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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팔 ===
 
=== 페이팔 ===
[[페이팔]](PayPal)은 관리자 인원수를 대폭 줄이고 엔지어니가 주도하는 운영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어 따로 윤활유가 필요 없었다. 페이팔이 크게 성장하기 전, [[스티브 첸]]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이곳의 업무방식을 좋아 했다. 새로운 기능이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이 디자이너들에게 제안했고 디자이너들은 그에 따라 설계 화면을 만들고 다시 엔지니어들과 의논했다. 이런 메카니즘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기능도 3~4일이면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튜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은 모두 페이팔의 초기 멤버였다. 채드 헐리가 어떤 인터뷰에서 얘기 한 말이다. "페이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많은 것은 느끼고 배웠습니다. 비즈니스 관련 학위가 없어도 전체 프로세스를 볼 수 있으니까요.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시작 단계의 회사가 하는 모든 일이 아주 의미 있음을 배웠습니다." 2002년 7월 페이팔이 상장된 지 다섯 달 후, [[이베이]](eBay)는 페이팔을 인수했다. 이 후 6개월 동안 최고경영자 [[맥스 레브친]]이 떠났고, 부회장 [[리드 호프먼]]도 떠났다. 이베이의 관리방식은 페이팔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스티브 첸은 그중에서 가장 판이했던 것은 엔지니어의 발언권이 없어졌고 단지 위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경영진이 개발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혁신 없는 조직의 모습을 이베이에서 확인했다. 그토록 에너지가 넘치고 늘 떠들썩한 재미있는 회사였던 페이팔도 이베이에 인수되고 나서는 답답한 운영 방식의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2005년 초에 스티브 첸은 이베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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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팔]](PayPal)은 관리자 인원수를 대폭 줄이고 엔지어니가 주도하는 운영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어 따로 윤활유가 필요 없었다. 페이팔이 크게 성장하기 전, [[스티브 첸]]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이곳의 업무방식을 좋아 했다. 새로운 기능이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이 디자이너들에게 제안했고 디자이너들은 그에 따라 설계 화면을 만들고 다시 엔지니어들과 의논했다. 이런 메카니즘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기능도 3~4일이면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튜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은 모두 페이팔의 초기 멤버였다. 채드 헐리가 어떤 인터뷰에서 얘기 한 말이다. "페이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많은 것은 느끼고 배웠습니다. 비즈니스 관련 학위가 없어도 전체 프로세스를 볼 수 있으니까요.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시작 단계의 회사가 하는 모든 일이 아주 의미 있음을 배웠습니다." 2002년 7월 페이팔이 상장된 지 다섯 달 후, [[이베이]](eBay)는 페이팔을 인수했다. 이 후 6개월 동안 최고경영자 [[맥스 레브친]]이 떠났고, 부회장 [[리드 호프먼]]도 떠났다. 이베이의 관리방식은 페이팔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스티브 첸은 그중에서 가장 판이했던 것은 엔지니어의 발언권이 없어졌고 단지 위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경영진이 개발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혁신 없는 조직의 모습을 이베이에서 확인했다. 그토록 에너지가 넘치고 늘 떠들썩한 재미있는 회사였던 페이팔도 이베이에 인수되고 나서는 답답한 운영 방식의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2005년 초에 스티브 첸은 이베이를 떠난다.<ref name="새손">BIRDHAND, 〈[http://www.birdhand.co.kr/?p=1307 스티브 첸의 유튜브 창업 스토리]〉, 《BIRDHAND》, 2014-07-27</ref>
 
=== 유튜브 ===
 
=== 유튜브 ===
 
2005년 봄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친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모임이 끝난 후 함께 찍은 동영상을 공유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일이 전달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스티브 첸은 친구들과 직접 동영상 사이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는 창업의 시작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공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어떤 엄청난 계기로 인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아이디어'나 '작은 필요'에 의해 '충동적'으로 시작되고 '지속적인 보완'과 '개선의 과정'을 거친다. 유튜브의 시작도 그랬다."
 
