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는 동유럽의 내륙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러시아와 동쪽 및 남쪽 국경,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몰도바, 루마니아와 서쪽 국경, 벨라루스와 북쪽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키이우(Київ, Kyiv)이다.
개요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국가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해,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서쪽으로는 루마니아, 몰도바와 접한다. 키이우가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다. 동유럽 평원과 이어져 있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법적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고, 인구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만, 대부분 동부 인구(주로 동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 오데사 지역)는 러시아어 사용자이기도 하다. 주요 도시로는 키이우,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르비우, 오데사, 자포리자가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함에 따라 행정력이 크림반도(크름 반도이라고도 불린다)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중세 초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루스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투르크족·몽골족 등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까지 대다수 우크라이나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제 아래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 합병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 적용을 받으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의 구성국으로 존재했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
지하 자원이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산업으로는 석탄·철광·선철 생산에서 중요성 있다. 풍부한 수력 전기를 이용하여 기계 제조 공업·화학 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 공업 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 제조업, 화학 공업 중심은 돈바스·드니프로 주이며, 드니프로 강 하구에서 키이우 사이 6개 수력 발전소가 단계상(段階狀)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옥수수·보리·사탕무·해바라기·포도의 재배, 가축 사양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난한 크림 반도 남단과 광천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중요한 관광·보양지다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타라스 부리바〉 배경으로도 알려졌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를 쓰고, 우크라이나인 대다수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믿는다.
국가 상징
국호
- 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а (Ukrajína)
- 벨라루스어: Украі́на (Ukraína)
- 러시아어: Украи́на (Ukraína)
- 크림 타타르어·폴란드어: Ukraina
- 영어: Ukraine ([juːˈkreɪn])
- 에스페란토: Ukrainio·Ukrainujo
- 한자: 烏克蘭 (오극란)
우크라이나(Україна / Ukrajina)라는 국호는 고대 동슬라브어 표현인 Оукраина / Oukraina에서 유래하였다. 우(Оу)는 전치사에 해당되고 크라이(краи)는 땅 또는 변경, 경계를, 나(на)는 접미사에 해당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Україна와 함께 Вкраїна / Vkrajina로 표기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어에서 자음에 선행하는 В는 [v]가 아닌, [u̯] 발음이므로 Україна [ʊkrɐˈjinɐ]와 그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관계가 깊어 역사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지역 중심지를 소러시아(Малоросія)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소러시아 용어에 대해 자국을 러시아의 속령으로 지칭하는 러시아 제국주의적 단어로 여겨 매우 불쾌하게 여긴다.
우크라이나어의 크라이나(країна)는 러시아어의 크라이(край)와 같은 어원을 가진다. 동슬라브 계통의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로 국가, 땅, 영토,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연해주라는 의역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지방도 원어는 프리모르스키 크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다. 크라이가 러시아 내부 일개 주(행정구역)에 대응하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크라이나를 '변방, 끝자락' 등의 의미로 해석해 우크라이나를 '변방에 있는 나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름의 이런 어감도 일부 러시아인들이 우크라이나가 나라가 아닌 일개 지방이라고 해석하는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의 민족·나라 이름을 '변방'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싫어하며, 크라이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 반박한다.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가 몽골 제국에 멸망한 이후에는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스텝과 농경지대,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의 경계이기도 했고 이후로도 오랜 기간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폴란드어(서슬라브) 및 구 유고권(남슬라브)[2]도 슬라브 슬라브어 계통이기 때문에 똑같이 우크라이나라는 표현을 '주변 땅'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이 같은 경계의 땅에서 삶을 영위해나간 공동체인 카자크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수도 키이우 및 우크라이나의 국장에서 알 수 있듯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고 키예프 루스를 자국의 모태 국가로 보지만, 키예프 공국 시절 영토와 비교하면 우크라이나 지역은 상당히 남쪽에 있다. 또 그 바탕 민족이 바이킹의 일파인 바랑인과 루스인이기 때문에 같은 루스 국가인 러시아, 벨라루스도 이 키예프 루스를 공통조상으로 삼고 있으며 이들도 키예프 루스를 모태로 본다. 때문에 예전에는 우크라이나인들 본인들을 우크라이나 루스(Україна русь)로 부르기도 했다.
국기
우크라이나 국기는 청색과 황색이 가로로 결합된 이색기이다. 우크라이나 헌법 제 20조에 따라 국기로 규정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흔히 '조우토블라키트니 프라포르(Жовто-блакитний прапор, 황색-청색기)'라고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다. 황색-청색기라고는 하지만 실제 국기의 색깔 배열은 위에서부터 청색-황색인데, 실제로 황색-청색 도안도 비공식적으로 쓰였던 역사가 있다.
이 깃발의 역사적 연원은 12세기에 우크라이나에 있던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에서 청색/황색 조합 국기를 쓴 것이다. 현재의 이색기 형태는 르비우에서 1848년 혁명의 영향으로 봉기가 일어났을 때 쓰인 것이 최초이며, 1918년에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생겨나면서 이 이색기 형태를 공식 국기로 채택했다.
국기에 담긴 청색과 황색의 의미에는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청색이 물을 상징하고 황색이 불을 상징한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청색이 하늘, 황색이 초원의 다 자란 밀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원의 밀과 하늘이 담긴 풍경을 보면 두 번째 설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일 켐니츠 시기와 비슷하나 비율이 조금 다르다.
