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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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크루스(Veracruz)는 멕시코 동해안에 있는 베라크루스주에 위치하는 도시이다. 베라크루스는 탐피코와 함께 멕시코의 대무역항으로서 인구는 약 44만 명이다. 공식 이름은 에로이카 베라크루스 (Heroica Veracruz)이다. 현지에서는 주 이름과 구분하기 위해 엘 푸에르토(El Puerto) 혹은 푸에르토 데 베라크루스(Puerto de Veracruz)라고 부르기도 한다.[1]
목차
개요[편집]
베라크루스는 멕시코의 중부, 베라크루스주 동부 멕시코만에 면하는 항구도시이며, 베라크루스주의 최대도시이다. 멕시코시티의 동쪽 476km, 베라크루스주의 주도 할라파(Xalapa)에서 남동쪽으로 90km 떨어진 중부의 해안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푸에르토는 에스파냐어로 "항구"라는 뜻이며, 베라크루스가 멕시코를 대표하는 최대의 물류항이기 때문에 푸에르토 하면 첫번째로 연상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베라크루스는 1519년에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건설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도시이다. 베라크루스는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가 시작된 이후 멕시코시티와 에스파냐를 잇는 가장 주요한 항구였으며, 멕시코시티의 관문으로서 기능하였다. 베라크루스는 식민 기간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상품이나 유럽에서 식민지로 오는 상품을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였으므로 상인 계층을 비롯한 부유층이 많이 거주하였고, 멕시코시티보다 더 부유한 도시였다. 따라서 식민 기간 동안 해적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으며, 이에 대항하여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와 같은 방어 시설이 건설되었다. 19세기에 멕시코의 독립 이후 베라크루스는 여러 전쟁의 주요 현장이 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 군대의 침략에 대항하여 시우다드에로이카(영웅 도시)라는 칭호를 네 번이나 받았다. 20세기 이후로는 멕시코 제1의 수출입 항구 및 석유 제품 생산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특히 자동차 산업의 수입과 수출 부문에서 주요한 항구이다. 열대의 저습지에 위치하나 위생관리가 철저하고 도로, 녹지, 수도 등의 설비가 정비되어 있다. 식민 시기 이래 쿠바와 지속적으로 교류함에 따라 쿠바 문화와 에스파냐 문화의 전통이 음식과 음악에 혼재되어 있다. 현재 해군기지가 있고, 1968년 올림픽 성화가 멕시코시티로 향했던 출발지이다.[2]
명칭[편집]
베라크루스의 공식 명칭은 에로이카베라크루스(Heroica Veracruz)이다.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자인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도시를 창설할 때 붙인 이름은 비야리카데라베라크루스(Villa Rica de la Vera Cruz)였다.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날이 기독교의 성일(聖日) 중 하나인 ‘성금요일’이었기 때문에 Vera Cruz(성십자가)라는 지명을 붙였으며, 이 지역에 금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Villa Rica(부유한 마을)라는 명칭을 붙였다.
베라크루스의 주요 요새인 산후안데울루아 요새(el Fuerte de San Juan de Ulúa)의 명칭은 1518년 이 지역에 대한 첫 번째 탐험에서 지어졌다. 탐험대가 섬에 도착한 날은 기독교의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 축일이었고, 또한 탐험대의 대장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va)를 기리기 위해 산후안(San Juan)을 지명에 사용하였다. 울루아(Ulúa)는 그 지역에 대한 아스테카(Azteca)의 지명이었다. 베라크루스 산호초군의 주요 섬인 사크리피시오스 섬(Isla de Sacrificios)의 이름은 에스파냐 정복 이전 시기에 종교 행사 도중 이루어진 인신 공양의 잔해가 묻혀 있는 데서 유래하였다.
지리 및 기후[편집]
베라크루스는 베라크루스주의 도시로, 멕시코만에 연한 항구이다. 베라크루스주의 주도인 할라파(Jalapa)로부터 90㎞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멕시코시티에서는 동쪽으로 400㎞ 정도 떨어져 있다. 베라크루스는 멕시코 만에 연하고 있으며, 마르티(Martí) 해변, 오르노스(Hornos) 해변 등의 해변이 발달해 있다. 주요 시가지는 육지부의 베라크루스 항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시가지 전면에 산후안데울루아 섬, 사크리피시오스 섬 등을 비롯한 여러 섬이 자리하고 있다. 베라크루스 앞바다에는 23개의 산호초 섬으로 이루어진 베라크루스 산호초군이 있으며, 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섬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사크리피시오스 섬이다. 메디오스(Medios), 테노야(Tenoya) 등의 하천이 멕시코 만으로 흘러 들어가고 라가르토스(Lagartos), 라일루시온(La Ilusión), 말리브란(Malibrán), 레알(Real), 로스라고스(Los Lagos), 엘베르헬(El Vergel) 등의 호수가 형성되어 있다.