2005년 봄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친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모임이 끝난 후 함께 찍은 동영상을 공유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일이 전달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스티브 첸은 친구들과 직접 동영상 사이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는 창업의 시작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공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어떤 엄청난 계기로 인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아이디어'나 '작은 필요'에 의해 '충동적'으로 시작되고 '지속적인 보완'과 '개선의 과정'을 거친다. 유튜브의 시작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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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다. '[[유튜브]]'라는 이름은 완성되기 까지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유튜브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You는 모든 사람을, Tube는 TV를 의미한다. 두 단어를 함께 놓으면 모든 사람이 시청자이자 제작자라는 뜻이 되고 더 구체적으로는 ‘당신의 동영상 플랫폼’이란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다. '[[유튜브]]'라는 이름은 완성되기 까지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유튜브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You는 모든 사람을, Tube는 TV를 의미한다. 두 단어를 함께 놓으면 모든 사람이 시청자이자 제작자라는 뜻이 되고 더 구체적으로는 ‘당신의 동영상 플랫폼’이란 뜻을 나타낸다.  
  
2005년 2월 14일 ‘www.youtube.com’이라는 도메인을 샀고, 2005년 4월 23일 자웨드가 유튜브에 19초짜리 첫 번째 동영상 ’동물원에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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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14일 ‘www.youtube.com’이라는 도메인을 샀고, 2005년 4월 23일 자웨드가 유튜브에 19초짜리 첫 번째 동영상 ’동물원에서‘를 올렸다.<ref name="새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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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유튜브는 16억 5000만 달러에 [[구글]]에 인수되었다. 당시에는 기업 구성원 모두가 매각을 찬성했다.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유튜브 직원들은 매주 10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에 14시간을 일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진행 중이던 아시아, 유럽 시장 진출 등 일부 프로젝트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막강한 데이터 센터가 필요했고 더 많은 [[대역망]]과 [[서버]]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했다. 스티브 첸은 자서전에서 구글에서 일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고백한다. "내 대학 성적으로는 전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구글맨'들은 대부분 [[하버드]], [[스탠퍼드]], [[MIT]], [[카네기멜론]] 출신으로 박사 또는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유튜브맨'들은 대학 중퇴자가 대다수다. 우리는 구글에서 새삼 인생의 행운을 만끽했다." 그는 언론이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일을 '바가지를 썼다'고 표현한 것에 억울해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합병 될 때 기술 책임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그 4명이 세계에서 [[트래픽]]이 가장 많은 사이트를 구축하고 유지했다는 걸! 뿐만 아니라 직원이 80명도 안 되는 소기업이고 대부분 중퇴생들이지만 고학력자로 이루어진 구글 동영상팀을 제압했다는 걸!" 유튜브의 무대가 세계로 확장되면서 더 많은 사용자들이 몰려들었다.
 
2006년 10월, 유튜브는 16억 5000만 달러에 [[구글]]에 인수되었다. 당시에는 기업 구성원 모두가 매각을 찬성했다.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유튜브 직원들은 매주 10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에 14시간을 일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진행 중이던 아시아, 유럽 시장 진출 등 일부 프로젝트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막강한 데이터 센터가 필요했고 더 많은 [[대역망]]과 [[서버]]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했다. 스티브 첸은 자서전에서 구글에서 일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고백한다. "내 대학 성적으로는 전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구글맨'들은 대부분 [[하버드]], [[스탠퍼드]], [[MIT]], [[카네기멜론]] 출신으로 박사 또는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유튜브맨'들은 대학 중퇴자가 대다수다. 우리는 구글에서 새삼 인생의 행운을 만끽했다." 그는 언론이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일을 '바가지를 썼다'고 표현한 것에 억울해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합병 될 때 기술 책임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그 4명이 세계에서 [[트래픽]]이 가장 많은 사이트를 구축하고 유지했다는 걸! 뿐만 아니라 직원이 80명도 안 되는 소기업이고 대부분 중퇴생들이지만 고학력자로 이루어진 구글 동영상팀을 제압했다는 걸!" 유튜브의 무대가 세계로 확장되면서 더 많은 사용자들이 몰려들었다.
  