국장
1992년 2월 19일부터 최고 라다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1996년 우크라이나 헌법을 통해 공식 국장으로 지정되었다.
문장의 유래는 키예프 루스인데 당시 루스의 지배가문이었던 류리크 왕조의 인장이었으며, 스뱌토슬라프 1세가 처음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고정되지 않고 대공마다 모두 그 형태가 달랐다. 현 우크라이나의 국장은 각 대공들의 인장 중에서도 블라디미르 1세의 인장에서 본떴다. 공식적으로 칭하는 명칭은 작은 우크라이나 국장(Малий герб України)이며, 현지에서는 트리주브(Тризуб/삼지창)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명칭이 작은 국장이니만큼 큰 국장도 있는데, 이건 헌법 상으로만 존재하고 현재는 아직 논의중에 있다. 일단 헌법 상으로는 총든 코자크(Козак з мушкетом)[18]와 갈리치아-볼히니아의 유리 1세의 인장인 루스 사자(Руський лев), 그리고 위 삼지창이 모두 들어간 문장이어야 한다. 갈리치아-볼히니아와 코자크 헤트만국은 중세와 근세에 우크라이나인 정체성의 기원이 되는 국가이기에 각각 우크라이나의 중세, 근세를 상징하는 문양인 셈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시절부터 논의되어 온 것으로, 당시에도 작은 문장과 큰 문장이 분리되어 있었고 현재도 이를 따라서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아직 공식 문장이 나오지는 않은 것.
이 문장은 의지나 자유를 뜻하는 우크라이나어 단어인 'воля'를 이루는 각 글자를 조합하여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в(v)는 왼쪽 창 끝, о(o)는 문장의 중심 쪽의 둥근 모양, л(l)는 가운데 창 끝, я(ya)는 오른쪽 창 끝으로 나타내어 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국가는 'Ще не вмерла Українa(우크라이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이다.
이 곡은 우크라이나의 민속학자인 파울로 추빈스키(Павло Платонович Чубинський, 1839년 1월 27일 ~ 1884년 1월 29일)가 1862년 발표한 시에 음악가 미하일로 베르비츠키(Михайло Михайлович Вербицький, 1815년 3월 4일 ~ 1870년 12월 8일)[1]가 1863년 곡을 붙이면서 탄생되었다. 추빈스키는 당시 불어닥치던 슬라브 민족주의에 영감을 받아 시를 써내려 갔다고 한다.
추빈스키의 시는 쓰자마자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1년 뒤인 1863년 르비우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잡지인 메타(Мета)에 실렸다. 곧바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이 시는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이에 신부였던 베르비츠키는 시에 어울리는 곡을 만들기로 결심하였고 1864년 리비우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1865년 추빈스키의 시에 베르비츠키의 곡을 붙인 악보가 발간되면서 우크라이나의 국가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당연히 당시 우크라이나를 다스리던 러시아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이 노래를 심히 불편해하셨다. 곡을 작사한 추빈스키는 1862년 10월 "농민들에게 부정적 사고를 퍼뜨린다."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추방되어 7년 동안 유배되는 등 고생을 하다 말년에는 경제적으로도 파산하는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884년 사망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이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였고 때문에 이 노래는 우크라이나 본토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4]에서 유행하였다.
처음 국가로 제정된 것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7-1920) 시기였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외에도 단명한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1918-1919), 1939년 잠시 수립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이 곡을 국가로 사용했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결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이 곡은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자신만의 국가를 가질 수는 있었으나 이 곡은 민족주의와 분리주의를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으며 파울로 티치나(Павло Григорович Тичина, 1891년 2월 23일 ~ 1967년 9월 16일)가 작사하고 안톤 레베디네츠(Антон Дмитрович Лебединець, 1895년 1월 7일 ~ 1979년 3월 17일)가 작곡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Державний Гімн Української Радянської Соціалістичної Республіки)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내건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으로 해금되었으며, 이듬해인 1990년 4월 9일 해금된 이후 처음으로 공식 연주가 되었다. 당시 연주 영상. 본래 쓰이던 국가로 환원된 것은 독립 직후인 1992년 1월 15일의 일이었다.
본래는 3절까지 가창하였으나, 2003년 3월 6일부터 1절만 가창하고 있으며, 가사가 일부 변경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3년 이전 가사를 훨씬 더 많이 쓰고 있다.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단조로 된 국가 중 하나이다. 단조로 된 국가를 쓰는 다른 나라로는 튀르키예,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이스라엘, 카자흐스탄, 몬테네그로 등이 있다. 또한 과거 대한제국의 국가였던 대한제국 애국가도 단조로 되어 있었다.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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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면적 603,700km²에 576,700km²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제외시) 해안선 길이는 2,782km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44번째로 큰 국가(중앙아프리카 공화국보다는 작고, 마다가스카르보다는 크다.)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중심이 우크라이나 서쪽의 라키브 마을 인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의 지리적 중심을 보는 관점에 대해 논쟁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평원, 스텝, 고원이 있으며, 그들을 지나가는 강이 흑해로 흘러들어간다. 거의 남쪽 만으로 강이 빠져나가고 남동부 지방에는 다뉴브 삼각지가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산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베를라 산으로 높이는 2,061m이다. 크림 반도를 따라서 넓은 해안선이 펼쳐진다.
