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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9일 (수) 10:2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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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사이드(영어: Port Said, 아랍어: بورسعيد)는 수에즈 운하 북단,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집트의 항구도시이다. 포트사이드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68만 명이다. 도시는 1859년 수에즈 운하 건설 당시 건설되었으며 아랍어로는 보르사이드로 불린다.[1]
개요[편집]
포트사이드는 이집트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지중해 연안을 따라 약 30km 뻗어 있으며 강 서쪽 기슭에 걸쳐 있다. 1859년에 건설된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박용 보급 기지였으며, 수에즈운하의 지중해 쪽 출입구로서 발전하였다. 포트사이드라는 이름은 1855년에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 영국, 러시아제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한 국제회의에서 이 이름을 채택했다. 이름은 영어로 항구를 의미하는 '포트'와 당시 이집트의 군주인 무함마드 '사이드' 파샤의 이름을 합쳐서 작명되었기에 근대 이집트의 역사를 상징한다. 1956년 운하가 국유화되기까지 수에즈 운하회사의 본사가 있었으며 10월 말의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 프랑스 해군과 공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그 뒤 급속히 복구되어 가다가 1967년 6월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의 포격과 공습을 여러 차례 받았다. 시나이반도를 잃고 포트사이드가 졸지에 국경도시가 되자 이집트 정부는 주민들을 후방으로 피난시켰다가 1975년 운하를 재개통하며 복귀시켰다. 포트사이드는 국제적인 도시이며, 수에즈 운하 관리청이 위치한다. 포트 사이드의 쌍둥이 도시는 수에즈 운하의 동쪽 둑에 있는 포트푸아드이다. 포트푸아드에는 마을 중심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공존하며 하루종일 운항하는 무료 페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두 합쳐서 수에즈 운하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양쪽에 걸쳐 있는 백만 명 이상의 거주자들과 함께 대도시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에서 두 대륙에 걸쳐 있는 유일한 대도시 지역은 이스탄불이다. 교육기관으로 이집트 공립 대학인 포트사이드 대학이 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학부는 공학 학부와 과학 학부이다. 고대부터 나일강의 동쪽 지류가 바다와 만나는 곳이었고, 라쉬드나 다미에타와 달리 호숫가라 선박 진입이 비교적 용이했기에 옛날 유적들이 많다. 시내에서 서남쪽 4km 지점 호숫가에는 십자군 전쟁기를 거치며 버려진 틴니스 유적이 있고, 동남쪽 25km 지점에는 고대에 '이집트의 관문 도시'로 유명했으나 역시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시에 파괴된 펠루시움 유적이 있다.[2]
기후[편집]
포트사이드는 쾨펜 기후 분류에 따르면 더운 사막 기후(BWH)를 가지고 있지만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집트 북부 해안 의 전형적인 기온을 크게 완화시켜 여름을 적당히 덥고 습하게 만들고 겨울은 온화하고 적당히 습하게 한다. 진눈깨비와 우박도 흔하지만 포트사이드가 더 건조하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보다 덜하다. 1월과 2월은 가장 시원한 달이고 가장 더운 달은 7월과 8월이다. 가장 높은 기록은 1988년 6월 20일에 기록된 44°C였고, 가장 낮은 기록은 1979년 12월 25일에 기록된 0°C이다.[3]
역사[편집]
포트사이드는 1859년 4월 25일부활절 월요일에 이집트의 사이드(Sa'id of Egypt)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이때 페르디낭 드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가 건설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처음으로 상징적인 곡괭이를 휘둘렀다.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는 선박이 근처에 닻을 내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도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해안선과 수면을 이루는 바위 돌출부가 발견되었다. 나무 부두가 있어 배들의 계류장 역할을 했다. 곧이어, 출발 섬과 해변을 연결하는 나무 부두가 건설되었다. 이 바위는 개발 도상 도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40년 후, 이 매우 상징적인 장소에 드 레셉스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에는 지역 자원이 없었다. 포트사이드는 나무, 돌, 물품, 기계, 장비, 주택, 식량, 심지어 물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수입해야 했다. 스위트 워터 운하(Sweet Water Canal)가 완성될 때까지 민물을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저수 용기가 세워졌다.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는 돌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초기 건물들은 종종 키트 형태로 수입되었고 목재를 많이 사용했다. 새롭게 개발된 기술은 복합 콘크리트 또는 베통 코그네(Beton Coignet)라고 불리는 부두를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발명가 프랑수아 코그네(François Coignet)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인공 콘크리트 블록이 바다에 가라앉아 부두의 기초가 되었다. 더 혁신적인 것은 포트사이드에 남아 있는 유일한 원래 건물인 포트사이드의 등대에 동일한 콘크리트를 사용한 것이다. 1859년 최초의 150명의 노동자들은 나무 오두막 주위에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1년 후, 거주자 수는 2000명으로 증가했고, 유럽 대표단은 북유럽에서 수입된 나무로 된 방갈로에 수용되었다. 1869년, 운하가 개통되었을 때, 영구 인구는 10,000명에 달했다.
