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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대다수가 열대기후이지만 고도차이가 나서 기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11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로서 비가 잦다. 짐바브웨 국토의 대다수가 고원 지대이고 이 고원에도 고도 차이가 나다보니 산 지대 인근에는 비가 많이 오는 경향이 나타나며 동쪽 지대에 그래도 비가 잦은 편이다. 짐바브웨는 전국이 사바나로 덮여 있고 이 나라의 별명은 '동물의 왕국'이다. 이렇게 짐바브웨가 동물의 왕국이다 보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국토의 대다수가 열대기후이지만 고도차이가 나서 기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11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로서 비가 잦다. 짐바브웨 국토의 대다수가 고원 지대이고 이 고원에도 고도 차이가 나다보니 산 지대 인근에는 비가 많이 오는 경향이 나타나며 동쪽 지대에 그래도 비가 잦은 편이다. 짐바브웨는 전국이 사바나로 덮여 있고 이 나라의 별명은 '동물의 왕국'이다. 이렇게 짐바브웨가 동물의 왕국이다 보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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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4일 (금) 01:45 판

짐바브웨 국기

짐바브웨(영어: Zimbabwe)또는 짐바브웨 공화국(영어: Republic of Zimbabwe)은 남아프리카의 내륙국으로, 잠베지강림포포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보츠와나, 잠비아, 그리고 모잠비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짐바브웨의 수도이자 최대도시는 하라레이며, 두번째로 큰 도시는 불라와요이다.

개요

  • 수도: 하라레
  • 면적: 390,757 km²
  • 인구: 15,092,171 명 (2021년)
  • 공용어: 영어
  • 정치체제: 공화제, 단일 국가, 일당우위정당제
  • 대통령: 에머슨 음낭가과

이름

"짐바브웨"라는 이름은 그레이트 짐바브웨 시대 당시 쓰였던 쇼나어 지명으로, 짐바브웨 남동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현재는 짐바브웨의 보호구역으로 지정된)를 일컬었던 것에서 기원한다. 많은 출처에 따르면 "짐바브웨"는 드짐바-드자-마브웨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쇼나어 중 카랑가 방언에서 "돌집들이 모여있는 곳" (드짐바는 "집"인 임바의 복수형; 마브웨는"돌"인 브웨의 복수형)으로 번역된다. 카랑가 방언을 사용하는 쇼나족은 아직도 그레이트 짐바브웨 지역에서 거주하는데, 이는 현재 짐바브웨의 마스빙고주 지역에 해당한다. 한편 고고학자 피터 가레이크는 "짐바브웨"는 드짐바-훼의 축약된 형태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쇼나어의 제즈루 방언으로 "공경받는 집들"을 의미하며, 보통 추장들의 집이나 무덤을 일컬었다고 전해진다.

짐바브웨는 남로디지아 (1898), 로디지아 (1965), 그리고 짐바브웨 로디지아 (1979)로 알려져 있었다. "짐바브웨"가 처음으로 국가를 지칭하는데 쓰인 것은 1960년 흑인 민족주의자 마이클 마웨마가 주조한 주화이며, 1961년 짐바브웨 국민당이 공식적으로 처음 짐바브웨라는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로디지아"는 19세기 말 짐바브웨 지역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게 한 세실 로즈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에게 그 기원과 함축된 의미가 부적절하다고 인식되었다.

마이클 마웨마에 따르면,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1960년 로디지아의 새 국명을 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는데,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마웨마의 "짐바브웨" 이전에 "마트쇼바나"와 "모노모타파" 등의 이름이 제의되었다고 한다. 한편 마타벨렐란드의 민족주의자들은 불라와요 남쪽의 마토포 구릉에서 유래한 "마토포스"를 제의하였다.