2010년 5월에는 일일 검색 횟수가 20억 회를 넘어섰다. 유튜브의 하루 동영상 검색량은 미국 3대 방송국 서비스 분량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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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에는 일일 검색 횟수가 20억 회를 넘어섰다. 유튜브의 하루 동영상 검색량은 미국 3대 방송국 서비스 분량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게 되었다.<ref name="새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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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훈 기자, 〈[https://www.hankyung.com/it/article/201201190991t 유튜브 창업자 구글서 일하던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한국경제》, 2012-01-19
 
* 김동훈 기자, 〈[https://www.hankyung.com/it/article/201201190991t 유튜브 창업자 구글서 일하던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한국경제》, 2012-01-19
 
* 김보영 기자,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2100736241 스티브 첸 "뇌종양으로 죽을 고비 넘긴후 '내가 갈 길' 깨달아"]〉, 《한국경제》, 2012-10-07
 
* 김보영 기자,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2100736241 스티브 첸 "뇌종양으로 죽을 고비 넘긴후 '내가 갈 길' 깨달아"]〉, 《한국경제》, 201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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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RDHAND, 〈[http://www.birdhand.co.kr/?p=1307 스티브 첸의 유튜브 창업 스토리]〉, 《BIRDHAND》, 2014-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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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일용, 〈[http://it.donga.com/18472/ 너 그거 알아? 유튜브는 원래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였어]〉, 《IT동아》, 2014-06-19
  
 
==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2019년 7월 26일 (금) 14:24 판

스티브 첸(Steve Chen)
유튜브(YouTube)
쎄타(Theta)

스티브 첸(Steve Chen, 1978년 8월 18일 ~ )은 글로벌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Youtube)의 공동창업자 3명 중 한 명이다. 대만계 미국인이다. 중국어로는 천스쥔(陳士駿, 진사준, Chen Shijun, chén shì jùn)이라고 한다. 부인은 한국인 박지현(Jamie Chen)이다. 스티브 첸은 일론 머스크 등과 함께 페이팔(Paypal)에서 근무하다가 2005년 유튜브를 공동창업했고 이듬해 구글에 매각했다. 그는 대만의 리카이푸(李开复)가 창업한 시노베이션벤처스(Sinovation Ventures, 创新工场)의 주요 투자자이다. 미치 류(Mitch Liu)가 창업한 블록체인 기반의 동영상 서비스인 쎄타(Theta)의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약력

  • 1996년 ~ 1999년 일리노이대학교 어버너-섐페인 캠퍼스 중퇴
  • 2003년 12월 ~ 2005년 3월 eBay EM(Engineering Manager)
  • 1999년 11월 ~ 2005년 5월 PayPal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 2005년 6월 ~ 2006년 10월 Youtube 최고기술책임자(CTO) & 공동 창업자(Co-Founder)
  • 2006년 10월 ~ 2009년 1월 구글 Youtube
  • 2010년 5월 ~ 2014년 5월 AVOS Systems Inc. 공동 창업자(Co-Founder)
  • 2014년 5월 ~ 2018년 5월 구글 사내기업가(EIR)
  • 2014년 9월 ~ 2017년 4월 Nom Labs, Inc. 최고기술책임자(CTO)

수상

  • 2006년 6월 Business 2.0 50명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50 Most Influential People)"[1]
  • 2006년 11월 GQ "올해의 남성들(Men of the Year)"[2]
  • 2011년 5월 Asian Scientist Magazine "15인의 아시아 과학자"[3]
  • 2018년 The Lincoln Academy of Illinois "Order of Lincoln(최고 명예 훈장)"[4]
  • 2007년 타임지 "The 2007 Time 100"[5]

생애

스티브 첸은 1978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출생했다. 8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온 중국계 미국인이다. 영재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일리노이 수학과학 아케데미 출신으로, 일리노이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4학년을 중퇴하고, 온라인 결제 서비스 회사인 페이팔 초기 멤버로 입사하여 일론 머스크 등과 함께 일했다. 2005년 5월 페이팔 직장 동료인 채드 헐리(Chad Hurley)와 함께 페이팔을 퇴사하여,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유튜브(Youtube)를 공동창업했다. 디음해인 2006년 유튜브를 구글에 매각하고, 약 2,900억원 상당의 구글 주식을 받았다. 전 세계 IT 업계를 통틀어 학교를 중퇴하고 창업하여 억대 부자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마이크 델, 제리 양, 스티브 첸, 마크 저커버그 6명이다.

