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티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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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Baltimore)는 미국 메릴랜드주의 독립시이다. 인구는 약 58만 명이며 메릴랜드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이다.[1]
개요[편집]
볼티모어는 패텁스코강 하류, 체서피크만 가까이에 위치하며 대서양에서 약 300km 들어간 곳에 있는 해항이다. 워싱턴에서 북동쪽으로 60km 떨어져 있다. 1729년에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여 조선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독립전쟁 당시에는 조선의 중심지인 동시에 담배와 곡물을 수출하는 항구도시가 되어, 크게 성장하였다. 1900년대 동안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과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온 백인들이 제재소와 공장들에 직업을 구하기 위하여 볼티모어로 이주하였다. 1960년대에 볼티모어의 많은 백인들은 외곽들로 이주하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큰 이웃들은 북서부와 비지니스 구역의 동부에 개발되었다. 이리운하가 완성된 후로는 위세가 덜해졌으나, 지금도 대무역항의 지위를 견지하고 상공업, 교통, 교육의 지도적 도시로서도 활기를 띤다. 철광석, 크롬, 당밀 등을 수입하고 석탄, 각종 농업제품, 공업제품을 수출한다. 공업면에서는 조선, 제철, 자동차, 전기, 화학, 정유 등 제조업이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공공 건축물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며, 교육면에서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 코핀 주립 대학교(Coppin State University), 모건 주립 대학교(Morgan State University), 볼티모어 대학교(University of Baltimore), 메메릴랜드 대학교-발티모어 캠퍼스(University of Maryland, Baltimore) 등 많은 대학과 고등교육기관이 집중해 있다. 독립운동 당시에는 독립군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남북전쟁 당시에는 이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또 1904년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현재 볼티모어는 미국의 역사를 각처에 보존하고, 근대화한 도시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
역사[편집]
1661년 유럽인 정착자들이 오기 전에 현재의 볼티모어 지역에는 서스쿼해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볼티모어는 1729년까지 창설되지 않았다. 그해에 메릴랜드 총회는 퍼탑스코 강의 위쪽에 60에이커(24헥타르)의 넓은 면적을 매입하여 볼티모어 타운이란 이름을 지었다. 1745년 존스타운이 볼티모어 타운과 합병하였고 1773년에 펠스 포인트가 병합되었다.
총회는 타운은 메릴랜드 남부의 담배 재배를 위한 교역의 중심지로 의도하였다. 그러나 타운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온 밀과 남아메리카에서 온 커피를 포함한 다른 생산물들을 다루는 시작을 하였다. 1700년대 후반에 제분업과 밀과 밀가루의 수출이 볼티모어의 주요 수입을 마련하였다.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볼티모어는 2달 이상이나 국가의 수도로 있었다. 1776년 영국군이 필라델피아를 위협하자 대륙 회의가 거기서 열렸다. 볼티모어는 1796년 도시로 합병되었다.
1800년에 이르러 볼티모어의 인구는 35,514명이 되었다. 미영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무장한 상선이 볼티모어 항구를 떠나 대서양의 영국의 해운 상선들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의 영향으로 영국군은 볼티모어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1814년 9월 12일 영국군이 육지를 통하여 볼티모어를 공격하였다. 다음 날에 영국의 대포가 포트 핵헨리에 포격울 시작하였다. 도시는 양쪽의 공격들을 물리쳤다. 폭탄 투하 이후에 포트 맥헨리 위에 국기의 펄릭임이 보이면서, 프랜시스 스콧 키가 "Star-Spangled Banner"를 작사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1818년 내셔널 로드가 메릴랜드를 오하이오 계곡과 연결하면서 중서부의 시장들을 볼티모어로 개장하는 데 시작되었다. 볼티모어는 다른 항구들보다 중서부에 가까이 놓여있어 중서부 무역을 위한 제1의 항구가 되었다.
1820년대 동안에는 이리 운하의 건설이 무역업에서 선두주자인 볼티모어의 자리를 위협하였다. 이리운하는 오대호로부터 뉴욕까지 재빠른 교통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830년대에 지어진 철도들이 도시의 무역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30년 미국이 처음으로 지은 증기 기관차 "톰 섬"이 볼티모어로부터 운영되었다. 그해에느 볼티모어와 오하이오 철도가 미국에서 승객들을 싣는 첫 철도가 되었다.
볼티모어에서 지어진 클리퍼 배들이 밀가루, 담배와 밀을 도시로부터 유럽과 남아메리카로 실어갔으며, 커피, 구리, 가죽과 당밀과 함께 돌아왔다. 도시는 남부에서 무거운 투자들과 함께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1840년대와 1850년대에는 많은 독일과 아일랜드 이민들이 볼티모어에 정착하였다. 1860년으로 봐서 볼티모어는 인구 212,418명과 함께 미국에서 3번째로 제일 큰 도시였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에 메릴랜드주는 북부에 남아있었으나, 많은 볼티모어 시민들은 남부에 동정을 가졌다. 1861년 남부의 지지자들의 군중들이 도시를 지나가던 북군을 공격하였다. 이 사건으로 4명의 군인과 12명의 시민들이 사망하였다. 1861년 5월부터 1865년 5월까지 북군들이 볼티모어를 점령하는 동안에 어떤 공무원들은 남부 지지자로서 감옥에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볼티모어는 도시의 상업, 문화와 산업적인 확장을 지속하였다. 1873년 볼티모어의 상인 존스 홉킨스가 사망했는데 그는 대학과 병원을 짓는데 700만 달러를 남겼다.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이 1876년, 병원이 1889년에 설립되었다. 1800년대 후반으로 봐서 도시의 공장들이 의류, 식품과 철강의 많은 양을 생산하고 있었다.