베라크루스는 북위 19°상에 위치하여 열대 사바나 기후가 나타나며, 연평균 기온은 25.3℃이다. 연 강수량은 1,560㎜ 정도이며, 우기인 6월부터 10월까지는 월 200~390㎜의 비가 내린다. 이 밖의 달에는 월 10~40㎜ 정도로 적은 양의 비가 내린다. 우기에는 매일 오후에 천둥을 동반한 열대성 소나기가 내린다. 연중 온난하지만, 우기에는 평균 기온이 좀 더 높게 나타난다. 5월부터 10월 사이의 평균 기온은 26~28℃이며, 이 밖의 달에는 21~26℃에 이른다.[3]
역사[편집]
식민 이전과 식민 시기[편집]
베라크루스 지역에 대한 첫 번째 탐험은 1518년에 에스파냐의 대장인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va)가 산후안데울루아 요새(Fort San Juan de Ulúa)라고 불리는 섬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 탐험대는 이 지역에 금이 생산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파견되었다. 두 번째 탐험은 1519년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코르테스는 이 지역을 비야리카데라베라크루스(Villa Rica de la Vera Cruz)라고 하였다. 당시 코르테스가 처음 비야리카(Villa Rica)를 건설한 곳은 현재의 베라크루스 구시가지가 아니라 키아우이스틀란(Quiahuiztlan) 근처였다. 이후 아스테카(Azteca)를 정복하고 난 1524년에 안티과(Antigua)로 도시를 이전하여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성당을 지었으나, 1599년에 현재 베라크루스의 위치로 도시를 옮겼다. 베라크루스 항은 1604년 도시의 지위를 얻었고, 1640년에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Felipe III)로부터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인정을 받았다.
식민 기간 동안 베라크루스는 멕시코시티와 에스파냐를 잇는 가장 주요한 항구였다. 식민 시기 베라크루스에는 상인 계층을 비롯한 부유층이 대거 거주하였으며, 세관이 설치된 부유한 도시였다. 베라크루스 항을 통하여 금은뿐 아니라 터키석과 같은 보석류, 그리고 옥수수, 콩, 아보카도, 면화 등의 농작물도 에스파냐로 수출되었다. 에스파냐에서는 밀, 쌀 가금류, 섬유, 포도주 등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상품이 수입되었다.
16세기 말 에스파냐 인들은 내륙 지역의 금과 은을 에스파냐로 수송하기 위해 베라크루스와 코르도바(Córdoba), 오리사바(Orizaba), 푸에블라(Puebla), 할라파(Jalapa), 페로테(Perote) 등의 도시 간에 도로를 건설하였다. 에스파냐로 향하는 금과 은이 모였고, 이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España)에서 생산된 금은뿐 아니라, 필리핀 마닐라(Manila) 항에서 태평양 연안의 아카풀코(Acapulco), 멕시코시티를 거쳐 수송된 도자기, 비단 등 동양의 상품들도 베라크루스 항으로 집중되었다. 이 때문에 베라크루스는 식민 기간 동안 해적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에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의 방어 시설이 강화되었으며, 바를로벤토 전함대(Armada de Barlovento)가 배치되었다. 이 전함대는 아메리카 지역에서 생산된 금과 은을 에스파냐로 수송하는 선단(flotas)을 유럽 열강의 해군과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17세기 중엽에 설립되었다.
독립 이후[편집]
19세기 멕시코에는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었으며 잦은 전쟁에 휘말렸다. 당시 멕시코의 가장 주요한 항구였던 베라크루스는 특히 여러 전쟁의 현장이 되었다. 19세기 초 멕시코 독립 전쟁 당시 에스파냐는 해로상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베라크루스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1820년에 베라크루스는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821년 누에바에스파냐의 마지막 부왕인 후안 오도노후(Juan O’Donojú)와 훗날 멕시코의 첫 번째 황제가 된 아과틴 데 이투르비데(Aguatín de Iturbide) 장군이 베라크루스의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에서 코르도바 조약(Tratados de Córdoba)에 서명함으로써 멕시코는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이후,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 군대가 1823년에 베라크루스 시가지를 향하여 함포 사격을 하였는데, 이 사건 이후 베라크루스는 첫 번째 ‘시우다드에로이카(Ciudad Heroica, 영웅 도시)’ 칭호를 받았다. 1838년 제1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일명 과자전쟁, Guerra de los pasteles) 당시 프랑스군이 멕시코 만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베라크루스를 함락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베라크루스는 두 번째 ‘시우다드에로이카’ 칭호를 받았다. 멕시코-미국 전쟁(1846~1848) 기간 중 1847년에 미국이 베라크루스를 침공하여 며칠 만에 함락하였다. 이후 베라크루스는 세 번째 ‘시우다드에로이카’ 칭호를 받았다.
