다. 그외에 모자이크를 지닌 거대한 목욕탕이 있었고 밥 엘 우에드와 밥 아즈운에는 로마 공동묘지가 있었다.
430년 도시는 반달족에게 점령되어 파괴를 겪었다. 다만 442년 반달-로마 협정에 따라 이코시움은 로마에 반환되었다. 비록 6세기 초엽 현지 베르베르 부족들이 도시를 점령했으나 그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반달 원정 중에 동로마 제국령으로 수복되었다. 698년 카르타고를 함락한 우마이야 왕조 군대는 700년 이코시움을 함락, 파괴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로마화된 주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어 다마스쿠스로 압송되었다. 950년 현지 베르베르인들이 재건할 때까지 일대는 유적으로 남아 있었다.
중세[편집]
933년 알제의 남쪽에 산하자 부족의 거점이자 자신의 거처로 아쉬르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944년 베르베르 국가인 지리 왕조의 창건자 불루긴에 의해 상업도시로 재건되었다. 남쪽 산지의 카스바에서 해안에 이르는 도시는 상부와 하부로 구성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둘은 합쳐졌다. 1014년 지리 조에서 독립한 함마드 왕조의 지배를 받던 도시는 1159년 무와히드 왕조의 아브드 알 무민에게 점령되었다. 13세기 틀렘센의 지얀 왕조령이 되었으나 그들의 주요 항구는 오랑이었기에 알제는 15세기 들어 아랍계 타알리바 (الثعالبة) 아미르들 하에 자치를 누렸다. 그 창건자인 압델라흐만 앗 탈리바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동생 자파르의 21대손으로, 수피 성인이기도 하였다.
십자군의 일환으로 도시 앞의 섬 페뇽은 1302년부터 아라곤 왕국에게 장악되었다. 한편 1492년 그라나다 함락 후 많은 무어인 난민들이 알제에 정착하며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무어인들은 스페인에 대한 보복으로 고향인 이베리아 해안을 습격하였다. 이렇게 무슬림 사락선들에 시달리던 스페인은 1510년 오랑을 접수, 페뇽을 요새화하고 알제의 아미르 살림 앗 투미를 복속시켰다. 1516년 살림의 초청으로 우루지와 하이르 앗 딘 형제를 도시로 초청하였다. 그들은 알제의 스페인 주둔군을 축출한 후 살림을 스페인과의 공모 혐으로 암살하였다. 스페인군은 1516년과 1519년 두 차례에 걸쳐 수복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다만 형제의 후원자였던 오스만 술탄 셀림 1세가 사망한 후 알제는 1524년 현지 카빌레 부족장에게 넘어갔다.
1529년 후임 술탄 쉴레이만 1세의 지원으로 2천의 예니체리 및 포병대, 그리고 막대한 자금과 함께 돌아온 하이르 앗 딘은 성내의 셰이크들을 매수해 동맹으로 삼아 손쉽게 알제를 장악하였다. 그후 그는 스페인령 페뇽을 포위, 22일간 성채를 포격하였다. 스페인 측의 구원을 받지 못한 수비대장 동 마르틴 데 바르가스는 수비대가 25명만 남고 식량마저 고갈되자 항복하였다. (1529년 5월 29일) 그후 동 마르틴은 맞아죽었고, 성채를 허문 하이르 앗 딘은 기독교도 노예들로 하여금 그 돌들로 해안 방벽을 쌓게 하였다. 그후 알제를 기반으로 사략선 활동에 전념하던 하이르 앗 딘은 1535년 오스만 대제독으로 발탁되어 도시를 떠났고, 환관 출신 하산 아가가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카를 5세)는 1541년 여름 유럽 전선에서 오스만 군에게 부다를 잃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알제 원정에 나섰다. 9월 28일 그는 5백여 척의 대함대에 2만 4천의 대군을 태워 출항하였다. 주요 지휘관 중에는 멕시코의 콘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도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제노바 함대는 폭풍을 만나 고초를 겪었고, 10월 19일에야 알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4일 후 병력은 하선하였고, 150여 몰타기사단의 활약으로 현지 저항을 무마하고 도시를 포위하였다. 2만이 넘는 포위군에 비해 8백의 수비대와 5천여 민병대로 구성된 알제의 수비는 풍전등화에 놓인듯 보였다. 그러나 10월 24일 기후가 급변하여 강한 바람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고, 많은 갤리선들이 닻을 잃고 휘청였다. 그중 15척이 근해에서 파괴되었고, 33척의 카라크 선들이 침몰하였으며 나머지는 흩어졌다. 이에 남은 병력이 하선하려 할 때에 알제의 수비대가 기습을 가하였고, 큰 피해를 입혔다.
