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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토미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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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5일 (일) 17:31 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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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치
지토미르주 위치

지토미르주(우크라이나어: Житомир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북서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지토미르주의 면적은 29,832㎢이며 인구는 1,179,032명(2021년)이다. 우크라이나 인구 특성과 맞물려 감소세에 있다. 주도는 지토미르이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 호멜주, 서쪽으로는 흐멜니츠키주, 남쪽으로는 빈니차주, 동쪽으로는 키예프주와 접한다. 우크라이나어가 주의 공용어이다.

1937년 9월 22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역으로 창설되었다.

주요도시[편집]

지토미르[편집]

지토미르는 우크라이나 서북부에 있는 지토미르주(州)의 주도(州都)이다. 우크라이나의 고도(古都)인 키이브(Kyiv)에서 시작해 벨라루스의 브레스트(Brest)를 거쳐 서유럽으로 연결되는 역사적인 교역로 상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로는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aw)와 키이브, 남북으로는 벨라루스의 민스크(Minsk)와 우크라이나 남단의 이즈마일(Izmayil) 등을 이어주는 교통의 허브다.

지토미르주는 우크라이나의 소수민족인 폴란드인의 중심지 중 하나다. 지토미르시(市)에는 로마 가톨릭 성당과 1800년에 세워진 로마 가톨릭의 대규모 폴란드인 공동묘지가 있다. 이는 폴란드가 아닌 지역에 조성돼있는 폴란드인 공동묘지로는 우크라이나 르비브(Lviv)의 리차킵스키(Lychakivskiy) 묘지, 리투아니아 빌뉴스(Vilnius)의 라소스(Rasos) 묘지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토미르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10~13세기 고대 슬라브족의 정착지 유적은 물론,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의 정착지 유적도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지토미르는 동슬라브족 역사의 전설적 인물들인 아스콜드(Askold) 왕자와 디르(Dyr) 왕자의 총신(寵臣) 지토미르에 의해 884년경 세워졌다. 기록상으로는 고대 슬라브족의 기원과 설화 등을 담은 연대기(Chronicles)에 1240년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된 키이브 루스(Kyiv Rus)의 도시들 중 하나로 처음 언급돼 있다.

지토미르는 132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에 합병됐다. 이후 타타르족의 잇따른 침략으로 포위되는 위기를 맞으며(1399 · 1469 · 1482 · 1606년) 지토미르는 요새화되었다. 지토미르는 1444년 마그데부르크 도시법에 따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56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만들어지면서 지토미르는 폴란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된 지토미르에는 1572년 당시 142개의 건물과 행정 지도자의 주택, 성 등이 있었다. 지토미르는 1년에 두 번의 박람회를 개최할 권리를 받는 등 폴란드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지토미르는 1648년 카자크의 수장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폴란드 통치에 대항해 크림 타타르 및 현지 농민들과 합세해 일으킨 봉기에 휘말리면서 초토화되었다. 도시는 불탔고, 많은 주민이 살해되었다. 공식 문서들도 모두 파손되었다.

1667년 모스크바 차르국(Tsardom of Muscovy)과 폴란드 간에 맺어진 안드루소보 조약(Treaty of Andrusovo)에 의해 드니프로(Dnipro)강 서쪽에 위치한 지토미르는 다시 폴란드의 통치를 받게 됐다. 18세기의 지토미르는 폴란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예수회 대학(1720)과 수도원(1724), 베르나르디 수도원(1761), 성빈센트 수녀원(1766)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 후 지토미르는 러시아제국에 합병되었다. 1804년 지토미르는 볼히니아(Volhynia)현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지토미르는 제조업과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주요 산업은 양초와 비누 제조, 증류, 양조업, 벽돌 산업, 제분 산업 등이었다. 19세기 말에는 농기계제조를 중심으로 금속공업과 담배산업이 추가되었다. 기업 수는 1834년 14개에서 1861년 33개, 1898년 46개, 1914년 63개로 꾸준히 증가했다.