우크라이나에 분포하고 있는 초르노젬(흑토) 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아스팔트, 무연탄, 철, 망가니즈, 크롬, 타이타늄, 납, 아연, 알루미늄, 수은, 니켈, 천연 가스, 석유 등 70여 가지의 종류에 달하는 천연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 위치 : 위도 44”20’-52”20’, 경도 22”5’-41”15’
- - 남북 연장 : 893km, 동서 연장 : 1,316km
○ 면적 : 603,500km²(한반도의 약 3.5배)
- - 국경선 길이 : 4,566km, 해안선 길이 : 2,787km
- - 유럽 대륙의 5.7%, 전세계 육지면적의 0.44% 차지
- - 국경 인접국
- · 서쪽 :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 · 북동쪽 : 러시아
- · 남서쪽 : 몰도바, 루마니아
- · 북쪽 : 벨라루스
- - 흑해와 아조프해 접경국 : 터키, 불가리아, 조지아
○ 지형 : 국토의 95%가 평지
- - 국토의 80%가 경작 가능 지역이며 이중 60%가 비옥한 흑토 지대(전 세계 흑토의 25%에 해당)
- - 서부의 카르파티야 산맥, 크림 반도 등 일부는 산악지대(최고높이 2,061m)
- - 드니프로(Dnipro) 강은 유럽에서 세번째로 긴 강
- ○ 천연자원 : 철광석, 망간, 우라늄, 석탄, 천연가스, 원유, 리튬, 니켈, 코발트, 소금, 유황, 흑연, 티타늄
기후
○ 기후 일반
- -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
- - 남부 크림 반도는 지중해/아열대성 기후
- - 남서부의 카르파티야 지역은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이 우기
○ 평균기온
- - 겨울 : -5--10℃(남부지역은 0℃)
- - 여름 : +15-26℃(최고기온은 39℃)
전체적으로 냉대 습윤 기후를 보이며, 수도인 키이우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보다는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좀 더 춥다. 하지만 남부 크림 반도는 온난 습윤 기후를 나타낸다. 그리고 키이우는 위도 50도에 위치 위도 37.5도에 위치한 서울보다 한참 북쪽에 있다. 다만 겨울이 길고 일교차가 적어 낮기온이 낮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기 쉬우며, 실제로 러시아와 접경하는 동부는 강원도 내륙과 비슷하게 춥다.
역사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소비에트 시절에는 크게 두 개의 역사학파가 주도하였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동슬라브족으로 묶고 동슬라브족을 러시아와 일치해 해석하려는 학파와 우크라이나의 존재 목표를 소비에트 통합으로 해석하려던 학파이다. 하지만 현대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두 학파는 사라지고 우크라이나의 발전 과정을 러시아와 구별되어 생각하는 학파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의 발전 과정을 러시아와 구별시켜 보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사료편찬, 역사기술을 서구식 방법인 영토접근법(Territorial approach)으로 사용하여 우크라이나 영토에 존재했던 모든 사건과 그 지역을 거쳐 간 모든 종족, 민족을 우크라이나 역사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영토접근법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역사학부 마고시(Paul Magocsi)교수가 창조하여 주로 사용하던 방법으로서 현대 중국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며 국가의 민족주의화를 위한 역사적 접근 방법이다. 이러한 영토적 접근 방법은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키메르족, 트리필리안, 스키타이인, 사마르티안 등 루스인 이전의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던 종족들을 우크라이나 조상으로 포함시키게 된다.
고대
기원전
우크라이나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 기원전 5000년 경부터이며, 기원전 10세기부터는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과 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트인이 각각 우크라이나에 진출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우크라이나에 들어왔지만, 7세기부터는 동유럽 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동슬라브족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동, 서, 남의 많은 여러 슬라브 원주민들 중 동슬라브족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 민족들의 지배를 받고 튀르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슬라브인들은 5세기부터 투르크 민족 국가인 사바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후에는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나중에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초기 국가인 루스 카간국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자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있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튀르크의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중앙아시아 튀르크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족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족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족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동슬라브족은 튀르크족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튀르크족의 동슬라브족 지배에 의한 투르크화의 영향력으로 동슬라브족 문화는 서유럽 문화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됐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북부와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동슬라브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대 동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삼림 지대에서 소박한 농경 생활을 보내고 있던 동슬라브족의 서쪽에는 발트어파에 속한 발트족, 동쪽이나 북쪽에는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 핀족들이 그들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남쪽의 흑해 북해안의 스텝은 유목화된 동슬라브족들이 거주했다. 이윽고 이 지역의 동슬라브족들은 튀르크인들의 지배로 투르크어족에 동화되었고, 돌궐의 대제국이 붕괴한 다음은 볼가 강의 하류에서 튀르크족의 정복에 의해 하자르 한국에 정복당하였다.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족의 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노르만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 해·북해의 교역에 종사한 노르만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슬라브족 사람들은 노르만인과 튀르크 하자르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중세
키예프 루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의 원형인 키예프 루스는 882년 노브고로드의 2대 공작인 올레그 베시가 키이우를 점령한 후 형성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는 키예프 루스의 남부 지방이었다. 키예프 루스와 류리크 왕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루스인들이 세웠으며 이들은 동슬라브인들에게 흡수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였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류리크 왕조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이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으로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정복되었다.
근대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카자크 수장국이 세워져 백년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압력을 견뎠으나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 1920년에는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1932년~1933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를 침공,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독일군과 추축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적군을 쳐부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 여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하였다. 마을 전체를 태워 없애기도 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처럼 포악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여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끔찍한 시기였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고(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매우 컸다.