언제부터 짐바브웨가 국명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마이클 마웨마가 1961년에 쓴 기록에 "짐바브웨랜드"가 등장하였고, 1962년부터는 "짐바브웨"가 흑인 민족주의 운동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흑인 민족주의자 에디슨 즈보그고는 2001년 인터뷰에서 마웨마가 집회 도중 짐바브웨를 언급하였고, 그때부터 짐바브웨가 자연스레 널리 언급되었다고 회상하였다. 흑인 민족주의자 세력들은 1964년에서 1979년까지 이어진 제2차 짐바브웨 해방전쟁 당시 로디지아 정부에 대항하여 짐바브웨라는 국명을 계속하여 사용하였다. 전쟁 당시 주요한 단체는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ZANU, 1975년부터 로버트 무가베 지도)과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1960년대 초 설립부터 조슈아 은코모 지도) 등이 있다.

역사

식민지 이전

고고학적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짐바브웨 지역에 인류가 정착한 시기는 최소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정착한 집단은 화살촉과 동굴 벽화를 남긴 산족으로 알려져 있다. 약 2,000년 전 반투족의 대이동 시기에 반투어족 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농경민 집단이 현재의 짐바브웨 지역에 정착했다.

현재 쇼나어의 원어를 사용한 집단사회는 9세기에 림포포 강 중턱 지역에 처음으로 출현하였으나, 이후 짐바브웨의 고원지대로 이주하였다. 짐바브웨 고원지대는 이후 10세기에 쇼나족 국가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10세기 초에 인도양 연안지역에 아랍 상인들과의 교역이 발달하게 되면서, 11세기에 마붕구브웨 왕국이 발전하는데도 기여하였다. 마붕구브웨 왕국은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현재의 짐바브웨 지역을 장악한 여러 쇼나족 문명들의 선구국가 역할을 하였고, 현재 그레이트 짐바브웨, 마스빙고, 그리고 여러 소도시에 소재한 유적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마붕구브웨 왕국의 주요 유적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건석 건축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온 유럽인 탐험가들이 짐바브웨에 도착하였을 당시, 마붕구브웨 왕국은 짐바브웨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무역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였다. 짐바브웨의 무역국가들은 황금, 상아, 구리 등을 옷감과 유리로 물물교환하는 형태의 교역을 진행하였다.

1300년에서 1600년 사이 짐바브웨 왕국이 마붕구브웨 왕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짐바브웨 왕국은 마붕구브웨 왕국이 세워놓은 석조 문명을 정제하고 확장하여 현재의 그레이트 짐바브웨 유적을 남겼다. 이후 1450년에서 1760년 사이에 무타파 제국이 짐바브웨 지역을 장악하였다. 무타파 제국은 현재의 짐바브웨를 포함하여 모잠비크 중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무타파 제국은 므웨네 무타파, 모노모타파, 그리고 "문후무타파"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는데, 아랍인과 포트투갈인들에게 제국 내의 전략적 무역로로 잘 알려져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무역로를 독차지하기 위해 여러차례 전쟁을 일으켰고, 이는 17세기 초 무타파 제국을 몰락하게 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짐바브웨 지역 내에 유럽인의 영향력에 대응하여 새로운 쇼나족 국가가 출현하였는데, 바로 로즈비 제국 (1684-1834)이다. 로즈비 제국은 수세기 동안 군사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발전을 이루어내면서, 짐바브웨 고원에서 무력으로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하게 되었다. 로즈비 제국은 짐바브웨 왕국과 마붕구브웨의 석조 문명을 그대로 계승하는 동시에, 머스킷을 무장체계에 새롭게 도입하고 침략에 대비해 전문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1821년, 줄루족 출신의 장군 음질리카지 쿠말로가 줄루 왕국의 국왕 샤카에 봉기를 일으켜 자신만의 족벌, 은데벨레를 세운다. 은데벨레인들은 북쪽의 트란스발으로 진격하였으나, 진격 과정에서 지역이 크게 파괴되면서 이후 초토화되기까지 하였다. 1836년 보어인들이 트란스발 지역에 유입되기 시작하자, 은데벨레인들은 츠와나인들과 그리콰족들의 지원을 받아 더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1838년 은데벨레인들이 로즈비 제국을 포함한 여러 쇼나족 국가들을 정복하면서, 로즈비 제국은 은데벨레의 종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840년, 음질리카지와 은데벨레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을 잃게 되면서 현재의 짐바브웨 마타벨렐란드 지역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되면서, 불라와요를 수도로 건설하였다. 음질리카지는 은데벨레의 군사 조직을 연대 부락으로 정비하면서 이후 보어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음질리카지는 1868년에 격렬한 권력 투쟁 도중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인 로벤굴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식민지 시대와 로디지아

1880년대부터 세실 로즈의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와 함께 유럽 개척민들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로즈는 당시 은데벨레 국왕 로벤굴라에게서 광산 채굴권을 허가받았고, 이후 이 채굴권을 토대로 당시 영국 정부에게 마타벨렐란드와 마쇼날랜드 지배에 대한 칙허장을 요구하였다.

