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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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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뗏목. 동강뗏목축제
페트병 뗏목.
기본적인 뗏목 얽기 출처: 핸드메이커 이진 기자

뗏목(raft)은 떼를 만들어 물에 띄워 운반하는 단순한 선박이다. 긴 삿대·· 등으로 움직이는데, 때로는 조류나 강물을 따라 목적지까지 스스로 떠내려가기도 한다.

뗏목은 겉보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제작 방법이 간단하고 물에도 생각보다 잘 뜨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인류가 사용해온 배이다. 지금도 시골이나 관광지, 혹은 문명과 떨어진 세상에서는 뗏목을 사용한다.

개요

뗏목은 나무, 대나무, 풀 등을 엮어 물에 띄우는 배이다. 혹은 강 상류에서 벌목한 나무를 엮어 하류의 제재소로 물에 띄워 내려보내는 것. 겉으로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만들기 쉽고 의외로 부양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어 완전한 형태의 배가 출현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이집트 문명에서는 파피루스를 엮어서 만든 풀뗏목을 사용했고 인도와 유럽에서는 독이나 항아리를 묶어서 뗏목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시 삼국유사를 보면 표공이 박을 이용해 바다를 건너왔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서는 수로를 통해 장사를 하고 공물을 운송하는 일이 많아 뗏목이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뗏목은 주로 목재로 만드는데 통나무, 대나무 등의 목재들을 덩굴, 철사, 밧줄 등을 이용해서 ①나무 끝에 구멍을 낸 다음 꿰거나 ②혹은 쇠를 박고 잡아매는 방법, ③매듭으로 묶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연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무의 굵기와 길이에 따라 궁궐떼·부동떼·가재목떼·화목떼·서까래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뗏목을 엮기 위한 매듭과 묶는 방법도 많다. 교각 얽기, 발판 얽기, 맞모금 얽기, 네모 얽기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각자 뗏목의 용도, 재료 등에 따라 방법을 달리 한다.

굴곡이 적고 흐름이 완만한 하천에서는 조종하기 쉽게 양쪽에 긴 나무를 대고 연결하고 너비 3m, 길이 10m 미만의 소형 뗏목을 만들지만 바다와 큰 강을 다니기 위해서는 더 큰 대형 뗏목을 만들어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 또한 장기간의 항해를 할 때는 노의 개수와 돛대도 중요해진다

현대에서는 또한 플라스틱 재료나 페트병을 이용해 뗏목을 만들기도 한다. 사람이 타고 다닐 수 있으려면 약 수백 개의 페트병을 사용해야 하는데 페트병의 부양력이 상당히 강해 나무에도 뒤지지 않고 가격도 저렴하다. 요즘은 서울과 영월군 등 여러 도시에서도 플라스틱 등으로 직접 만든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가장 원초적인 배지만 뗏목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핸드메이드가 중요시되는 현대에는 취미로도 다양한 뗏목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특수부대나 오지를 전문적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뗏목을 만드는 방법을 익힌다고 한다.[1]

한국의 뗏목 역사

우리 나라의 뗏목은 압록강두만강, 그리고 한강의 상류에서 띄워 내려보내는 것이 유명하였다. 압록강은 백두산 일대에서 신의주까지, 두만강은 무산 지역에서 회령까지, 한강은 강원도 일대의 임산자원을 옮기는 데에 이용되었다.특히 1908년 1월 26일 러시아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그리고 울릉도의 삼림벌채권을 넘겨받은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뗏목을 결빙기를 제외한 시기에 줄을 잇다시피 하여 띄웠으며, 1943년 수풍댐이 건설된 뒤에도 이곳에서 일단 해체하였다가 다시 띄워 내려보내기까지 하였다.