현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의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러시아 차르국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할양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 간의 분쟁 소지가 된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의 혼란 속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기는 스텝 지방의 금빛 밀밭 위 푸른 하늘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청색과 황색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전통적으로 깃발에 많이 쓰던 색이다.
2005년 1월에 빅토르 유시첸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율리아 티모셴코는 2, 3차례나 총리로 선출되었다.
2010년 2월 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실시 되었을 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율리아 티모셴코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 7월 4일에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러시아어를 지역공용어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하고 준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러시아어를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났다. 그리고 2012년 8월 8일에 야누코비치가 동남부에서 러시아어를 공식언어로 하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러시아어는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공식언어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총선을 치른지 2주만인 2012년 11월 11일에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우크라이나는 2013년에 EU와의 협정이 무산되자 친EU시위가 발생되었고, 시위진압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되었다. 2013년 12월 8일에는 반정부 시위대에 의해 레닌상이 철거되었다.
유로마이단 시위가 발생한 결과, 친러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망하였다. 이로 인해서 친러 성향이 강했던 크림 반도의 크림 자치 공화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선언과 함께 러시아로의 편입을 추진하였으며, 그 후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2014년 3월 18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다.
유럽 연합과 미국 등 서방 진영은 이 합병을 불법으로 간주하였으며,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였다. 또한,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주는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국제 사회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독립 결정을 승인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인정하지 않으며, 돈바스 지역을 비롯한 동부 지방에 대해선 강력한 군사적 행동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에도, 미국과 유럽 연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경계하고 있으며, 결국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정치
우크라이나는 입법, 사법, 행정 등 3권이 분리된 의회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통령은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 중임제인데, 1번의 중임이 가능해 최대 임기는 10년이다. 대통령이 총리와 내각을 지명하는데,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야당이 의회가 절대다수일 경우 총리가 대신 권력을 독점한다.
의회
우크라이나 의회는 단원제 최고회의(Verkhovna Rada)이며, 총 450석 중 225석은 전체 유권자의 4% 이상 지지를 얻은 정당에게 비례로 배정된다. 나머지 225석은 선거구에서 직접선거로 결정된다. 모든 의원들의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총리를 뽑고, 법률을 발의하고, 국제 협정을 비준하며 예산안을 승인한다. 2020년 6월 현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정렬은 2019년 7월 21일 총선거의 결과 순).
- 국회(최고회의)구성
- 인민의 종 254석, 43.16%
- 인생을 위한 야권연단 43석, 13.05%
- 전우크라이나 연합 "조국" 26석, 8.18%
- 유럽연대 25석, 8.10%
- 목소리 20석, 5.82%
행정부
-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 총리: 데니스 시미할
- 제1부총리
- 부총리
- 디지털전환부
- 내무부
- 외무부
- 보훈부
- 청소년체육부
- 커뮤니티지역인프라정책부: 기존의 인프라부와 커뮤니티지역개발부(Ministry of Communities and Territories Development)를 통합해 출범했다. 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와 유사한 부서이다.
- 사회정책부
- 법무부
- 국방부
- 보건부
- 교육과학부
- 에너지부
- 환경보호천연자원부
- 농림식품부
- 문화정보정책부
- 내각장관부: 일본의 내각관방과 비슷한 기구가 있다.
- 일시점령지역재통합부: 러시아 점령을 받았던 지역에 대한 사회 통합(민사작전)을 지휘하는 부서.
입법부
우크라이나의 입법부는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이다. 선거는 라다 의원 총 424명을 뽑는다. 원래 225명 지역구별 소선거구제를 통해 선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2014년 크림 사태, 돈바스 전쟁 이후에 26개 선거구를 제외한 199개 선거구에서 선출한다. 비례대표는 225명을 선출하며 봉쇄조항 5%이며, 전국단위 구속명부식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로 치루고 있다.
특징
크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까지는 내부 갈등이 심한 막장이었으나 러시아의 참공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내부 결속력이 매우 강해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오랜 기간동안 정치 갈등이 매우 심한 나라로 꼽혀왔다. 이로 인하여 우크라이나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낮은 민주주의 지수를 기록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경우 소련 독립후에 야당과 여당에는 오랜 불타협의 역사가 있으며 지금도 여당과 야당, 정부와 의회 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하다. 그들은 티비와 신문을 통해 대단한 네가티브 전략을 사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폭력 사건까지 흔하게 일어난다. 특히 친러시아계를 우크라이나 의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친서방파 의원들이 대립각을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 역사가 길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정치에서 통치방식이나 대화와 타협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으며, 정쟁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국가분열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여파로 국회 공성전이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국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도 정부와 국회에 대한 불신이 매우 크다.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오렌지 혁명의 율리야 티모셴코를 이기자 기존의 율리야 티모셴코는 친유럽 정책을 펼쳤지만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2019년 4월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코미디언 출신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당선되었다. 특이점은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 일대, 재외국민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 이겼다. 이는 친러나 친서방을 떠나 우크라이나인들에게서 기성정치에 대한 반감이 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도망치지 않고 키이우에 남아 항전하며 우크라이나인들이 단결하기 시작하고, 러시아군이 점령지 각지에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름에 따라 아예 러시아로 넘어가버린 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우크라이나인들이 전례없이 단결하며 새로운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을 만들고 있다.
