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론 (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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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스페인어: Ciudad de Colón)은 중앙아메리카 파나마 중부에 있는 도시로 콜론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약 20만 명이다. 파나마 운하의 카리브해 쪽 출구에 위치해 있다.[1]
개요
콜론은 파나마 북부의 카리브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며 파나마 운하의 대서양 쪽 출구에 위치한 도시이다. 1850년에 태평양 연안의 파나마시티와 대서양의 콜론을 연결하는 파나마 철도의 건설이 시작되면서 대서양 연안의 종점 도시가 되었다. 미국인들이 세운 이후에 캘리포니아주로 금을 얻으러 가는 이들이 많이 거쳐가며 발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국인들이 파나마 철도 건설을 추진한 사업가 윌리엄 헨리 애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의 이름을 따서 ‘애스핀월’이라고 불렀으나 히스패닉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스페인어 이름인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에서 유래된 콜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 도시의 이름이 됐다. 1914년에는 파나마 운하가 완성되어 태평양과 대서양이 연결되었다. 콜론은 수도인 파나마시티와는 철도,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1948년에 설치된 시내의 자유무역 지대는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외국 상사 소유의 창고가 많다. 산업이 발전함과 동시에 주변 지역으로부터 빈곤층이 유입되어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으며, 중앙아메리카에서 제일 위험한 도시로 꼽히고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무역지대로, 파나마의 무역을 담당하고 있다. 17~18세기 에스파냐 식민 시대에 방어를 위해 건설된 포르토벨로와 산로렌소 요새는 1980년에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2]
지리 및 기후
콜론은 중앙아메리카 파나마 북부의 카리브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수리적 위치는 북위 9°21′, 서경 79°53′이다. 남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폭이 가장 좁은 파나마 지협의 북부, 파나마 운하의 대서양 출구 가까이에 자리한다. 평균 해발 고도는 9m로, 전반적으로 낮고 평탄하다.
콜론의 기후는 열대 사바나 기후(Aw)의 특성을 띤다. 연평균 기온은 26℃이며, 더운 계절과 추운 계절의 기온 차가 매우 적어 일 년 내내 고온을 유지한다. 연평균 강수량은 3,400㎜로, 한국의 다우 지역 강수량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기온이 연중 고른 데 반해, 강수량은 계절에 따라 차이가 심하여 우기와 건기의 구분이 뚜렷하다. 1월에서 4월까지가 건기에 해당하여 월 100㎜ 미만의 강수량을 보이며, 3월의 강수량이 40㎜ 미만으로 가장 건조하다. 5월부터 12월까지 우기에는 월 강수량이 200㎜를 넘으며, 400㎜ 이상 비가 내리는 달도 많다. 월 강수량 400㎜란 우리나라의 7월이나 8월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콜론이 위치한 파나마의 북해안, 즉 카리브해 연안 일대는 큰 비가 잦고 열대성 질병의 발생이 높은 편이다.[3]
역사
파나마 지협은 에스파냐의 탐험가인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Rodrigo de Bastidas)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는 현재 콜론 주의 카리브해 연안과 콜론시에서 동쪽으로 100여 ㎞ 떨어진 곳에 있는 산블라스(San Blas) 만을 항해하였다. 콜럼버스의 4차 항해 때에는 현재의 콜론 주가 위치한 대서양 연안을 ‘아름다운 항구’라는 의미로 포르토벨로(Portobelo)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 200여 년이 넘게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는 계속되었다. 1751년에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Granada)에 편입되고, 1821년에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그란콜롬비아(Gran Colombia)의 한 주로 합병되었다.
카리브해 연안의 콜론 지역 개발은 19세기에 들어와서야 본격화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어 미국 서부에서 골드러시(gold rush, 1848~1869년)가 일어났고, 캘리포니아에 빨리 도착할 수 있도록 대서양 연안과 태평양 연안을 잇는 파나마 철도(Panama Railroad)를 건설하면서, 대서양 연안의 종점으로 콜론이 선택된 것이다. 처음 콜론 역의 위치는 리몬(Limón) 만 동쪽 기슭에 있는 만사니요(Manzanillo) 섬으로 결정되었다. 1850년 섬의 서쪽 편에 있는 습지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모기와 말라리아, 이질 등으로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다. 습지가 매립된 이후 도로와 각종 건물, 수도 시설 등이 들어섰고, 1855년에 철도가 완공되면서 도시는 파나마 내륙과 연결되었다.
파나마 철도 건설 이후 콜론의 위상은 카리브해 연안의 다른 항구 도시들을 뛰어넘게 되었다. 더욱이 파나마 운하의 건설이 계획되면서 콜론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1903년에 파나마는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였다. 파나마의 독립은 파나마 운하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미국 등 강대국 간의 갈등과 협상의 결과였다. 미국이 질서 회복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고, 1903년 11월 3일에 파나마시티의 주민들이 콜롬비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콜롬비아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미국 함대가 이를 저지하면서 파나마의 분리 독립이 이루어졌다. 1904년에 파나마 운하와 그 주변 8㎞ 이내가 파나마 운하 지대(Panama Canal Zone)로 미국에 조차되는데, 콜론은 수도인 파나마시티와 더불어 운하 지대에서 제외되었다.
