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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노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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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치
테르노필주 위치

테르노필주(우크라이나어: Тернопіль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테르노필주의 면적은 13,823㎢이며 인구는 1,030,562명(2021년)이다. 주도는 테르노필이다. 북서쪽으로는 리비우주, 남서쪽으로는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남쪽으로는 체르니우치주, 동쪽으로는 흐멜니츠키주, 북쪽으로는 리우네주와 접한다.

드니에스테르의 주요 중 하나는 인접한 체르니우치주, 이바노프랑키우스크주와 함께 테르노필주의 남쪽과 남서쪽 경계이며 주를 흐르는 지류에는 즈브루치, 세레트, 스트리파가 포함되어 있다. 세레트 강은 드니에스터 강의 왼쪽 지류로 주 행정 중심지를 흐른다.

역사[편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만들어졌다. 폴란드의 이 지역 국가 정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동갈리시아에 대한 소련의 침략을 선호했다.그러나 곧이어 소련 보안기관들은 소련-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폴란드로 이민을 간 우크라이나 저항세력 국가원들에 대한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인종적 배경을 불문하고 많은 현지인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1939년 12월 4일, 서우크라이나의 행정 구역은 폐지되고 기존의 소련 행정 구역으로 대체되었다. 테르노필 주(원래 타르노폴 주)는 주로 타르노폴 주(州)와 볼히니아 주(州)의 남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동안, 테르노필은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의 치열한 전투의 대상이 되었다.독일 점령 기간 동안 볼히니아 지역을 제외한 이 지역은 갈리시아 자치구의 일부가 되어 일반 정부에 의해 행정으로 넘어갔다. 전쟁이 끝난 후, 강 근처의 파괴된 테르노필의 주택 구역은 재건되기 보다는 인공 호수로 변했다.게다가 소련의 우크라이나 SSR에 합병되면서, 이 지역의 대부분의 폴란드인들은 국경이 서쪽으로 멀리 이동한 폴란드로 강제 이주되었다.옛 폴란드 자치령 지역은 북쪽의 영토를 추가함으로써 확장되었지만, 서쪽 끝은 리비브 주로 넘어갔다.1 945년 이후 소련 당국은 우크라이나 서부가 우크라이나 동부에 비해 상당히 덜 러시아인으로 남아 있었지만, 러시아 민족에게 테르노필주를 포함한 소련에 새로 합병된 영토에 정착하도록 권장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에는 갈리시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의 동부를 형성한 세 개의 주(주)가 있다.이들 중 리비브 주와 이바노프랭키브스크 주는 모두 왕국에 속했고, 테르노필의 세 번째 주는 가장 북쪽에 있는 4개의 군(라이온)을 제외하고 주로 왕국에 속했다.크레메네츠라이온, 슘스크라이온, 라니브치, 즈바라즈라이온의 북반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제2공화국 볼린주(주)의 크르제미엔에크 카운티의 일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폴란드 의회의 일부였다. 그들은 갈리시아 왕국의 일부를 형성하지 않았다.테르노필 주의 나머지 라이온들은 모두 갈리시아 왕국의 일부였고, 주로 왕국의 카운티들과 동족이었다.

1990년대 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서 우크라이나 서부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정치문화 민족주의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고, 테르노필 유권자들의 정치적 유대가 그 관점을 반영했다.독립 후 첫 선거에서는 우크라이나 인민운동이 이 주의 선두 정당이었다. 2002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주 유권자의 과반수는 민족주의 성향의 우크라이나 선거구인 율리야 티모셴코를 지지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88% 이상의 유권자가 전우크라이나연합 '조국'의 율리아 티모셴코 후보를 지지했다.[3]

산업[편집]

경제는 주로 농업 지향적이다.산업 중에는 설탕 생산, 알코올, 유제품(버터 등) 등 식품 산업이 발달해 있다.조명기구인 '바트라', 테르노필 수확기 공장, 오리온(무선통신) 등 공장도 많다.

교통[편집]

충분한 고속도로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유럽 주요 회랑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철도도 잘 발달되어 있다. 수상 교통은 매우 제한적이고 대부분 드니에스터 강을 따라 있다.