1896년 베르디치프(Berdychiv)로 이어지는 철도가 완공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코로스텐(Korosten)과의 철도선이 완공되었다. 1900년 무렵 지토미르에는 소년 · 소녀용 체육관과 공공도서관, 신학교, 시립극장, 박물관(현재의 지토미르 지역학 박물관), 시립병원 등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지토미르는 독일군에 점령돼 큰 피해를 겪었지만 곧 재건되었다. 지토미르는 독특한 자연환경에 놓여있다. 전면이 고대로부터의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숲은 테테리브(Teteriv), 카미얀카(Kamianka), 크로셴카(Kroshenka), 그리고 푸티아틴카(Putiatynka)강이 가로지르고 있다. 남쪽 경계를 형성하는 테테리브강 남쪽 강둑에도 지토미르시의 일부 지역이 있긴 하다.

지토미르에는 공원과 광장이 많다. 시가지는 성당 광장이라는 뜻의 소보르니 메이단(Sobornyi Maidan)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망이 뻗어 있는 구조이다. 지토미르의 역사적인 구(舊)시가지는 도시의 남부, 카미얀카 강변에 있는 세 개의 바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지토미르는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습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여름인 7월의 평균 기온은 18.9℃이고, 겨울인 1월의 평균 기온은 –5.7℃이다.

지토미르는 우크라이나 서북부 지역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다. 유리, 금속 제조, 전자기기, 직물, 가구, 신발 등의 산업체가 있다. 대규모의 제약 공장이 지토미르에 자리하고 있으며, 1944년부터 이곳에서 가동되고 있는 제과공장은 우크라이나 제과시장의 선두주자 중 하나이다.

주요 산업은 기계제조와 금속 산업이다. 또한, 면직 · 의류 · 신발 · 양말 제조공장 등의 경공업이 발달해 있다. 이곳에 위치한 장갑차 공장은 2014년 돈바스(Donbas) 전쟁이 시작된 이래 우크라이나의 주요 군비 수리 시설 중 하나가 됐다. 2014년 9월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이 공장에 2억8천만 흐리브냐 어치의 주문을 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3]

코로스텐[편집]

코로스텐은 우크라이나 북부의 지토미르주(州)에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자, 서북부 철도 수송의 주요 분기점이다. 코로스텐군(郡)의 행정 중심지이지만, 시정은 별도의 시의회를 통해 운영되는 지토미르주 직할도시다. 도시의 남서쪽 외곽에서 흐닐루샤강이 프리피야트강의 오른쪽 지류인 우즈강과 합류한다.

이 도시는 945년 초기 동슬라브 부족의 하나인 드레블리아인의 중심지로 처음 역사에 기록되었다. 당시의 도시명은 ‘이스코로스텐’이었다. 키이브 공국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며 일으킨 드레블리아인의 봉기로 키이브 공국의 이고르 대공이 살해되자, 그의 아내 올가는 이스코로스텐을 포위하여 불태웠다. 이스코로스텐은 키이브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도시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옛 이름인 이스코로스텐이 벽의 나무껍질로부터라는 뜻의 슬라브어로, 맨 처음 이 도시가 생길 때 나무껍질을 벗기지 않은 오크 울타리로 둘러싸였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설은 드레블리아인 등 이 지역에 살았던 이교도 부족들의 주요 신(神) 중 하나인 태양신의 이름 코르스에서 도시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1370년 이스코로스텐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의해 함락됐다.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땅이 되었다. 1589년 이스코로스텐은 마그데부르크 도시법에 의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649년 카자크와 농민들이 폴란드 영주들의 수탈에 항거해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 때 이스코로스텐은 카자크 반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차르국과 폴란드 간의 오랜 영토 분쟁 끝에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이 맺어지면서 드니프로강 우안(右岸)에 위치한 이스코로스텐은 다시 폴란드의 손에 넘어갔다.

1793년 이스코로스텐은 러시아제국에 편입됐다. 1894년 이스코로스텐은 행정구역상 볼린현(縣)의 오브루치군에 속해 있었고, 주민은 2,467명으로, 벽돌공장과 양조장, 물방앗간. 학교, 여관, 정교회 등이 있었다.

1902년 키이브-코벨 철도가 개설되면서 이스코로스텐은 전기를 맞았다. 1909년 도자기공장이 문을 열었다. 1917년에는 코로스텐으로 개칭되었고, 이후 철도 노선이 확장되면서 코로스텐은 중요한 철도 분기점이 됐다.

