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로보흐라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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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로보흐라드주(우크라이나어: Кіровоград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키로보흐라드주의 면적은 24,588㎢이며 인구는 903,712명(2022년)이다. 주도는 크로피우니츠키(옛 이름 키로보흐라드)이다. 북쪽으로는 체르카시주, 북동쪽으로는 폴타바주, 동쪽으로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남쪽으로는 미콜라이우주, 서쪽으로는 오데사주, 빈니차주와 접한다. 주 북동쪽에는 드네프르강이 흐른다.
전형적인 냉대기후라 연평균 기온이 8.2도로 서늘한 편이지만 우크라이나 토양 대부분이 그렇듯이 농사에 최적화된 초르노젬 지대이다. 농업, 기계공업, 광산업이 발달하였다. 정치 성향은 전반적으로 친서방적인 모습을 보인다.
키로보흐라드주에는 혁명가 트로츠키의 출생지인 베레슬라우카가 속해있다.
주요도시[편집]
크로피우니츠키[편집]
크로피우니츠키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있는 키로보흐라드(Kirovohrad)주의 주도이다. 인훌(Inhul)강 유역의 드니프로(Dnipro)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크로피우니츠키는 18세기 중반부터 러시아제국의 통치하에서 노보로시스카야(Novorossiyskaya)현, 예카테리노슬라프(Yekaterinoslav)현, 헤르손(Kherson)현 등에 속한 작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다.
크로피우니츠키는 19세기 후반부터 교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곡물 · 양모 · 라드 · 밀가루 · 목재 · 소 · 말 등의 교역이 활발히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산업 도시로 지역 경제를 이끌고 있다. 크로피우니츠키의 역사는 이 지역에 성엘리자베스 요새가 세워진 17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는 자포리지야 카자크(Zaporozhian Cossacks)의 공동체가 있던 이곳에 요새를 만들어 남쪽의 투르크와 크림 타타르인들으로부터 영토를 보호하고자 했다.
1768~1774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당시 이 요새는 러시아군의 작전기지 역할을 했다. 옐리사베트그라드라고 명명된 요새 주변의 마을은 곧 이 지방의 작은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옐리사베트그라드의 인구는 1787년 4,750명에서 1823년 9,300명으로 늘었다. 1828~1860년 옐리사베트그라드는 러시아제국 수비대의 주요 주둔지 중 하나로, 엄격한 계엄령 하에 놓여 있었다. 이 기간 도시의 경제는 다소 침체했다. 1860년대 후반 오데사 · 미콜라이브 · 크레멘추크(Kremenchuk) 등과 철도 연계 시스템이 구축되고, 1874년 영국 소유의 농기계 공장이 세워지면서 옐리사베트그라드의 본격적인 경제 성장이 시작됐다. 1890년대 옐리사베트그라드에는 8개의 공장이 있었다. 이곳에 고용된 노동자는 도시 전체 노동자의 58%에 해당했다.
제분소와 증류소도 여러 개 있었다. 매년 남부 우크라이나의 수확기에는 일자리를 찾는 수천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이 도시를 찾았다. 교역로들의 갈림길에 자리하고 있던 옐리사베트그라드는 교역 중심지로 성장했다. 1년에 네 번 열린 정기 박람회에는 러시아제국 전역은 물론, 그리스 등 외국에서도 수많은 상인이 방문했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공공서비스는 매우 부족했다. 초등학교는 1890년대까지 12곳에 불과해 문맹률도 높았다. 1892년 상수도 시설이 마련되었고, 1897년에 전차가, 1908년에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옐리사베트그라드는 1870년대부터 문화와 혁명 활동의 지역 중심지가 됐다. 1882년 우크라이나 중부 최초의 전문극단이 이 도시에서 창립됐는데, 극단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 현재의 도시명을 있게 한 크로피브니츠키다. 번성하던 옐리사베트그라드는 1901년 기근으로 황폐화되었다. 정부의 부실한 대응으로 주민들은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
19세기 옐리사베트그라드에는 유대인 인구가 상당했다. 1897년에는 유대인이 전체 인구의 37.8%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여러 차례의 폭력적인 포그롬(pogrom, 박해)으로 많은 유대인이 약탈과 학살에 희생됐다. 러시아 혁명 후 붉은 군대가 일으킨 1919년 5월의 포그롬 때는 옐리사베트그라드에서 사흘 동안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1920년 옐리사베트그라드는 소련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1926년 6만 6,500명의 도시 인구 중 44.6%는 우크라이나인, 27.7%는 유대인, 그리고 25.0%는 러시아인이었다. 도시의 이름은 1924년 지노비옙스크, 1934년 키로보, 1939년 키로보그라드로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키로보그라드는 1941년 8월 5일부터 독일 나치군에 점령되었다. 1944년 1월 8일 소련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전후 재건사업이 1948년 말 마무리되면서 도시의 산업은 다시 발전했다. 농기계와 라디오 부품부터 식품 · 의류 · 신발 · 가구 · 건축자재 등이 생산됐다. 인훌강이 크로피브니츠키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도시 내에는 수호클리아(Suhoklia)강과 비얀카(Biyanka)강 등 인훌강의 지류들도 흐른다.
크로피우니츠키의 기후는 일반적인 대륙성으로, 겨울엔 춥고 눈이 오며, 여름엔 덥다. 1월 평균 기온은 –4.8℃, 7월 평균 기온은 20.7℃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34mm로, 6월과 7월에 가장 많다.[3]
스비틀로보드스크[편집]
스비틀로보드스크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위치한 키로보흐라드주(州)의 도시이다. 드니프로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스비틀로보드스크군(郡)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지만, 시정은 별도의 시의회를 통해 운영되는 주 직할도시다.