로즈는 1890년 영국 남아프리카 경찰 (British South Africa Police, BSAP)과 파이오니어 칼럼 (Pioneer Column, 유럽인들로 구성)을 마테벨렐란드와 마쇼날랜드에 파견, 솔즈버리 요새 (현재의 하라레)를 건설함으로써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이후 1893년과 1894년, 맥심 기관총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BSAP가 은데벨레와의 제1차 마테벨레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로즈는 이후 림포포강과 탕가니카호 사이를 가로지르는 "잠베시아" 지역을 점유하기 위해 추가적인 협상을 진행하였다.

이후 "잠베시아" 지역에 대한 권리가 여러 조약들을 통해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에게 이양되면서, 곧바로 유럽인들의 대규모 정착이 장려되었고, 해당 지역의 노동력, 귀금속, 그리고 기타 광물류에 대한 영국의 통제가 지속되었다.

1895년,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식민지 건설에 크게 기여한 세실 로즈를 기려 "로디지아"라고 새롭게 지역을 명명하였다. 1898년 잠베지 남부 지역을 공식적으로 "남로디지아"라고 명명하였으며, 이는 이후 다시 "짐바브웨"로 국명을 변경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잠베지 북부 지역은 별도의 관리를 받게 되며 북로디지아 (현재의 잠비아)로 명명되었다. 이후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세실 로즈가 개입한 제임슨 습격 (1895년 12월 - 1896년 1월)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은데벨레인들이 종교 지도자 믈리모를 중심으로 백인 정권에 대항하였다. 제2차 마타벨레 전쟁은 1896년 영국 측이 믈리모를 암살하며 마테벨렐란드에서 마무리되었다. 한편 쇼나족 세력은 1897년까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지배에 대항하며 몇차례의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몇차례의 소요 사태가 발생한 이후, 로즈 정부는 은데벨레인과 쇼나족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토지를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배분하였으며, 이를 위해 많은 토착민들을 원래 거주지에서 쫓아내었다.

영국은 남로디지아를 1923년 9월 12일에 합병하였다. 1923년 10월 1일, 새로운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선포된 남로디지아의 첫 헌법이 발효되었다.

남로디지아는 새로운 헌법 아래 1922년 실시한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대영 제국의 자치령이 되었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두번의 세계 대전에서 남로디지아는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들이 영국군에서 복무하였다. 남로디지아는 1차와 2차 세계 대전 기간 모두를 포함하여 대영제국에서 영국 본국을 포함해 가장 많은 1인당 기여도를 기록하였다.

1930년 제정된 토지 분배법은 흑인의 토지 소유권을 남로디지아의 일정 지역으로 제한하였고 소수의 백인들에게만 국토 대부분의 토지에 대한 매매를 허가하였다. 토지 분배법 제정은 곧바로 급격한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고, 이후 토지개혁이 빈번히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영국은 남로디지아와 북로디지아, 그리고 니아살랜드 (현재의 말라위)를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으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연방에서 점차 성장하는 아프리카 민족주의과 통합에 대한 반대에 부딪혀, 1963년 영국이 연방을 다시 3곳의 식민지로 분리하였다. 이후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에는 다인종 민주주의가 도입되었으나, 남로디지아에서는 계속하여 소수 백인 정권의 지배가 이어졌다.