1917년 11월 코로스텐에 잠시 소련 정권이 들어섰으나, 곧 오스트리아-독일군에 의해 점령됐다. 1918년 2월에는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세력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UNR)이 이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소련군과의 공방 끝에 1921년 11월 코로스텐은 완전히 소련군에 넘어갔다.

1926년 코로스텐은 도시의 지위를 얻었다. 1936년 코로스텐의 인구는 2만 8,000명으로 늘었다. 도자기공장, 금속공장, 자동차 수리점, 20kW 용량의 공동 발전소 등이 있었다.

1941년 8월 7일 코로스텐은 독일군에 점령됐다. 이미 1918년과 1919년의 포그롬으로 많이 희생됐던 코로스텐의 유대인은 1941~1942년 나치에 의해 6,000명 이상 살해되며 공동체가 거의 와해됐다. 1943년 12월 29일 코로스텐은 독일 나치로부터 해방됐다. 전쟁으로 인해 코로스텐은 완전히 파괴됐다.

전후 복구된 코로스텐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다시 큰 위기를 겪었다. 1986년 4월 26일 80km 거리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누출사고로 코로스텐은 방사능 오염지대 중 자발적 대피지구로 분류되었다.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 후에는 1년 만에 경제위기로 큰 타격을 받았다.

오늘날 코로스텐은 천연 화강암과 로진·레진, 그리고 정교한 도자기들로 유명하다. 매년 9월 셋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국제 감자팬케이크축제는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이 도시의 대표적인 축제다.[4]

오브루치[편집]

오브루치는 우크라이나 북부에 위치한 지토미르주에 있는 도시이다. 오브루치 라이온(지구)의 의 행정 중심지이다. 오브루치 공군기지가 이곳에 위치한다. 벨라루스 국경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져 우크라이나 북서부에 자리한다. 지리적으로 폴레시아 지역에 속한다. 코로스텐에서 48km, 즈토미르에서 133km, 벨라루스 마지르에서 92km 떨어진 곳에 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근처에 있는 유령도시 프리피아트에서 100km 거리에 있다.

오브루치는 원래 키이브루스의 중요한 마을 중 하나로 977년에 브루치라고 처음 언급되었다. 나중에 이스코로스텐에 의해 약탈당한 뒤 드레블리안의 수도가 되었다.

14세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속했다. 1483년 크림타타르가 정착지를 파괴했다. 루블린 조약에 따라 오브루치를 포함해 볼히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의 주를 형성했다. 1641년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오브루치에 도시 권리를 부여했다. 이곳은 폴란드 왕관령(王冠領)에 속했다.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 이후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마을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성 바실 교회가 유일하다. 이 교회는 1190년대 후반에 키예프의 루리크 2세가 궁정 건축가 표트르 밀로네크에게 의뢰해 지었다. 루리크가 소유한 땅에 세워진 교회는 그의 수호성인 바실에게 바쳐졌다.

성 바실 교회는 기둥 4개에 애프스(apse, 교회의 반원형 부분) 3개, 돔 1개로 구성되어 있다. 서쪽 정면에는 둥근 탑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키이브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정교한 벽돌 파사드가 두드러지는데, 윤이 나는 다양한 색깔의 돌들을 섞은 띠로 장식되어 있다. 돌출된 벽기둥이 붙은 다소 복잡한 디자인은 지붕의 복합 시스템과 높은 돔이 솟아 있기에 그렇게 보인다.

1321년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가 오브루치에 대한 포위 공격을 펼치던 중 돔과 천장이 파괴되었다. 교회의 폐허는 1842년까지 남아 있었는데, 그때 애프스 3개와 아치가 있는 북쪽 벽 일부를 제외하고 무너져 버렸다.

1907년 알렉세이 시추세프는 루리크 교회의 잔해를 전체 건물에 포함시켜 원형을 복원하도록 위임받았다. 복원 작업은 2년 동안 계속되었고, 시추세프는 권위를 인정받아 건축의 학술위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최근에는 복잡한 천장 체계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복원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교회는 13세기 전환기의 것이 아니라 고대 교회들의 전형적 모델에 맞춰 복원되었다. 성 바실 수도원의 인접 건물들은 본당의 복원과 동시에 프스코프의 중세 건축 모델을 바탕으로 건립되었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지토미르주〉, 《위키백과》
  2. 지토미르주〉, 《나무위키》
  3.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지토미르〉,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코로스텐〉,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오브루치〉,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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