1857년 멕시코의 자유당파와 공화당파 간에 내전이 발생하자, 당시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Pablo Juárez García) 대통령은 정부를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스로 이전하였다. 이후 후아레스 대통령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자, 1861년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였다. 에스파냐는 1861년 베라크루스에 군대를 입성시켰으며, 프랑스군은 1864년에 베라크루스 항을 점령하여 그들이 추대한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Ⅰ)를 베라크루스를 통해 입국시켰다.
19세기에 이어진 여러 전쟁으로 말미암아 베라크루스는 세관 수입에 커다란 손해를 입었으며, 도시 및 항구 시설도 황폐화되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대통령은 외국계 기업을 유치하여 현대적인 항구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1911년 멕시코 혁명이 터지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이곳에서 이피란가호(Ypiranga)를 타고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 4월 9일 탐피코에 정박한 미국의 '돌핀호' 억류사건에 대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요구한 사죄를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대통령이 거부하면서 미국의 침략을 받아 4월 21일 항구가 점령되었다. 하지만 그 해 7월에 우에르타 정부를 전복시킨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 대통령의 노력으로 11월 14일 항구는 멕시코에 반환되었다. 1924년 2월 12일 주지사 권한대행인 앙헬 카사린(Ángel Cazarín)에 의해 이곳이 임시수도로 정해지기도 하였다.[4]
경제[편집]
베라크루스는 오랜 기간 동안 라푸에르타데멕시코알문도(La Puerta de México al Mundo), 이른바 ‘세계로 향하는 멕시코의 관문’으로 불렸다. 식민 시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항구 중 유일하게 유럽과 상품을 거래할 수 있는 지위를 지녔다. 현대에 와서도 베라크루스의 항구는 도시의 경제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베라크루스 항은 특히 멕시코의 자동차 산업에 주요한 항구로, 자동차 완제품 선적에 특화되어 있다. 멕시코의 주요 자동차 산업 지구가 멕시코시티를 비롯한 중부 지역에 입지하고 있고, 대부분의 생산 업체들이 미국을 비롯한 유럽 회사들이어서 베라크루스 항은 멕시코 제1의 자동차 부품 및 완제품 수출입항이다. 베라크루스는 항구가 입지해 있어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주요 유전 지역인 멕시코 만에 연하여 석유 제품 생산업이 발달하였다. 역사적으로 주요한 도시로서 요새 및 역사 지구를 중심으로 관광업이 발달하였다.[5]
교통[편집]
베라크루스는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고 규모가 가장 큰 항구이며, 가장 연계성이 높은 항구이다. 19세기 전반에 잦은 전쟁을 겪은 데다, 후반에 유럽과의 교역이 감소하자 베라크루스 항의 중요성은 급감하였다. 20세기 초반부터 항구 시설을 재정비하였으나 도시의 주요 경제는 항구보다는 석유 생산에 의존하였다. 1970년에 연방 정부는 항구의 행정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서는 연방 정부가 베라크루스와 같은 주요 항구를 직접 관리할 수 있게 하였고, 그에 따라 연방 정부는 항구 시설의 자동화를 추진하였다.
베라크루스는 에스파냐 정복 이전부터 멕시코시티와 도로로 연결되었다. 이 도로는 베라크루스 항을 멕시코시티와 이어 줄 뿐 아니라, 태평양 연안의 아카풀코(Acapulco)를 경유하여 필리핀의 마닐라 항으로 연결되었다. 오늘날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스는 왕복 4차선의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도로는 코르도바(Cordoba)와 푸에블라(Puebla)를 경유한다. 또한 남쪽으로는 타바스코(Tabasco) 주의 비야에르모사(Villahermosa)와 연결되고, 베라크루스의 주도인 할라파와도 고속도로로 연결된다.[6]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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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베라크루스〉, 《위키백과》
- ↑ 〈베라크루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Veracruz (city)", Wikipedia
- ↑ 〈베라크루즈 (시)〉, 《요다위키》
- ↑ 〈베라크루스(도시)〉, 《나무위키》
- ↑ 〈베라크루스의 교통(세계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 〈베라크루스〉, 《위키백과》
- 〈베라크루스(도시)〉, 《나무위키》
- 〈베라크루즈 (시)〉, 《요다위키》
- "Veracruz (city)", Wikipedia
- 〈베라크루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베라크루스의 교통(세계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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