정치사건
- 2004년 오렌지 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반정부시위이다. 레오니드 쿠치마가 임기만료에 따라 물러나면서 치르게 된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은 쿠치마의 후계자 격인 여당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Віктор Янукович)와 그에 맞서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Віктор Ющенко) 간의 맞대결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쿠치마는 이미 레임덕에 시달렸지만 야누코비치가 총리직을 지내면서 동부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며 공산당 지지층을 뺐어오는데 성공했고, 유센코도 2002년 총선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등극한 상태였다.
대선을 두달 반 정도 남겨둔 2004년 9월 5일, 유셴코 후보는 독살을 당할 뻔했다. 사건 후 유셴코의 혈액에서는 기준치의 1천 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었다. 이 암살기도는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이고르 스메쉬코 전 국장, 블라디미르 사추우크 전 차장과 식사를 한 후 일어난 것이었으며,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는 우크라이나 보안국이나 러시아 측에서 친러파 후보인 야누코비치를 당선시키기 위해 음식에 다이옥신을 집어넣었을 것이란 의혹을 받았다. 구사일생으로 유셴코는 목숨을 건졌다. 결국 2004년 11월 대선 결선투표 결과는 야누코비치가 49.53%, 유셴코가 46.6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되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지만 유셴코와 러닝메이트인 율리야 티모셴코 지지자들은 투표에서 대규모 선거 부정 사례를 입수했다. 이에 키이우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우크라이나 대법원과 중앙선거위원회가 개입한 끝에 재투표를 거쳐 유셴코가 51.99%라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승리했다.
- 유로마이단 혁명
2013년 11월 21일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反독재 혁명. 2013년 11월 21일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시 진행 중이던 EU 가입 논의를 전면 중단하고 친러 정책을 천명한 것에 반대하여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대적인 시위가 유로마이단 혁명의 시발점이다.
시위 군중들에게 실탄을 발포하는 등 야누코비치 정부의 폭동적 시위진압과 이에 자극 받은 시위대의 봉기로 시위는 유혈 사태로까지 격화되었다. 여기에 야누코비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파괴하고 경찰의 범죄행위를 대놓고 합법화하는 반시위법 패키지를 입법 절차를 무시해가며 날치기로 통과시켰다[2]. 2014년 2월 경찰은 자동소총과 저격총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3] 이때를 기점으로 민중들의 목적이 친러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에서 독재정권의 축출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혁명으로 급변했다. 결국 야누코비치와 그 측근들이 키이우에서 러시아로 야반도주 하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독재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모든 의원의 만장일치 표결에 따라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는 야누코비치를 탄핵하고 새로운 과도정권을 수립하였다.
친서방 정책에 회의적인 지역들에서도 야누코비치는 이미 지지를 잃어버렸기에 대부분의 지자체와 군경은 과도정부를 인정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속국으로 여겨온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세력권을 이탈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2013년에 야누코비치의 무능한 대처를 보고 실망한 러시아는 친러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직접적인 개입과 하이브리드 전쟁을 통하여 '말 안 듣는' 우크라이나 민주정부를 뒤엎기로 결정했다. 이후 일어난 2014년 크림 위기로 러시아는 자신감을 얻었으나, 뜻대로 풀리지 않은 돈바스 전쟁은 결국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치명적인 자충수로 이어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으로 시작되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전면전으로 돌입하게 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벌어지는 전쟁. 신냉전의 일부로, 줄여서 러우전쟁 또는 우러전쟁으로도 불린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특별 군사작전 개시 명령을 선언한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이자 21세기 첫번째의 유럽 국가 간 전쟁이다.
러시아 정부는 해당 전쟁이 공식적으로는 전쟁이 아니라 단지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입장이다. 추후 러시아가 계엄령 또는 국가 총동원령 선포를 통해 공식적인 전쟁으로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2024년 임기가 만료되는 푸틴이 종신집권을 위한 치적을 쌓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병합해 러시아의 지정학적 입지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개시한 전쟁이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
외교
우크라이나는 루마니아, 몰도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주변국들과는 하나같이 사이가 좋지 않다. 물론 러시아에 비하면 나은 편이며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이들과의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들을 괴롭혀온 폴란드, 헝가리는 말할 것도 없고 루마니아, 몰도바와도 정치적인 문제와 영토 분쟁이 있다. 슬로바키아와도 갈등이 있지만 그나마 나은 상태이다.
대외정책 기조
2014년 2월 마이단 혁명(親서방 반정부 시민운동)이 성공하여 親서방정권이 들어선 이후, 기존의 親러 및 親CIS 정책을 폐기하고, 反러 및 親서방 정책기조로 근본적으로 변화(對EU 통합, 對NATO 가입 추진 등)
대서방 정책
○ 對EU 통합, 對NATO 가입 추진 노력
- - EU와 제휴협정(Association Agreement) 체결(2014.6.27.) 및 예비발효 과정을 거쳐 완전 발효(2017. 9. 1.)
- - EU와의 포괄적 자유무역협정(DCFTA) 발효(2016. 1. 1.)
- - EU와의 단기 무비자 사증면제협정 발효(2017. 6. 11.)