1900년으로 봐서 볼티모어의 인구는 508,957명이었다. 독일인과 아일랜드인의 큰 이민은 체코인, 이탈리아인과 동유럽 유대인들의 도착에 의하여 이어졌다. 도시의 경계선들이 확장되면서 자동차와 외곽들이 생겼다.
1904년 2월 7일 볼티모어의 대화재가 다운타운 지역의 심장부에 일어났다. 도시의 최악의 재앙으로 알려진 이 화재는 이틀동안 지속되어 140에이커(57헥타르) 이상 확대되었고, 주요 다운타운 건물의 거의 전부를 파괴시켰다. 주택이나 인명 피해는 없었어도 화재는 1억 달러의 손해를 일으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화재로부터 거의 모든 것들이 복구되었다. 무역과 함께 새로운 산업들이 볼티모어를 더욱 더 번영하게 만들었다. 1888년부터 1918년까지 도시는 볼티모어 카운티를 병합하면서 경계를 확장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동안에 볼티모어의 공장들은 비행기, 화학품, 전자 용품, 배와 강철 등에서 많은 것을 생산하였다. 흑인들과 애팔래치아산맥의 백인들이 볼티모어의 공장에서 일하려고 도시에 이주해 들어왔다. 1950년에 도시의 인구는 949,708명에 도달하였다.
프렌드쉽 국제공항이 1950년에 개장되었다. 그해에는 근로자들이 버려진 지역들을 제거하기 시작하고, 다른 건설 프로젝트들을 위한 많은 사람들을 퇴거시켰다. 이 프로젝트들은 고속도로, 새로운 사무소와 아파트 건물들, 그리고 존스 홉킨스 병원의 확장을 포함한다.
산업들의 쇠퇴와 가족들이 가까운 외곽들로 이주하면서 1900년대의 두번째 절반 동안에 도시의 인구는 떨어졌다. 도시 전역의 인구가 떨어지면서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인구는 꾸준히 자라났다.
그레이터 볼티모어 협회는 다운타운에 향상을 계획하는 일을 하였다. 1962년 시빅 센터가 개장되었고, 찰스 센터 컴플렉스가 1974년에 완공하였다. 1967년에는 재부의 항구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원래의 프로그램은 1980년대 중반에 환료되었으나, 더 멀리의 건설을 지속되었다.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2세의 암살 사건에 이어 폭동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폭동으로 인하여 6명이 사망하고 많은 주택들과 비지니스들이 파괴되었으며, 인종 관계는 시험되었다. 도시를 고치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계획인 주요 거리 박람회 시티 페어가 1970년에 시작되었다.
1992년 캠던 야드에 야구 경기장 오리올 파크가 개장하였다. 1950년대 이래 내부 항구룰 둘러싼 공공 고층 건물 주택 개발이 1995년과 2001년 사이에 해체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 도시의 인구는 자라남의 사인들을 보였다. 볼티모어는 현재 인구를 위한 너무 많은 주택과 학교, 빈곤과 범죄를 포함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다. 볼티모어는 연방적으로 보조된 빈곤 반대 프로그램과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들과 함께 이 문제들과 싸웠다.
2007년 쉴라 딕슨이 볼티모어의 첫 여성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2009년 메릴랜드의 검사들이 딕슨을 도둑질과 위법 행위를 포함한 7개의 범죄 고발에 기소하였다. 그러나 딕슨은 아무 잘못을 부인하였다.[3]
경제[편집]
볼티모어의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연적인 항구들 중 하나이다. 항구는 호안 지역의 45 마일(72km), 배가 돛을 내릴 수 있는 수면의 1,589에이커(643헥타르)를 갖추었다. 메릴랜드 항구부가 지역을 감독한다. 수입품은 자동차, 철광석, 당밀과 펄프이며, 수출품은 석탄, 전자 용품과 곡물이다.
볼티모어 지역은 수 천개의 공장을 가지고 있으며, 동부 해안 지역의 주요 고용주들 중 하나이다. 볼티모어의 주요 산업으로는 레이다와 기타 전자 기구들의 생산, 식품, 철강, 교통 수단과 화학품의 가공업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세계에서 가장 큰 향료와 조미료 생산 회사인 매코믹 앤드 컴퍼니가 볼티모어에 기지를 두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큰 제철소들 중 하나가 볼티모어로부터 동쪽으로 16km 떨어져 있는 스패로스 포인트에서 운영되고 있다. 볼티모어 지역의 다른 산업으로는 의류, 합성 금속 제품, 기계 등이 있다. 스포츠용품 회사인 언더아머도 볼티모어에 본사를 두고 있다.
교통[편집]
볼티모어 워싱턴 서굿 마셜 국제공항이 볼티모어로부터 남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화물 철도와 트럭의 수송로들이 도시에 봉사하고 있다. 아셀라 익스프레스 등 암트랙 동북 간선의 여객열차는 볼티모어를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 C.와 연결한다. 볼티모어의 고속도로 시스템은 항구 아래에 놓인 2개의 터널을 포함한다. 메릴랜드 교통국은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의 버스, 경량 철도와 통근 열차 MARC 등을 운영한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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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볼티모어〉, 《위키백과》
- 〈볼티모어〉, 《나무위키》
- 〈볼티모어〉, 《요다위키》
- 〈볼티모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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