스티브 첸은 2007년 뇌종양이 발병하여 수술을 받았다. 그는 2007년 7월 23일 미국 CNN과 함께 유튜브를 이용한 민주당 대통령선거 공개토론을 진행하면서,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등 대통령 후보자들이 출연한 유튜브 방송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뇌종양이 발병하여 쓰러졌다. 그는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고 병원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이후 수차례의 발병이 더 있었고 그 때마다 정신을 잃었다. 그는 "성공의 정점에서 뇌종양에 걸린 것이 운명의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그는 1년 6개월의 투병 끝에 뇌종양 수술을 받아 완치에 성공했다.[6]

스티브 첸은 2008년 유튜브코리아(Youtube Korea)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구글코리아(Google Korea) 상품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던 박지현 씨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그는 딱 3번의 데이트를 한 후 바로 박지현 씨에게 청혼을 했다. 이들은 2010년 결혼식을 올린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다. 스티브 첸의 부인 박지현 씨는 1995년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고, 2000년 졸업 후 제일기획에서 광고 카피라이터로 근무하였다.[7] 그녀는 2007년 9월 제4회 대한민국 광고윤리대상 인쇄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박지현 씨는 2007년 구글코리아로 이직하여 상품 마케팅 매니저로 근무했고, 2008년 스티브 첸을 만나 2년간 교제 후 2010년 결혼했다. 박지현 씨는 결혼 후 남편 성을 따르는 관례에 따라 성명을 제이미 첸(Jamie Chen)으로 부르고 있다. 스티브 첸과 제이미 첸 부부는 2010년 7월 아들 제이든 첸(Jaden Chen)을 출산했다.[8]

페이팔

페이팔(PayPal)은 관리자 인원수를 대폭 줄이고 엔지어니가 주도하는 운영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어 따로 윤활유가 필요 없었다. 페이팔이 크게 성장하기 전, 스티브 첸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긴밀하게 협력하는 이곳의 업무방식을 좋아 했다. 새로운 기능이 생각날 때마다 주저 없이 디자이너들에게 제안했고 디자이너들은 그에 따라 설계 화면을 만들고 다시 엔지니어들과 의논했다. 이런 메카니즘 속에서는 어떤 새로운 기능도 3~4일이면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튜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첸,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은 모두 페이팔의 초기 멤버였다. 채드 헐리가 어떤 인터뷰에서 얘기 한 말이다. "페이팔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때 정말 많은 것은 느끼고 배웠습니다. 비즈니스 관련 학위가 없어도 전체 프로세스를 볼 수 있으니까요.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시작 단계의 회사가 하는 모든 일이 아주 의미 있음을 배웠습니다." 2002년 7월 페이팔이 상장된 지 다섯 달 후, 이베이(eBay)는 페이팔을 인수했다. 이 후 6개월 동안 최고경영자 맥스 레브친이 떠났고, 부회장 리드 호프먼도 떠났다. 이베이의 관리방식은 페이팔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스티브 첸은 그중에서 가장 판이했던 것은 엔지니어의 발언권이 없어졌고 단지 위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경영진이 개발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참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는, 혁신 없는 조직의 모습을 이베이에서 확인했다. 그토록 에너지가 넘치고 늘 떠들썩한 재미있는 회사였던 페이팔도 이베이에 인수되고 나서는 답답한 운영 방식의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2005년 초에 스티브 첸은 이베이를 떠난다.[9]

유튜브

2005년 봄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친구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모임이 끝난 후 함께 찍은 동영상을 공유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일이 전달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스티브 첸은 친구들과 직접 동영상 사이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는 창업의 시작을 이렇게 말한다. "모든 성공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어떤 엄청난 계기로 인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아이디어'나 '작은 필요'에 의해 '충동적'으로 시작되고 '지속적인 보완'과 '개선의 과정'을 거친다. 유튜브의 시작도 그랬다." 창업을 위해 스티브 첸을 비롯한 채드 헐리, 자웨드 카림이 뭉쳤다. 그와 자웨드는 엔지니어이므로 사이트 설립 초기에 필요한 개발 작업을 감당할 수 있고, 채드는 우수한 웹 디자이너로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업 후 한 달이 넘는 토론 끝에 그들은 3가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첫째, 누구나 동영상에 관심이 있다.
  • 둘째, 사이트는 이용하기 쉬워야 한다.
  • 셋째,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소셜 미디어 사이트에 이름을 붙여 주기로 했다. '유튜브'라는 이름은 완성되기 까지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유튜브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You는 모든 사람을, Tube는 TV를 의미한다. 두 단어를 함께 놓으면 모든 사람이 시청자이자 제작자라는 뜻이 되고 더 구체적으로는 ‘당신의 동영상 플랫폼’이란 뜻을 나타낸다.