스비틀로보드스크시는 1954년 드니프로강에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세운 도시다. 이 도시에 병합된 수몰 지역의 마을들은 12세기 키이브 연대기에 언급돼 있을 만큼 정착의 역사가 오래 됐다.
수몰된 지역에 폴란드가 1615년에 세운 크릴리프도 있었다. 크릴리프는 티아스민강과 드니프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유역에 세워진 요새 마을로, 마그데부르크 도시법에 따른 자치권도 가졌다. 카자크 지도자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에 항거해 봉기를 일으키기 직전인 1647년 수감됐던 곳이기도 하다. 19세기 크릴리프는 인근에 있던 타보리셰 마을 등과 합병돼 노보게오르기옙스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1954년 소련의 각료회의는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 건설을 결정했다. 수력발전소 건설 노동자와 엔지니어들을 위한 정착지 개발도 진행됐다.
크레멘추크 댐이 건설되면서 크릴리프 지역을 비롯한 노보게오르기옙스크 일부 지역은 완전히 물에 잠겼다. 1961년 수력발전소 인근에 세워진 정착촌 크레멘추크게스부드는 타보리셰 등 노보게오르기옙스크의 수몰 지역에서 이전해온 마을들과 하나의 도시로 병합됐다. 이 도시는 처음엔 소련의 첫 번째 서기장의 이름을 따 흐루쇼프로 명명됐다. 그러나 살아 있는 공산당 지도자들의 이름을 도시명에 붙이지 못하도록 한 법령에 따라 이 도시명은 1962년 크렘헤스로 바뀌었다. 크렘헤스는 크레멘추크 수력발전소의 약칭이다. 도시명은 1969년 지금의 스비틀로보드스크로 다시 개칭됐다. 스비틀로보드스크는 '밝은 수로(水路)'라는 뜻이다. 그즈음 도시의 인구는 거의 3만5000명에 달했다.
1975년 인구는 4만9400명, 1989년 5만5591명으로 늘었다. 수력발전소 관련 산업 외에도 비철금속과 건축자재 기업들이 도시 경제를 이끌었다.[4]
올렉산드리야[편집]
올렉산드리야는 우크라이나 중부의 키로보흐라드주에 위치한 도시다. 주도인 크로피브니츠키에서 북동쪽으로 75km 떨어져 있다. 올렉산드리야군의 행정 중심지이지만, 시정은 별도의 시의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올렉산드리야는 1746년의 기록에 우시브카(Usivka)라는 명칭의 정착지로 처음 언급된다. 그 정착지는 폴타바에서 크림반도로 이어지는 교역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175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우시브카에는 256명의 주민이 있었다. 이곳의 정착지에 대한 언급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현재의 크로피브니츠키에 성엘리자베스 요새가 건설된 후인 1754년의 기록이다. 1759년 이곳 최초의 정교회 교회인 성니콜라스 성당이 지어졌다. 1752~1764년 러시아의 노바야세르비아 보병연대 소속의 제3 중대가 우시브카에 배치됐다. 러시아 당국은 우시브카가 있던 곳에 주둔군을 위한 성채 마을인 베체야(Becheya)를 세웠다. 1784년 러시아 정부는 이 정착지에 그리스식 이름인 알렉산드리스크(Alexandriysk)를 붙였다가 다시 알렉산드리야(Aleksandriya)로 바꿨다. 현지인들은 올렉산드리야라고 불렀다. 올렉산드리야의 행정구역상 위치는 러시아제국의 행정체계 재편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1806~1922년에는 헤르손(Kherson)현에 속한 올렉산드리야군의 군청 소재지였다. 19세기 전반기에 올렉산드리야와 주변 마을 주민들은 주로 농업과 원예에 종사했다. 1830~1850년대에는 콜레라가 4번이나 유행하며 많은 희생자를 냈다. 1855년에만 주민 142명이 죽었다.
농노제 폐지 등의 개혁 정책은 올렉산드리야의 경제를 자극했다. 가공 공장들이 늘어나고, 철도 건설이 시작됐다. 1869년에 개통된 오데사-하르키브 철도 노선이 올렉산드리야의 교외 역을 통과했다. 그보다 앞선 1855년에 개통된 오데사-상트페테르부르크 전신선도 올렉산드리야를 통과했다. 1917~1921년, 올렉산드리야의 권력층은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1919년 5월 올렉산드리야에서는 반(反)볼셰비키 봉기가 일어났다가 곧 붉은 군대에 진압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 8월 6일부터 1943년 12월 6일까지 올렉산드리야는 독일 나치군에 점령돼 있었다. 큰 전투나 폭격 피해는 없었지만, 이곳의 유대인들은 거의 희생되거나 추방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올렉산드리야는 광부들과 기계제조업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1951년부터 1971년까지 약 20개의 산업체가 생겼는데, 그중 9개는 갈탄의 추출과 처리를 위한 것이었다. 올렉산드리야의 기후는 습한 대륙성기후로 분류된다. 겨울은 온화하고 짧은 편이며, 여름은 덥고 길다. 가장 추운 달은 1월(월평균 기온 -5℃), 가장 더운 달은 7월(월평균 기온 21.5℃)이다. 건기는 따로 없으며, 강우량은 여름에 많은 편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26mm로, 가장 습한 달은 6월(월평균 강우량 66mm), 가장 건조한 달은 3월(월평균 강우량 30mm)이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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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키로보흐라드주〉, 《위키백과》
- ↑ 〈키로보흐라드주〉, 《나무위키》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스비틀로보드스크〉,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올렉산드리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키로보흐라드주〉, 《위키백과》
- 〈키로보흐라드주〉, 《나무위키》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스비틀로보드스크〉,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올렉산드리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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