1964년 10월 북로디지아가 잠비아로 독립하게 되면서,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전선 (Rhodesian Front, RF) 정권은 남로디지아에서 로디지아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스미스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인 "다수결의 결정이 없는 한 독립이 불허된다"에 효과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1965년 11월 11일 영국에 일방적 독립 선언 (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UDI)을 선포하였다. 이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이후 최초로 반란 세력에 의해 취해진 대영제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스미스와 로디지아 전선 정권은 미국의 전례를 이용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일방적 독립 선언 (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UDI) 이후, 영국 정부는 스미스 정권과 1966년과 1968년에 회담을 추진하였으나 별 성과 없이 끝나면서 유엔에 로디지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요청하였다. 1966년 12월 유엔이 이에 결의하면서 사상 최초로 자치 국가에 대한 강제적인 금수조치가 행해졌다. 이 조치는 1968년에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영국은 로디지아의 독립 선언을 반란 행위로 간주하였으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어떤 무력 조치도 행하지 않았다. 한편 조슈아 은코모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 (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ZAPU)과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은 공산 진영과 주변 아프리카 국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로디지아의 소수 백인 정권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ZAPU는 련,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쿠바의 지지를 받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였고, ZANU는 중화인민공화국과 협력하며 마오쩌둥 사상을 채택하였다. 스미스는 1969년 실시한 국민투표의 결과에 따라, 이듬해 로디지아를 공화국으로 선포하였으나,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잇따라 로디지아의 내부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고, 이후 스미스 정부가 공산주의자 세력들과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

로디지아 내부 합의 당시의 모습 (왼쪽부터 아벨 무조레와, 이언 스미스, 제레미아 치라우, 은다바닝기 싯홀). 1978년 3월, 스미스 정부는 아벨 무조레와 주교의 주도 하에 세명의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합의를 도출하였다. 무조레와는 다인종 참여 민주주의를 대가로 로디지아 내 백인 인구의 체재 유지에 대한 편의를 제의하였다. 합의의 결과로 1979년 4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아프리카 연합 국민 회의 (United African National Council, UANC)가 의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79년 6월 1일, UANC 대표 무조레와가 총리로 부임하면서 국명이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이전 정부와의 협의로 로디지아 보안군, 행정부, 사법부, 그리고 입법부의 1/3 의석에서의 기존 백인들의 공직을 유지하였다. 같은 해 6월 12일, 미국 상원이 로디지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데 결의하였다.

1979년 8월 1일에서 7일까지 잠비아 루사카에서 개최된 제5차 영연방 회원국 수뇌회담 (Commonwealth Heads of Government Meeting, CHOGM) 직후, 영국 정부는 무조레와, 무가베, 그리고 은코모를 런던의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열리는 헌법 회의에 초청하였다. 당시 회의의 목적은 독립 헌법의 조항에 대한 논의와 합의를 도출하고, 짐바브웨 로디지아가 영국으로부터의 합법적인 독립을 위해 영국 당국의 감시 하에 선거를 진행하는 것이였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피터 캐링턴이 함께 참여하면서 회의는 1979년 9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47차례의 총회로 계속되었다. 1979년 12월 21일, 모든 대표들이 랭커스터 하우스 협정에 조인하면서, 로디지아 내의 게릴라전이 종식되었다.

1979년 12월 11일, 로디지아 의회는 로디지아의 영국 식민지로의 회귀에 만장일치하였다. 법안은 이후 상원을 통과하고 대통령의 동의를 받았다. 1979년 12월 12일 오후 2시경 크리스토퍼 소임스 총독이 도착하면서, 영국은 짐바브웨 로디지아를 남로디지아 보호령으로 공식 발표하였으나, 12월 13일 소임스 총독이 자신의 임기 동안 로디지아와 짐바브웨 로디지아의 국명을 계속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12월 12일 영국이 로디지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였고, 유엔이 12월 16일 잇따라 제재를 해체하며, 12월 21일 유엔 회원국들에게 로디지아에 대한 제재 해제를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잠비아, 모잠비크, 탄자니아, 앙골라 그리고 보츠와나가 12월 22일과 23일에 제재를 해제하였고, 호주 정부는 12월 18일 경제 제재를 제외한 모든 제재를 해제, 12월 21일에는 경제 제재를 해제하였다.

1980년 2월 총선에서 로버트 무가베와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ZANU)이 압승하였다.[50] 찰스 영국 왕세자는 1980년 4월 하라레에서 열린 공식 행사에서 영국 대표로 참석하여, 새롭게 출범한 짐바브웨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독립 이후

짐바브웨의 독립 직후 카난 바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역할은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만을 담당하였다. 한편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합 (Zimbabe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 대표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이자 행정수반으로 부임하였다.

