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니우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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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우치주(우크라이나어: Чернівец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체르니우치주의 면적은 8,097㎢이며 인구는 896,566명(2021년)이다. 주도는 체르니우치이다. 북서쪽으로는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북쪽으로는 테르노필주와 흐멜니츠키주, 동쪽으로는 빈니차주와 접하며 남쪽으로는 루마니아, 남동쪽으로는 몰도바와 국경을 접한다.
2023년 2월 기준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자카르파탸주와 함께 유이하게 전쟁 피해를 입지 않은 주이다.
역사[편집]
소련이 루마니아 왕국으로부터 강탈한 부코비나 북부와 베사라비아 북부의 일부를 합쳐서 신설되었다. 몰다비아 공국의 영토였던 역사 때문에 현재까지도 인구의 1/3은 루마니아인과 몰도바인이며 러시아인도 일부 있다. 체르니우치 외에도 과거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의 삼제(三帝)삼합점이 있었던 노보셀리차(Новоселиця/Noua Suliță),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몰다비아 공국의 국경 도시였던 호틴(Хотин/Hotin) 등이 유명하다. 1940년 8월 7일에 창설되었다.
체르니우치[편집]
체르니우치는 우크라이나 서남부에 있는 체르니우치주의 주도로, 프루트강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북부 2개 주와 우크라이나의 체르닙치주를 포함하는 옛 부코비나 지방의 정치 · 문화 · 종교의 중심지였다. 역사적으로 지배세력이 계속 바뀌며 우크라이나와 동유럽의 여러 민족이 함께 거주해온 도시로 리틀 비엔나로도 불렸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국내 철도 및 도로 교통의 중심지이며, 국제공항도 유치하고 있다.
체르니우치는 해발 248m의 고지대에 숲과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로, 프루트(Prut)강이 도심을 가로질러 흐른다. 지리적으로 민족적 경계에 자리한 이 도시는 루마니아 · 헝가리 · 독일 · 러시아(소련)의 지배를 받는 등 부침이 심했다. 그만큼 다양한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국제적 도시이기도 했다.
도시명도 각 민족의 언어로 알려져 있다. 루마니아어로는 체르나우치(Cernăuți), 독일어 체르노비츠(Czernowitz), 폴란드어 체르니오프체(Czerniowce), 헝가리어 체르노비츠(Csernovic), 그리고 러시아어로는 체르놉치(Черновцы́, 1944년까지는 체르노비치[Чернови́цы])다. 13세기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Kingdom of Galicia–Volhynia)이 지배하던 시대의 도시명은 체른(Chern)이었다.
체르니우치는 19세기 말부터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그 부속국인 부코비나 공국의 수도로 번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과 루마니아인 등의 축출이 이뤄지면서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성격은 퇴색됐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
오늘날 체르니우치는 우크라이나 국내 철도 및 도로 교통의 중심지이다. 도심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체르닙치 국제공항에서는 그리스의 아테네, 터키의 이스탄불, 이탈리아의 나폴리 등으로 향하는 항공편이 운항하고 있다.
체르니우치에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 근교에서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 정착지의 유물도 발굴되었다. 체르닙치의 유물과 유적들은 2~5세기 슬라브족 연구의 단서가 되고 있다. 중세 키이브 루스(Kyiv Rus) 시대(9~13세기)에는 백크로아티아인(White Croatians)과 티베르치인(Tivertsians)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
요새화된 정착지는 12세기 후반 갈리치아 공국(Principality of Galicia)의 야로슬라프 오스모미슬대공에 의해 프루트강 왼쪽 둑에 세워졌다. 당시의 체른이라는 요새명은 ‘검은 도시’라는 뜻으로, 흑토(黑土)와 짙은 색 오크로 만들어진 요새의 벽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요새는 13세기 중반 몽골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됐다. 이후 고지대인 프루트강 오른쪽 둑에 신시가지가 세워졌다. 옛 요새의 폐허는 지금도 남아있다.
1359~1775년 체르니우치와 인근 지역은 루마니아의 전신(前身)이라고 할 수 있는 몰다비아 공국(Principality of Moldavia)의 영토였다. 서유럽과 남유럽 및 동유럽 국가들을 연결하는 르비브(Lviv)-수체아바 교역로가 체르닙치를 통과했다. 체르닙치는 특별소비세를 징수했다. 체르닙치를 언급한 첫 역사적 기록도 1408년 몰다비아 공국의 알렉산드루 1세(Alexander I; 루마니아어 Alexandru I)가 르비브의 상인들과 체결했다는 물품세 조약 관련 문서다. 1488년 체르닙치는 체르닙치군(郡)의 중심지가 되었다. 몰다비아 시대의 체르닙치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도시법에 근거한 자치권을 누렸다.