20세기 초에 포트사이드를 바꾸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1902년에 마타리아에서 온 이집트 면화가 포트사이드를 통해 수출되기 시작했고 1904년에는 카이로까지 표준궤 철도가 개통되었다. 그 결과 대규모 상권을 끌어들여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특히 상당한 규모의 그리스인 공동체가 성장했다. 1907년에 급속히 성장한 이 도시는 약 50,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그 중 11,000명의 유럽인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포트사이드는 중요한 연합군의 병원의 본거지가 되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포트사이드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수천 명의 병력이 이 병원으로 보내졌다. 여기에는 1915년 갈리폴리 전투의 결과로 부상당한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수에즈 운하 회사의 이사들은 아시아 은행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노동자들과 관리들을 위해 300개의 집을 지었다. 포트사이드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의해 설계되었다. 1926년 12월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창립 이래 모든 국적과 종교의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해 왔으며 각 공동체는 고유한 관습, 요리, 종교 및 건축물을 가져왔다. 1920년대 후반까지 인구는 10만 명이 넘었다. 1930년대에는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디자인된 우아한 공공건물들이 있었다. 옛 아랍 지역은 번영하는 도시에 흡수되었다. 포트사이드는 유대인 상인, 이집트 상점 주인, 그리스 사진가, 이탈리아 건축가, 스위스 호텔리어, 몰타 관리자, 스코틀랜드 엔지니어, 프랑스 은행가 및 전 세계의 외교관 등 다국적 인구가 거주하는 번성하고 분주한 국제 항구가 되었다. 그리고 항상 아프리카, 인도, 극동을 오가는 국제 여행객들이 지나갔다.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몰타인의 혼인은 특히 흔했고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와 같은 지역 라틴계와 가톨릭 공동체가 탄생했다. 프랑스어는 유럽인과 비아랍인의 공통 언어였으며 종종 다른 공동체의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모국어가 되었다. 1920년대 몰타의 영국화 이전에 몰타의 조상들이 이집트에 왔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도 널리 사용되었으며 몰타 공동체의 일부의 모국어가 되었다. 다국어 사용은 포트사이드의 외국인 인구의 특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용 프랑스어 뿐만 아니라 공동체 언어를 계속 사용한다.
포트사이드는 설립 이래 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은 1882년 도시를 통해 이집트로 들어가 이집트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1936년 영국과 이집트 왕국 사이에 영국-이집트 조약이라고 불리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것은 수에즈운하와 그 주변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군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영국의 서약을 명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는 1936년 조약을 비난했고 1951년 운하를 지키는 영국군과 교전을 벌였다.
1952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났다. 1956년 7월 26일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대통령이 수에즈운하회사를 국유화했다. 국유화는 이스라엘과 공모하여 이집트를 침공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이집트에서는 3자 침략 또는 수에즈 위기라고 알려져 있다. 1956년 11월 6일, 영국군은 이집트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던 중 포트사이드에 폭력적으로 상륙했다.