- - 對EU, 對NATO 가입 목표를 "대외정책노선에 관한 법률" 개정시 반영(2017.6월)
- - "우크라이나 민족의 유럽정체성과 우크라이나의 對유럽, 對유로/대서양 통합 정책의 불가역성 확인" 및 "우크라이나의 EU, NATO 정회원국 지위 획득 전략 이행"을 헌법 전문에 명시하기 위한 개헌(2018.12월)
○ 對美 우호 · 협력 관계 추구
- - 우크라이나는 對EU 통합, 對NATO 가입 추진 등 親서방 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지지확보를 추구하면서, 미국과 고위인사교류, 군사교류확대, 각종 경제원조 수령 등 실리 추구
- - 미국은 2014-18간 우크라이나에 약 40억불에 이르는 경제적 · 인도적 · 군사적 원조 제공
대러시아 정책
○ 2014.2월 마이단혁명 성공 및 친서방정권 등장 이후 對러 관계 급속 냉각
○ 정치/군사/정보/인적교류 등 각종 對러 우호협력조약/협정을 종료/중단
- - 2014.1월-2018.11월간 총 48개 조약/협정을 종료 또는 중단
○ 항공노선 중단 및 인적교류 감소
- - 우크라이나 정부가 러시아의 크림반도 점령(2014.3월) 및 동부 Donbas 반군 지원에 관련된 러시아측 개인/단체들에 대한 제재령을 발표하자(2015.9월), 러시아정부는 우크라이나 항공사에 대한 러시아 영공통과 불허방침을 발표하고, 이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자국 항공사에 對러시아 항공노선 중단조치를 취하여 (2015.10월), 러시아-우크라이나간 직항 노선 부재 상태 지속
-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러시아측 개인/단체들에 대한 일련의 제재령 발동에 대응, 우크라이나측 개인/단체들에 대한 경제제재령(개인 322명, 법인 68개 제제 리스트) 발표 (2018. 11. 1.)
- - 양국간 철도/버스 노선은 운영되고 있으나, 이용 승객수가 계속 감소하여, 2017년 양국을 오가는 철도 승객수는 2013년 대비 20% 수준으로 감소
○ 對러시아 경제의존도 급감
-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최대 무역상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나, 對러 무역액 및 비중은 대폭 감소
- - 우크라이나의 대외수출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수입액은 2013년 151억불(전첵 금액의 24.7%)에서 2017년 39억불(8.5%)로 격감하였고, 수입액도 2013년 232억불(23.2%)에서2017년 72억불(14.3%)로 격감
- -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수출도 2013년 러시아가 제3위 대상국이었으나, 2017년에는 對러 농산물 직접수출 전무
- - 우크라이나의 천연가스 수입은 2013년 총 수입량 대비 對러 수입량이 92%에 달했으나, 2017년에는 對러 직접 수입량이 전무하고, 유럽 국가를 통해 러시아산 가스를 일부 간접 수입중
○ 러시아의 對우크라이나 경제제재
-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反러정책에 대응, 2016.1월부터 對우크라이나 경제제재시행
- - 우크라이나와의 FTA 관계 폐기, 우크라이나산 식료품 금수 조치, 러시아 영토를 경유하는 對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내륙 운송 금지
- -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흐스탄으로 내륙운송을 통한 수출희망시 벨라루스를 통해서만 이동이 가능토록 조치
- - 6개월 단위로 동 경제제재 조치를 연장
우크라이나는 이웃 국가 러시아와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좋지 않았으며, 몽골 제국 점령기 이후에 민족이 갈라졌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으며, 러시아가 나중에 우크라이나를 강제로 병합하여 수백년간 자국의 영토에 흡수하였으며, 1922년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SSR이 되고 말았으며, 해방이 된 1991년 이후에, 협상 아래에 독립국가연합에 가입 했으나, 결국 관계 악화로 단체를 탈퇴하고 말았다. 양국이 여러번 함께 가스 협상을 여러번 치루었으나, 협상이 결렬 된적도 있었다. 자국의 동서 갈등이 충돌한 2013년에 이후에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EU가 재협상을 연기하는 동시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유로마이단 사태와 남동부에서 일어나는 사태의 영향으로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하여, 국교가 단절되었으며,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이르고 있다.
CIS와의 관계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함께 CIS 창설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2014년 이후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CIS와의 관계 단절(2018. 5. 19. 모든 CIS 관련기관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부 철수)
○ 舊소련연방 구성국들이 창설한 CIS는 EU와 같은 통합을 목표로 출발했으나, 러시아 패권 주의에 대한 회원국들의 우려, 2008.8월 러-조지아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신뢰 하락, 러 국내경제의 어려움 지속 등으로 인해 그 발전은 난망
민스크 휴전 합의 경과 및 전망
○ 제1차 민스크 휴전 의정서 체결(2014.9월)
- - 민스크접촉그룹회의(우크라이나/러시아/OSCE/반군세력 참여)에서 휴전 의정서(protocol) 서명 및 발효(△교전중단 △협상참가자 안전보장 △국경 10km 완충지대 설치 △중화기 철수 △휴전감시 △포로석방/교환 등 포함)
- - 민스크 개최 제3차 접촉그룹회담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각각 전선에서 15km씩 물러나 총 30km의 완충지대 설치 합의(9. 19.)
- 우크라이나정부는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 대규모 자치를 허용하는 지방분권화 특별지위법 채택(2014. 9. 16.)