2005년 2월 14일 ‘www.youtube.com’이라는 도메인을 샀고, 2005년 4월 23일 자웨드가 유튜브에 19초짜리 첫 번째 동영상 ’동물원에서‘를 올렸다.[9]

처음에 유튜브를 이용하는 사람은 창업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친구들은 동원해 사이트를 홍보하고 심지어는 선물 이벤트까지 벌였지만 실제로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변화가 생겼다. 사이트의 정의를 사용자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기면서 유튜브는 어느덧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이트가 되었다. 그러면서 2005년 6월에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사용자들이 다른 사이트에 유튜브의 콘텐츠를 얼마든지 퍼 나를 수 있게 한 것이다. 한동안 사람들은 유튜브의 '퍼 나르기' 기능이 자살 행위라고 평가했다. 사용자들이 유튜브에 로그인하지 않고도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커뮤니티는 유튜브의 명성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고 중요한 공짜 광고 수단이 되었다. 인터넷 세상에 전파되고 재생되는 동영상에 유튜브라는 마크와 링크 주소가 늘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영상을 보고, 전파하고, 퍼 나르고 싶다면 유튜브로 오세요'가 회사의 모토가 되었다.

유튜브는 독립된 품질평가 시스템을 아예 두지 않았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유튜브에서 테스트팀은 시간 낭비에 불과 했고, 결과물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원 간에 책임을 떠넘기는 빌 가 될 뿐이었다. 그 결과 직원 모두가 공동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주저 없이 말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2006년 10월, 유튜브는 16억 5000만 달러에 구글에 인수되었다. 당시에는 기업 구성원 모두가 매각을 찬성했다. 너무 지쳤기 때문이다. 유튜브 직원들은 매주 10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에 14시간을 일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진행 중이던 아시아, 유럽 시장 진출 등 일부 프로젝트가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막강한 데이터 센터가 필요했고 더 많은 대역망서버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했다. 스티브 첸은 자서전에서 구글에서 일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고 고백한다. "내 대학 성적으로는 전혀 가망 없는 일이었다. '구글맨'들은 대부분 하버드, 스탠퍼드, MIT, 카네기멜론 출신으로 박사 또는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유튜브맨'들은 대학 중퇴자가 대다수다. 우리는 구글에서 새삼 인생의 행운을 만끽했다." 그는 언론이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한 일을 '바가지를 썼다'고 표현한 것에 억울해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왜 그들은 모르는 걸까? 유튜브가 구글에 인수합병 될 때 기술 책임자가 4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그 4명이 세계에서 트래픽이 가장 많은 사이트를 구축하고 유지했다는 걸! 뿐만 아니라 직원이 80명도 안 되는 소기업이고 대부분 중퇴생들이지만 고학력자로 이루어진 구글 동영상팀을 제압했다는 걸!" 유튜브의 무대가 세계로 확장되면서 더 많은 사용자들이 몰려들었다.

2010년 5월에는 일일 검색 횟수가 20억 회를 넘어섰다. 유튜브의 하루 동영상 검색량은 미국 3대 방송국 서비스 분량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게 되었다.[9]

각주

  1. Business 2.0 Magazine staff, 〈The 50 people who matter now〉,《CNN》, 2006-06-21
  2. 이향휘 기자, 〈유튜브 창업자 올해 최고 리더에〉, 《매일경제》, 2006-12-08]
  3. Rebecca Lim, 〈The Ultimate List Of 15 Asian Scientists To Watch – Steven Shih〉, 《Asianscientist》, 2011-05-15
  4. Julie Kellner, 〈GOV. RAUNER ANNOUNCES LAUREATES OF 2018 ORDER OF LINCOLN AWARD〉, 《The Lincoln Academy of Illinois》, 2017-09-12
  5. Miles Beckett, 〈Chad Hurley & Steve Chen〉, 《Time》, 2007-05-03
  6. 김보영 기자, 〈스티브 첸 "뇌종양으로 죽을 고비 넘긴후 '내가 갈 길' 깨달아"〉, 《한국경제》, 2012-10-07
  7. 김동훈 기자, 〈유튜브 창업자 구글서 일하던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한국경제》, 2012-01-19
  8. LA일간플러스, 〈유튜브 창업자 부인 알고보니 한국인〉, 《중앙일보》, 2012-01-19
  9. 9.0 9.1 9.2 BIRDHAND, 〈스티브 첸의 유튜브 창업 스토리〉, 《BIRDHAND》, 2014-07-27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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