외국 군대의 마지막 병사가 철수한 것은 1956년 12월 23일이었다. 그 이후로, 이 날은 포트사이드의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그것은 포트사이드에서 매년 널리 기념되고 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유럽 공동체는 1946년 유럽, 호주,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수에즈 위기 이후 이집트를 떠나 튀니지로부터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유럽인들의 동시 탈출과 유사하다. 대부분의 그리스인 공동체 또한 가말 압델 나세르의 통치 하에 쫓겨나거나 마을을 떠났다.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6일 전쟁) 이후 수에즈 운하는 1975년 6월 5일까지 이집트의 봉쇄로 폐쇄되었고 포트 사이드 주민들은 욤 키푸르 전쟁(1973년)에 대비하기 위해 이집트 정부에 의해 대피되었다. 도시는 전쟁과 운하 개통 후에 다시 사람이 살았다. 1976년, 포트 사이드는 면세항으로 선언되어 이집트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4]
경제[편집]
포트사이드는 2009년과 2010년 인간 개발 지수(Human Development Index)에 따라 이집트 도시 중 2위를 차지했다. 도시의 경제 기반은 어업과 화학, 가공식품, 담배와 같은 산업이다. 포트사이드는 또한 면화, 쌀과 같은 이집트 제품의 수출을 위한 중요한 항구이며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의 연료 공급소이다. 이곳은 면세항으로 번창하고 있으며 특히 여름철에는 관광지로도 번창하고 있다. 포트사이드의 등대(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세계 최초의 건물)가 있는 곳이다. 뛰어난 지리적 위치로 인해 포트사이드는 수출입 기업과 함께 물류 스타트업을 유치하도록 설계되었다.
수에즈운하[편집]
수에즈운하(영어: Suez Canal)는 지중해와 홍해를 수에즈 지협을 통해 잇는 이집트의 운하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구분하는 운하이다. 수에즈운하는 1869년에 완공되어 파나마운하와 더불어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 수에즈운하는 지중해와 홍해를 통해 북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수로로, 아프리카를 우회하지 않고 유럽과 아시아를 해상으로 연결한다. 운하는 북쪽의 포트사이드와 남쪽의 수에즈 인근을 잇는다. 건설 당시의 운하는 길이 164km, 깊이 8m였지만, 몇 번의 확장 공사를 받아 현재는 길이 193.30km, 깊이 24m, 폭 205m가 되었다. 2020년에는 18,500 척 이상의 선박이 운하를 이용했다. 수에즈운하는 편도 방향으로 운영되며 선박의 엇갈림은 그레이트비터호 등 4곳에서 가능하다. 운하에는 갑문이 없기 때문에 해수가 자유롭게 흘러간다. 일반적으로 그레이트비터호 북쪽 운하의 물은 겨울에는 북쪽으로, 여름에는 남쪽으로 흐르며, 호수 남쪽의 물은 수에즈의 조수에 따라 흐름 방향이 바뀐다. 운하는 이집트 정부의 소유지만, 1956년 7월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국유화하기 전까지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주주가 운하를 운영하는 기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1956년 10월의 수에즈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협약에 따라 "전시에서도 평시에도 통상 또는 전시의 모든 선박이 깃발의 구분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에즈 운하는 군사전략적 역할을 해 왔다.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이 있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특히 수에즈 운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14년 8월, 이집트 정부는 수에즈운하 통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발라바이패스 35km를 확장하는 공사에 착수했다. 이 확장 공사는 수에즈운하의 용량을 하루 49척에서 97척으로 늘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비용은 594억 이집트 파운드(90억 달러)로, 이집트 법인 및 개인에게만 발행된 투자 증명서로 자금을 조달했다. 확장된 신 수에즈운하는 2015년 8월 6일 개통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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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포트사이드〉, 《위키백과》
- 〈수에즈 운하〉, 《위키백과》
- "Port Said", Wikipedia
- 〈포트 사이드〉, 《요다위키》
- 〈포트사이드(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프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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