한편 물줄기가 남북으로 갈라진 한강의 경우, 뗏목에 의한 목재운반은 더욱 손쉬워서 태백산맥을 낀 인제지역의 목재는 북한강으로, 오대산을 낀 평창과 영월 등지의 목재는 남한강으로 운반하였다.그러나 이러한 뗏목에 의한 임산자원의 운반도 육로교통의 발달과 함께 차츰 줄어들었으며, 북한강 뗏목은 1943년 청평댐이 건설됨에 따라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강원도 인제 지역의 벌목·떼짓기·뗏목운전에 관한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나무를 베기 전 목상(木商)은 인부들의 안전을 위하여 산치성(山致誠)을 지낸다. 제(祭)의 절차나 제물 내용은 일반적 산신제와 비슷하나 소지(燒紙)는 올리지 않는다. 치성이 끝나면 으뜸 벌목꾼 한 사람이 제단에서 제일 가까운 데의 소나무 한그루를 도끼로 찍는다. 사람들은 이 주위에서 음복한다. 이곳에서는 벌목인부를 '산판꾼'이라 부르며 음력 10월에서 이듬해 2월 사이에 나무를 벤다.이 때에는 산에 눈이 쌓여 하산작업에 유리할 뿐 아니라 해빙기에 시작되는 뗏목 띄워내리기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길이는 6m, 끝머리 지름은 15㎝ 이상 되어야 한다. 나무는 운반의 편리를 위하여 산기슭에서 시작하여 위로 올라가면서 벤다.뗏목을 만드는 방법에는 첫째 칡덩굴이나 쇠줄로 연결하는 법, 둘째 나무 끝에 구멍을 뚫고 이에 나무덩굴이나 밧줄을 꿰어 연결하는 법, 셋째 쇠고리를 박고 이에 칡덩굴이나 밧줄 등으로 잡아매는 법 따위가 있다.

뗏목은 나무의 굵기나 길이의 정도에 따라 궁궐떼(길이 6m 이상, 지름 60∼90㎝ 이상)·부동떼(길이 6m 정도, 지름 15∼60㎝ 정도)·가재목떼(길이 3.6∼3.9m, 지름 12∼15㎝)로 나누며 이보다 더 작은 나무로는 화목떼와 서까래가 있다. 부동떼의 경우 제일 앞쪽에 띄우는 통나무는 25∼35개, 너비는 5∼9m, 길이는 6m 정도가 되는데 이를 '앞동가리'라 부르며 이어서 4개의 동가리를 더 붙여서 '한바닥'을 만든다. 뗏목은 언제나 이와 같이 닷 동가리를 한바닥으로 엮는다.

그런데 둘째 동가리에서부터 끝동가리까지는 엮는 나무의 수를 2, 3그루씩 줄여 나가서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한바닥은 보통 150∼200그루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2, 3명이 한바닥을 엮는 데에는 2, 3일 걸린다. 한편 두 동가리에서 닷 동가리까지는 서로 한몸이 되도록 튼튼하게 묶지만, 앞동가리만은 앞사공의 운전에 따라 좌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두 동가리 사이를 떼어서 연결한다.

앞동가리의 앞머리(나무의 뿌리 쪽)에는 노의 구실을 하는 '그레'를 걸기 위한 가위다리모양의 강다리를 세우며 이 밖에 삿대를 따로 갖춘다. 뗏목을 운전하는 사람은 앞사공 1, 2명, 뒷사공 1명인데, 인제 합강에서 춘천까지는 하룻길이었으나 춘천에서 서울까지는 일주일에서 보름이 걸렸다.

따라서 사공들은 떼 위에서 밥을 지어 먹었으며 해가 지면 뗏목을 버레(강가의 돌무지)에 매어두고 주막에서 묵었다. 뗏목에는 인제 부근에서 구운 옹기나 서울로 보내는 땔나무 따위도 실었는데 이를 '웃짐치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떼가 출발하기 직전에 강치성을 올렸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채나물 세 접시, 메(밥) 세 그릇, 포 한 개, 삼색실과, 소지용 한지 석 장(목상·앞사공·뒷사공 몫)을 마련하였으며 무꾸리쟁이가 이를 주관, 뗏목과 사공의 안전운행을 빌었다.뗏목이 떠날 때에는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며 여성은 뗏목 부근에 접근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공가(工價)는 인제에서 춘천까지는 5∼6원(당시 광목 1동 값)이었으며 춘천에서 서울까지는 30∼35원을 받았다(당시 쌀 한말 가격은 1원5전).

사공들은 뗏목을 운전하면서 강원도 아리랑조에 얹은 「뗏목아리랑」을 불렀다. 이 노래의 기본음률은 3·4조 내지 4·4조이며 모두 14연인데 한 연은 4행으로 짜여졌다.

각주

  1. 최상혁 기자, 〈뗏목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가장 원초적인 수공예 선박이다.〉, 《핸드메이커》, 2018-11-16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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