주요도시[편집]

테르노필[편집]

테르노필은 우크라이나 중서부에 있는 테르노필주(州)의 주도(州都)이다. 16세기 중반에 세워진 폴란드의 요새 도시에서 발전했다. 1944년까지는 주로 폴란드식 이름인 ‘타르노폴(Tarnopol)’로 알려졌다. 지리적으로는 동유럽 평원의 포딜리아 고지대에 속하는 테르노필고원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 지명으로는 갈리치아에 속한다. 폴란드와 소련 지배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했다. 오늘날 광역 단위의 지방 행정 중심지들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의 비중이 가장 큰 편이다.

테르노필은 1540년 폴란드의 귀족이자 최고 군사령관(Great Crown Hetman, 대 헤트만)이었던 얀 아모르 타르놉스키(Jan Amor Tarnowski)가 타타르(Tatar)의 공격에 대비해 지은 군 주둔지와 성에서 발전한 도시이다. 폴란드식 도시명인 타르노폴은 바로 ‘타르놉스키의 도시’란 뜻이다.

1548년 이 도시는 폴란드의 국왕으로부터 1년에 세 번 박람회를 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어 마그데부르크 도시법(Magdeburg law)에 따른 자치권도 갖게 되었다.

타르놉스키의 사유지였던 테르노필은 그의 사후 아들과 딸에게 잇따라 상속되었다. 두 사람 모두 자녀가 없이 사망하자, 1570년 테르노필은 사위였던 슬라브계 왕족 코스티안틴 바실 오스트로즈키(Kostiantyn Vasyl Ostrozky)에게 넘겨지며 오스트로즈키가(家)의 재산이 되었다.

타타르의 잦은 공격에도 불구하고(1544 · 1575 · 1589 · 1618 · 1672 · 1694년) 테르노필은 제조 및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1648년 흐멜니츠키(Khmelnytsky) 봉기를 시작으로 일어난 카자크의 반란과 1672~1676년 오스만제국과의 전쟁 등을 겪으며 폴란드왕국의 영토였던 테르노필은 카자크와 투르크에 점령되기도 했다.

1672년까지 테르노필의 인구는 2,400명으로, 우크라이나인과 유대인, 그리고 폴란드인(대부분 수비대의 병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대인 수는 꾸준히 증가했고, 그들이 무역권을 장악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교외 지역으로 밀려났다. 17세기 테르노필에는 3개의 정교회 성당, 1개의 가톨릭 성당, 그리고 여러 개의 유대교 회당이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며 타타르와 투르크의 공격은 중단됐지만 경제는 쇠퇴했다. 1770년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의 40%가량이 사망했다. 북방 대전과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을 겪으며 두 차례(1710 · 1733년)에 걸쳐 러시아에 포위되기도 했다.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후 테르노필은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1809년에 러시아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815년 다시 오스트리아에 넘어갔다.

19세기 중반 테르노필은 갈리치아-포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주로 농산물 무역과 러시아제국-유럽 간 중계무역 덕분이었다.

1870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였던 렘베르크(Lemberg, 현재의 르비브)와 연결되는 철도가 건설되면서 테르노필은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되었다. 인구는 1817년 1만 200명에서 1869년 2만 100명, 1900년 3만 415명, 1914년 3만 5,200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1860년대 테르노필에서는 우크라이나어로 된 신문들이 발행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1914년 8월부터 1917년 7월까지의 러시아 점령기에 우크라이나식 문화 · 정치 활동은 한동안 제한됐다.

1918년 11월부터 1919년 7월까지 테르노필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주창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West Ukrainian People's Republic)의 일부였다. 수도였던 르비브가 폴란드에 장악되면서 1918년 11월 말부터 1918년 12월까지 공화국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군대는 도시 장악권을 놓고 싸웠다. 테르노필은 결국 폴란드의 손에 다시 넘어갔다. 러시아의 붉은군대에 점령돼 갈리치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Galician Soviet Socialist Republic)의 수도였던 1920년 7~9월을 제외하고, 테르노필은 1939년 9월까지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다.

테르노필은 1922년 타르노폴주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소련과 맞닿은 동부 국경이 막히면서 도시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폴란드의 지방 행정 중심지가 된 테르노필에서는 폴란드화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우크라이나인들의 개종(改宗)을 유도하고, 우크라이나어로 가르치는 학교들을 폐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포딜리아 지역에서는 테르노필이 우크라이나인의 가장 큰 중심지였다.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구와 교회, 우크라이나어로 가르치는 김나지움(중등학교) 2개 등이 있었고, 우크라이나인들의 협동조합을 비롯한 경제기관들도 있었다. 몇몇 공장은 우크라이나인 소유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테르노필은 소련(1939년 9월~1941년 7월)에 이어 독일(~1944년 5월)에 점령됐다.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추방했고, 죄수들을 살해했다. 독일군은 퇴각하기 전에 도시의 절반 이상을 파괴했다. 1946년 도시의 인구는 1만 2,000명으로 줄어 있었다.