카를 5세 역시 포위되었다가 몰타 기사단의 결사 항전으로 구출되었을 정도였다. 스페인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는 알제 만 동쪽 마티포 곶에 남은 함대를 피난시키고 카를 5세에게 이를 집결지로 청하였다. 황제는 10여 km를 행군하여 그와 합류하였고, 여전히 악천후가 지속되자 그들은 다른 스페인령 항구인 베자이아로 철수하였다. 그곳에서 머물던 카를 5세는 바다가 안정된 11월 23일에야 귀국 항해에 나설 수 있었고, 선상에서 말을 던져 무게를 줄였다. 그는 12월 3일 카르타헤나에 당도한 후에야 두달여 간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후 스페인은 함부로 알제를 넘보지 않았다. 실패한 알제 원정에서 스페인이 입은 손실은 막대하였다. 17척의 갤리선, 130척의 카라크선과 1만 2천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었다. 전사한 장교만 3백여에 달하였다. 그외에도 수천의 포로가 잡혔고, 그 수가 너무 많았기에 알제의 노예시장에서는 과잉 공급으로 인당 양파 1개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에 하산 아가는 이듬해 7월 스페인령이던 메르스-엘-케비르 항구를 공격하였다.
17세기 들어 알제의 인구는 10만이 넘었는데, 그중 40% 가량이 노예가 된 유럽인들이었다. 이에 바르바리 전쟁 등 여러 서양 국가들이 공격하였으나 해적질은 이어졌다. 돈키호테의 작가인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 역시 알제에서 거의 5년간 포로 생활을 하였다. 한편 본토에서 망명한 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유럽인들도 있었는데, 그러한 경우에는 안전을 보장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끔 고관이 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영국인 삼손 로울리는 알제의 재무관에 올랐다. 당시 시가지는 5개 성문을 지닌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고, 1556년에는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시타델이 세워졌다.
알제 데이국[편집]
알제는 1659년 예니체리 부대가 현지 파샤 (총독)을 폐위하고 그들 중에 아가를 선출하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예니체리 정권의 아가들이 내분으로 연이어 살해당하자 (12년간 4인 모두 비명횡사) 오스만 조정은 재차 파샤를 파견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으나, 1671년 현지 사략선 제독인 라이스들이 그들 중에 모하메드 타리크를 튀르크계 언어로 '삼촌'을 뜻하는 데이로 선출하여 지도자로 삼았다. (무함마드 1세) 다만 조정이 파견한 파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지녔기에 알제 데이국은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 종속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데이 모하메드는 라이스들을 규합해 예니체리 아가들을 축출하였으나, 그로 인해 몇차례 암살 시도를 겪자 1677년 알제에서 트리폴리로 도주하였다. 그가 섭정으로 둔 바바 하산은 5년 후 데이로 선출되어 집권하였다. 1695년 4대 데이 핫지 샤바네가 예니체리 부대에 의해 암살당한 후 들어선 예니체리 정권의 5번째 데이이다. 15년간 6명의 데이가 있었던 예니체리 정권의 혼란기 속에서 그 역시 예니체리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후 같은해 바바 알리 샤우시가 수천의 예니체리를 학살, 파샤를 축출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을 쟁취한다.
1716년 2월과 5월 알제에서 연달아 규모 7.0의 대지진이 발생하여 2만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었다. 지진 규모가 커서 바다 건너 시칠리아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알제는 이때 시가지 대부분이 붕괴하여 향후 알제 데이국에서 수십년에 걸쳐 재건에 매달렸다.
알제 재건이 한창이던 1718년, 알리 샤우시를 계승한 모하메드 3세는 선대부터 늘 경계 대상이던 예니체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유럽계와 현지인들을 중용하였다. 이로써 정계에서 밀려난 튀르크 예니체리들의 분노를 샀고, 결국 1724년 5월 알제 부두 시찰에 나선 모하메드 3세는 건물에 숨어있던 튀르크 예니체리의 플린트락 권총에 암살당하였다. 이후 예니체리들은 제니나 궁전에서 시파히 부대의 아가를 데이로 선출했으나, 카프탄 (예목)을 입히는 순간 누바기 (궁전 수비대)들이 머스켓 총을 난사하며 그들을 쫓아내었다. 이후 알리 1세의 규정대로 디반에서 쿠르드 압디를 데이로 선출하였고, 그 역시 예니체리를 견제하였다.
프랑스령[편집]
1830년 프랑스가 이 도시를 점령할때까지 해적질은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이 도시를 프랑스령 알제리의 수도로 하여 알제리를 다스렸다.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알제에 정착했고, 이 시기 알제에 수많은 유럽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프랑스가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하자 프랑스령 알제리는 이후 설립된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알제는 추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42년 연합국의 횃불 작전으로 자유 프랑스가 알제를 탈환하였고, 1944년 자유 프랑스가 해체될 때까지 자유 프랑스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다.
독립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54년 알제리 전쟁이 발발하자 알제는 알제리 국민해방전선(FLN)과 프랑스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어 고문, 학살이 일어났다.
1962년 알제리 전쟁이 끝나고 1964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 알제는 알제리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FLN이 알제리를 일당제 독재국가로 만들자 1988년에는 FLN의 일당 독재체제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일당제가 막을 내리고 다당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1991년 이슬람 구원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하자 FLN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발발한 알제리 내전으로 인해 알제는 다시 한 번 전쟁터가 되었다.
2002년 알제리 내전이 끝난 뒤 알제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고 이후 알제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른다.[4]
지도[편집]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