15~16세기 체르니우치는 국제 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계속된 전쟁과 침략으로 인해 도시는 경제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체르니우치는 몰다비아-폴란드 전쟁과 러시아-투르크 전쟁 등에 휘말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군에 점령되는 등 큰 피해를 겪었다.
1775년 몰다비아 영토의 북서부는 합스부르크 왕가(Habsburg Monarchy)에 합병되었다. 부코비나로 알려지게 된 이 지역에서 체르니우치는 그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형성되면서 체르니우치는 1849년 부속국인 부코비나 공국의 수도로 격상됐다.
체르니우치는 투르크-발칸 세력권에서 중부유럽 세력권으로 이전되면서 지역적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이는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다. 1779년 체르닙치에는 3,2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독일인(공무원, 교사, 상인), 루마니아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등이 유입되면서 계속 성장하였다.
1783년 체르니우치에는 공예업자들의 길드가 설립되었고, 18세기 말부터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체르닙치는 양조장, 증기공장, 증류장, 벽돌공장 등의 건설과 함께 경제가 급성장했다. 1850년에 상공회의소가 설립되었고, 1877년에는 증권거래소가 생겼다. 1866년 르비브-체르니우치 철도 개설, 1895년 전기발전소 건설, 1897년 전차의 도입, 1895~1912년 상하수도처리시스템 도입 등으로 개발이 더욱 촉진되었다. 시내 중심가는 유럽의 도시 같다고 해서 리틀 비엔나라고 불렸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체르니우치는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1884년 우크라이나 인민회가 설립되었고, 그 건물은 우크라이나 공동체 및 문화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1914년까지 체르닙치는 우크라이나 출판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어로 된 여러 월간지와 일간지, 정치 · 문학 · 교육 잡지와 아동도서 시리즈 등이 간행됐다.
체르니우치는 루마니아인 · 유대인 · 독일인 · 폴란드인에게도 중요한 정치 · 문화 · 교육 · 출판의 중심지였다. 1908년 오스트리아의 작가이자 유대인이었던 나단 번바움(Nathan Birnbaum)이 주관한 제1회 이디시어 학술회의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독일의 작가 칼 에밀 프란조스(Karl-Emile Franzos)는 우크라이나의 국민 시인인 타라스 셰브첸코(Taras Shevchenko)의 작품을 대중화시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서 교육의 중심어는 독일어였다. 제국의 붕괴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독일어는 체르니우치와 그 인근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체르니우치는 러시아군에 세 차례(1914년 8월~9월, 1914년 11월~1915년 2월, 1916년 6월~1917년 8월) 점령되었다. 점령군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을 박해했다. 1918년 11월에는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사이에서 벌어진 부코비나 지역 쟁탈전 속에서 체르니우치는 결국 루마니아군에 점령됐다. 루마니아 시대에도 체르니우치는 부코비나 지방의 행정 중심지였다. 루마니아 당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은 계속됐다.
1930년대 체르니우치는 중요한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1936년에는 시내에 155개의 대기업과 61개의 중소기업이 있었다. 제과업체와 증류업체, 식품가공공장, 화학공장, 금속공장, 직물공장, 가구공장, 인쇄소 등이었다. 1940년 6월부터 1941년 7월까지 체르니우치는 소련에 점령되었다. 그러나 도시는 다시 루마니아의 손에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도시 인구의 구성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30년에는 체르니우치의 인구 11만 2,400명 가운데 유대인이 26.8%, 루마니아인 23.2%, 독일인 20.8%, 우크라이나인 18.6%, 나머지는 폴란드인 등이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인들은 본국으로 송환됐고, 루마니아인도 본국으로 도주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당했다. 유대인들 상당수는 홀로코스트로 사망했으며, 많은 우크라이나 지도자가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소련군이 두 번째로 체르니우치를 점령했다. 체르니우치는 체르니우치주의 주도가 되었다. 1956년 천연가스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1971~1973년 프루트강 위에 새로운 철도교(橋)가 건설되었다.
1991년부터 체르니우치는 독립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일부가 됐다. 1999년 5월 루마니아는 체르니우치에 총영사관을 개설했다.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태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등의 여파로 우크라이나에 위기감이 돌던 2016년 4월, 체르니우치 시의회는 거리의 간판이나 광고판을 비롯해 공공 게시판에 러시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했다.[3]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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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체르니우치주〉, 《위키백과》
- 〈체르니우치주〉, 《나무위키》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체르닙치〉,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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