테르노필은 1945년 8월 정부가 채택한 종합계획에 따라 재건되었다. 산업이 다시 발전하면서 인구는 1950년 2만 6,000명에서 1959년 5만 2,000명, 1970년 8만 5,000명, 1978년 13만 9,000명으로 늘었다.

오늘날 테르노필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주요 산업 중심지 중 하나이다. 설탕 정제 단지와 육류 포장 공장, 유제품 및 양조장 등을 포함하는 식품가공업과 우크라이나 최대의 면직 제조 단지와 합성가죽 공장 등을 포함하는 경공업이 이 도시의 경제를 이끌고 있다.

테르노필은 지리적으로 동유럽 평원의 포딜리아 고지대에 속하는 테르노필고원에 위치해 있다. 드니스테르(Dnister)강의 지류인 세레트(Seret)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 지명으로는 갈리치아에 속한다. 테르노필은 추운 겨울과 덥고 습한 여름을 가진 대륙성 기후 지역이다. 1월의 평균 기온은 –5℃이며, 7월 평균 기온은 19℃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20~600mm이다.[4]

보르시치프[편집]

보르시치프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테르노필주에 있는 도시이다. 보르시치프 라이온(지구)의 행정 중심지이다. 1456년부터 두딘스키 가문의 영지로 언급되어왔다. 1629년 당시 폴란드 왕국에 속해 있던 이 도시는 마그데부르크 헌장을 받았으며, 바사 가문의 상징인 문장도 받았다. 폴란드-오토만 전쟁으로 1672~1683년 포돌리아 에얄렛(주)의 일부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83년에서 1699년 사이에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폴란드와 터키에 약탈을 당했다.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 패하고 카를로비츠 조약에 따라 폴란드로 반환되었다.

폴란드 제1차 분할(1772년) 이후 이 도시는 합스부르크제국에 합병되었다. 1809~1815년 러시아제국에 의해 통제되다가 오스트리아에 돌아왔다. 1914~1917년에 다시 러시아군이 점령하면서 1914~1915년에는 동부 갈리시아도 러시아가 진입해 장악했다.

1919년부터 1939년 9월까지 폴란드에 속했으며, 폴란드-소비에트 국경과 가까운 위치 때문에 국경보호군단 보르시초우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보르시초우는 이 도시의 폴란드 지명이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는 이곳이 타르노폴 보이보데십에서 한 군(郡)의 중심지였다. 1939년 9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한 뒤 이 도시는 소련에 합병되었다. 1941년 7월부터 8월까지는 헝가리군에 점령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독일은 유대인들을 여러 차례 집단 처형했다. 1942년 4월 보르시치프 유대인 게토가 이곳에 세워졌다. 1943년 봄과 여름 사이에 약 400명의 유대인이 이바노프카 수용소로 보내졌고 2,300명 이상의 유대인이 공동묘지에서 총살되었다. 1990년대 소련의 붕괴에 이어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이 나오면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

1885년 보르시초프에서 태어난 볼레스와프 브로니스와프 두치(1885~1980)는 폴란드군 소장으로 군대의 총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참전했으며, 1935~1938년 73보병연대를 지휘했다. 1939년 9월 폴란드가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에 의해 점령당하자 그는 서유럽으로 망명해 프랑스, 스코틀랜드 등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1947년 그는 런던에 정착하여 세계폴란드재향군인협회 의장이 되었다.[5]

초르트키브[편집]

초르트키브는 우크라이나 서부 테르노필 주에 있는 도시이다. 과거에 보수적인 하시디즘 유대인들의 본거지였다. 홀로코스트 이전에 상당한 수의 유대인이 거주했다. 역사적인 첫 언급은 1522년이다. 한때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고등학교 학생들이 1940년 1월에 봉기를 조직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폴란드의 첫 봉기로 기록되었다.[6]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테르노필주〉, 《위키백과》
  2. 테르노필주〉, 《나무위키》
  3. 테르노필 주〉, 《요다위키》
  4.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테르노필〉,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보르시치프〉, 《네이버 지식백과》
  6.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초르트키브〉,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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