○ 제2차 민스크 휴전 합의(2015.2월)
- - 우크라이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정상들간 합의(△2. 15. 교전 중단 △중화기 철수 △외국군대/군사장비 철수와 OSCE 모니터링 △우크라이나법 및 동부특별지위법에 의한 지방선거 실시 △포로석방/교환 △국경통제 △돈바스지역 사회 및 경제관계 복원 등)
- - 동 합의 발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및 반군들은 일부 거점에 대한 공세를 강화함에 따라 정부군은 2. 18. 교통/전략 요충지인 디발쵸바를 포기하고 철수
- - 2. 18. 포로센코 대통령은 유엔평화유지군 파병 요청
- -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유엔평화유지군 파병은 우크라이나정부와 반군간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이에 반대(3. 21.)
○ 베를린 개최 노르망디포맷(우크라이나, 독일, 프랑스, 러시아) 외교장관 회담에서 민스크 합의 이행 촉구, 4개분야 실무그룹(안보, 정치, 경제, 인도지원) 조속 개최, OSCE 모니터링 인력 증원 등에 합의(2015. 4. 13.)
○ 두 차례 민스크휴전합의 이후에도 산발적인 교전이 계속되고, 민스크휴전합의 이행 관련 해서도 상호 이견으로 불안정 지속
○ 민스크접촉그룹회의 및 노르망디 포맷 외교장관회담/정상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결 노력을 경주해오고 있으나 진전 별무
- - 우크라이나는 완전한 휴전 준수, 중화기 철수, 포로교환, OSCE 감시/검증 보장 등 휴전 합의 내용이 선행되어야만 대화를 통한 정치과정 진전을 이룰 수 있다는 입장(반군을 대화 상대로 불인정, 민스크접촉그룹 내에서만 반군과 대화)
-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정부의 반군과의 직접 대화 및 즉각적인 정치 협상 개시를 주장하면서 반군에 대한 병력, 전차 및 대포 등 무기를 계속 공급
○ 향후 전망
- - 계속되는 공방전으로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으며, 동 내전으로 양측 군인 · 민간인 10,600명 이상 사망 및 약 200만 명의 이재민 발생 (2018.11월 기준)
- - 민스크휴전협정에 대한 우크라이나-러시아간 현저한 인식차이로 인해 동 휴전협정이 온전히 준수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 전망
- - 러시아 영향권 아래 있는 Donbas지역 국경에서 러시아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서방의 러시아 제재는 계속되고, 러시아측도 동 지역 개입의 직접적 목적인 對우크라이나 국경 통제를 포기하지는 않을 전망
- - 우크라이나내 민족주의자들은 친러반군에 대해 일체의 양보도 하지 않으면서 정부를 압박하고 있어 향후 우크라이나정부의 러시아와 정치 협상에도 큰 부담이 되어 획기적인 정치적 타결이 어려운 상황
- - 정치적 부담이 적은 인도주의 구호 및 반군과의 경제적 교류 등은 진전 가능
크림반도, 흑해, Azov海를 둘러싼 분쟁
○ 1997.5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정부간 "흑해함대 분할협정" 체결
- - 동 함대의 81.7%는 러시아로, 18.3%는 우크라이나로 분할
- - 러시아는 세바스토폴港의 부두시설 및 함대관련 시설을 임차하여 계속 사용
○ 러시아는 2014.3월 크림반도 점령 · 병합 후 “흑해함대 분할협정(1997년)” 파기
- - 세바스토폴港 부두시설 및 함대관련 시설 등 크림반도내 모든 군사시설/장비 장악
- - 이후 우크라이나 소유 군함 50척중 35척만 우크라이나측에 인도
○ 러시아는 2018.4월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잇는 대교(Kerch Bridge) 완공 및 개통
- - 동 대교는 흑해에서 Azov海를 출입하는 유일한 통로에 건설
- - 동 대교의 높이가 낮아, 높이 33미터 이상의 선박은 출입 불가
- - 러시아는 크림반도 및 Azov海에서의 정찰장비/대공장비 등 군사력을 증강하고, Azov海 우크라이나 항구(Mariupol港, Berdyansk港)로 출입하는 모든 선박들에 대해 검문 등 출입통제 조치 시행(출입허가 발급에 5-7일 소요)
- - 동 대교건설 및 출입통제 조치로 Azov海 우크라이나 항구 이용 화물 물동량이 30% 감소
- ※ 우크라이나-러시아간 체결된 "Azov海와 Kerch해협 사용에 관한 협정"(2003년) 에 따르면 양국 함정의 자유항행이 가능한바, 우크라이나측은 러측이 동 협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간주
○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상기 점령 및 출입통제조치에 대응, Berdyansk港에 군사기지 건설 추진, 경비정 배치 등 노력하고 있으나,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역부족인 상태 인바, 국제사회에 러시아측 조치의 부당/불법성을 호소중
- - 2018. 2. 20. 국제상설중재법원(PCA)에 러시아 유엔해양법협약 위반 제소
- - EU, 미국 등에 對러 제재 등 공동대응 및 對함 무기장비 제공 등을 요청
- - UN 총회에 "크리미아 자치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흑해 일부 및 Azov海의 군사 문제" 관련 결의안 제출(2018.11월) 및 통과(2018.12월)
- - Kerch대교 인근해역에서 러시아 함정이 Azov海로 진입하려던 우크라이나 해군 선박 3척(장병/선원/정보원 등 24명 포함)을 공격/나포한 사태(11. 25.)로 인해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對러 접경/인접 10개州에서 30일간 계엄령 시행 (2018. 11. 26-12. 26.)