짐바브웨 마테벨렐란드 지역에서 무가베 정권의 출범을 쇼나족의 정권 탈취로 바라보게 되며 반정부주의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후 마타벨레란드 지역에서 은데벨레인들과 쇼나족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는 구쿠라훈디 (쇼나어: "봄비가 내리기 전에 일찍 겨를 씻어내는 비") 대학살로 이어졌다. 짐바브웨 총리가 직접 보고를 받으며 북한의 군사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인 짐바브웨 제5여단은 마타벨렐란드에 진입하여 수천명의 민간인들을 "반체제 인사"들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학살하였다.

5년 동안 지속된 구쿠라훈디 작전 동안 사망자 수가 3,750명에서 8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외의 또다른 수천명들이 군 수용소에서 고문받았다. 1987년 은코모와 무가베가 자신들의 정당을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 - 애국 전선 (ZANU-PF)으로 합당하는데 합의하며 공식적으로 구쿠라훈디가 종료되었다.

무가베와 ZANU-PF당은 1990년 3월 총선에서 120석 중 117석을 차지하였다.

1990년대부터 학생,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들이 무가베 정권과 ZANU-PF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며 시위가 잦아졌다. 1996년, 공무원, 간호사, 그리고 의사들이 봉급 문제로 파업을 시작했다. 잇따라 짐바브웨 국민의 전반적인 건강이 현저한 변화를 보였고; 1997년에는 전체 인구의 25%가 당시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HIV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토지 재분배 문제도 다시 한번 ZANU-PF 정권의 주요 국정 과제로 떠올랐다. 1980년대부터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해왔으나, 여전히 전체 인구의 0.6%가 짐바브웨 전체 농지의 70%를 차지하였다.

2000년, 무가베 정권은 토지를 소수 백인 인구에게서 대다수의 흑인 인구로 재분배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패스트트랙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백인 소유의 농지를 몰수하고, 가뭄이 지속되며, 외부금융과 기타 지원이 크게 감소하면서 짐바브웨의 주요한 수출품이었던 농산물의 생산량도 크게 감소하였다. 이후 58,000명의 흑인 영세 농부들이 황폐화된 농지를 소규모로 복구하여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003년, 짐바브웨의 경제가 붕괴되었다. 당시 짐바브웨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100만여명의 인구가 짐바브웨를 떠났다. 한편 짐바브웨에 남은 3/4의 인구는 하루에 미국 달러 $1보다도 적은 돈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지리

짐바브웨는 남아프리카에 자리잡은 내륙국이며 남쪽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서쪽으로 보츠와나, 북서쪽으로 잠비아, 동쪽으로 모잠비크와 접한다. 또한나미비아는 짐바브웨랑 서쪽에서 딱 한 부분 만난다. 북서쪽 국경은 잠베지 강으로 나뉜다. 짐바브웨의 가장 높은 곳은 냥가니 산(Mount Nyangani)이며 해발 2,592 m이다. 동쪽 부분에는 냥가니 국립 공원이 있다. 가장 낮은 곳은 룬데 강, 사베 강과 접한다. 빅토리아 호수는 가장 중요한 관광지이다. 강수가 불규칙적인 탓에 가뭄이 잦으며 폭풍과 같은 기상 피해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

기후

국토의 대다수가 열대기후이지만 고도차이가 나서 기후가 달라지기도 한다. 11월에서 3월까지가 우기로서 비가 잦다. 짐바브웨 국토의 대다수가 고원 지대이고 이 고원에도 고도 차이가 나다보니 산 지대 인근에는 비가 많이 오는 경향이 나타나며 동쪽 지대에 그래도 비가 잦은 편이다. 짐바브웨는 전국이 사바나로 덮여 있고 이 나라의 별명은 '동물의 왕국'이다. 이렇게 짐바브웨가 동물의 왕국이다 보니, 많은 동물학자들이 이곳을 찾는다.

짐바브웨 지도

아프리카 국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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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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