파나마 운하의 건설로 콜론은 정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건설 공사를 위해 자메이카와 바베이도스 등 카리브해 여러 지역에서 흑인 노동자들이 유입되었고, 이는 인종적 구성과 사회 문화적 특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00년대에 약 3,000명이던 콜론의 주민은 파나마 운하의 건설로 1920년대에는 약 30,000명까지 늘어났다. 1948년에 만사니요 섬의 남동부 지역이 콜론 자유무역지대(Zona Libre de Colón)로 승인되고, 1953년에는 세계 최초의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콜론은 극심한 경제적, 사회적 침체기로 들어섰다. 1960년대 폭동으로 시 정부 청사가 파괴되었고, 이어진 군부독재로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1999년에 미국의 파나마 운하 인도 및 주둔 미군(미 남부사령부)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 자유무역지대의 확대로 경제적 침체는 점차 개선되고 있다. 오늘날 콜론은 카리브해 연안의 매우 중요한 관문이며, 국제적 관광지이다.[4]
콜론 자유무역지대
콜론 자유무역지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크며, 세계에서는 홍콩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총 2.4㎢의 면적에 약 2,000여 개의 기업이 입주해 있다. 도소매와 면세품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품목을 취급한다. 파나마 운하의 개통 이후 자유무역지대 건설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1948년에 만사니요섬의 남동부에 최초로 자유무역지대가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토지 매립과 코코솔로 등 주변 지역의 병합을 통해 확대되어 왔다.
자유무역지대는 두 구역으로 나뉜다. 콜론 시내 구역에는 상점과 전시장이 집중되어 있고, 프랑스필드(France Field) 구역에는 각국 업체의 창고가 모여, 파나마 수출입의 대부분을 처리한다. 콜론 자유무역지대의 주요 교역국은 홍콩, 타이완, 미국, 일본, 한국, 프랑스 등이다. 최대 수출국은 콜롬비아이며, 그 밖에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등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이 주요 수출국이다.
교통
1848~1869년에 미국에 의해 파나마 지협을 가로질러 카리브해와 태평양을 연결하는 최초의 횡단 철도인 파나마 철도가 완성되었다. 현재의 이름은 파나마 운하철도(Panama Canal Railway)이며, 콜론과 수도인 파나마시티를 연결하였다.
엔리케아돌포히메네스 공항(Aeropuerto Enrique Adolfo Jiménez)은 콜론에 있는 공항으로서, 1918년에 미군의 군사용 공항으로 건설되었다. 1949년에 민간용으로 전환되었으나 1979년까지 미국에 의해 통제되었다. 운하 지대의 해제와 함께 히메네스 전 대통령의 이름으로 파나마 정부에 귀속되었다. 2013년에 국제공항으로 다시 단장되어 새로운 활주로가 깔리고, 약 1,000명의 승객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콜론에서 트랜시스트미카(Transistmica)라고 불리는 보이드루스벨트 고속도로(Carretera Boyd-Roosevelt)를 통해 수도인 파나마시티, 그리고 공항과 연결된다.
유적
파나마의 카리브해 연안에는 17~18세기에 건설된 요새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요새들은 과거 대서양 횡단 무역을 위해 에스파냐가 건설한 방어 시설로, 뛰어난 건축술과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중에서도 콜론주에 위치한 포르토벨로(Portobello)와 산로렌소 요새(Fuerte de San Lorenzo)는 1980년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콜론주에 자리한 포르토벨로는 1502년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1597년에 항구가 건설되고, 카리브해의 주요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17~18세기 포르토벨로는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에스파냐로 반출하는 항구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재물을 노린 해적들의 습격 또한 극심해졌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1668년에는 전설적인 해적인 헨리 모건(Henry Morgan)이 도시를 약탈했고, 1739년에는 영국의 해군 제독인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에게 도시가 점령당하고 만다. 이처럼 계속된 영국 해적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포르토벨로 항구와 주변에는 에스파냐에 의해 건설된 총 5개의 요새 유적이 남아 있다.
한편, 포르토벨로 남서쪽 60㎞ 거리의 차그레스(Chagres) 강 입구에는 산로렌조 요새가 자리하고 있다. 산로렌조 요새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매우 오래된 에스파냐 요새 건축물 중 하나이다. 포르토벨로와 더불어 에스파냐의 주요 무역 통로였던 차그레스강을 해적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1598~1601년에 최초로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후 17세기에 여러 차례 해적들의 습격을 받았고, 요새의 재건도 이루어졌다. 파나마가 독립하면서 요새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현재에도 포대와 성채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포르토벨로와 산로렌소 요새는 2012년에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 등 보존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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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콜론 (파나마)〉, 《위키백과》
- "Colón, Panama", Wikipedia
- 〈콜론〉, 《요다위키》
- 〈콜론(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콜론의 문화〉,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중앙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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