- - 우 · 러 상호 포로 교환시 24명 승조원 전원 석방(19.9월) 및 나포 선박 반환(19.11월)
○ 국제사회의 러시아의 상기 점령 및 출입통제조치에 대해 비난 성명 등 발표
- - EU는 러시아의 불법점령/병합한 크림반도 강제통합조치 및 Kerch대교 선박통행 제한 조치 등을 비난하는 성명 발표(2018.5월, 2018.7월)
- - 미 국무부는 러시아의 Azov海 출입 통제조치 비난성명 발표(2018.9월)
- - 유럽의회는, 러시아의 불법적 Kerch 대교 건설에 관련된 러측 6개 회사를 제재키로 한 유럽이사회 결정을 환영하고, 러시아의 크림/Azov海에서의 군사력 증강 및 불법적 석유/가스 채굴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향후 Azov海에서의 긴장/갈등 심화시 對러 추가 제재해야 할 것이라면서, EU집행위 등에 관련 상황 조사/평가 및 출입통제조치 피해 지원 방안 검토 등을 요청하는 결의안 통과(2018. 10. 25.)
對몰도바 관계
○ 우크라이나는 몰도바와 같이 親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對몰도바 협력관계도 강화하는 추세
- - 몰도바 Transdniestria 지역주둔 러시아군 철수 필요성에 대한 現 몰도바 친서방 정부의 입장 지지
- - 안정적인 對몰도바 전기공급 복원, 상호 국경관리 협조, 몰도바내 Dniester 江 환경보호 협조 등
○ 몰도바는 對우크라이나 우호협력 강화를 추진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의 反러 정책에는 전면 동참하지 못하는 상황
- - △Transdniestria 지역내 러軍 주둔, △몰도바내 러시아계 언론의 영향력, △러시아는 몰도바의 최대 FDI투자국이자 2위 무역상대국, △천연가스의 절대적인 對러 의존, △러시아내 몰도바 노동자들의 연간 4억불에 달하는 송금 등 감안
기타 대외 관계
- 대한민국
우크라이나는 1992년 2월 10일에 대한민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2022년 현재에도, 양국을 이어주는 직항 항공 노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제3국을 경유하여 가야 하는 불편이 있었으나, 2022년 이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사전에 허락없이는 입국을 불허하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우크라이나는 1992년 1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과거 1998년에 우크라이나 현지에 있는 대사관을 폐쇄, 철수하였으며, 2022년 7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주권 국가로 승인하면서, 우크라이나 정부는 양국간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말았다.
-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1992년에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러시아에 비해서 약간 양호적이기도 했으나, 벨라루스 정부와 루카셴코 대통령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를 지원하고 말았으나, 벨라루스의 반정부 세력은 우크라이나에 동조하기도 한다.
- 미국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더불어서, 친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해왔으며, 2022년에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피해로 의해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적극적인 군사ㆍ경제적인 지원을 시행하는 준비에 이르고 있다.
- 독일
독일과의 관계는 그럭저럭 우호적인 편이지만, 우크라이나인들도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던 과거 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해선 반독감정도 있는 편이다. 다만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독일에 호감을 가진 이들도 많은 편. 또한 우크라이나의 친유럽주의자들은 유럽연합 가입을 바라며 독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우크라이나에서도 네오 나치들이 존재한다. 이와 별개로 우크라이나에는 독일계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고 있다.
- 중국과의 관계
본격적 관계는 1992년,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이후이다. 1992년에는 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키이우와 베이징은 자매 도시이기도 하다. 2013년에 중국이 우크라이나에 비핵국가에 대한 안전보장을 하기로 합의했다.
2015년에 돈바스 전쟁과 관련해서 주 중국 우크라이나 대사가 중국이 원한다면 중국의 평화유지군이 우크라이나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중국이 친러국가이고 러시아는 친중국가이니 우크라이나와 중국도 사이가 나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는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합병 시도를 불편해 하고,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이 대만을 병합하건 말건 관심 없어하는 상황 속에서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우크라이나 보건부에서 스푸트니크 V 백신은 절대 사용도 인정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대신 스푸트니크 V 백신보다 그닥 싸지도 않으면서 성능이 훨씬 더 안 좋은 게 확실한 중국산 백신을 수입한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2021년에 우크라이나가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조하며 신장 지역 인권상황 성명에서 빠진 것에 대해 중국 측이 환영의 뜻을 밝혔다. 2021년 7월 13일에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통화를 하여 양국의 협력방안을 논의 하였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관련 러시아 침공 규탄 결의를 위해 UN 안보리가 소집되었으나 예상대로 결의안은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 중국이 기권하여 기각되었다. 중국측은 우크라이나 내 중국인들의 철수를 진행하고 있다. 3월 1일에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중국 측에 전쟁을 중단하도록 설득을 요청했다. 3월 7일에 중국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을 할 의사를 밝혔다. 3월 9일에 중국 적십자사가 위챗 공식 계정을 통해 우크라이나 적십자사에 10억원 상당의 구호 물품을 전달한다고 밝혔다. 3월 19일에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보좌관은 중국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비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3월 21일에 중국측이 우크라이나에 구호물품을 추가로 보내기로 했다. 6월 15일에 시진핑 주석은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해 협력한다고 밝혔다. 중국 측은 러시아, 이란과 공조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재자도 맡을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행정구역
최상위 행정구역은 24개 주(область), 1개 자치공화국(автономна республіка), 2개 특별시(місто зі спеціальним статусом)의 27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가운데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은 2014년 이후부터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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