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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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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광무 8년) 대화재 이전의 경운궁(덕수궁)
현재 덕수궁

덕수궁(德壽宮)은 대한제국황궁이다. 원래 조선시대 왕가의 별궁인 명례궁이었으나, 임진왜란 직후 행궁으로서 정궁 역할을 했으며, 광해군 때 정식 궁궐로 승격되어 경운궁이 되었고, 대한제국 때는 고종황제에 의해 황궁(皇宮)으로 사용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순종황제가 즉위한 후 궁궐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서울특별시청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엄격한 원칙을 고수했던 조선 초가 아니라 구한말에 증건(增建)된 전각들이 꽤 있기 때문에, 即(卽), 眀(明) 등 약자(略字)나 속자(俗字)가 적힌 편액(현판)들이 다른 4개 고궁보다 많다.

고려시대의 한양부 향교가 있던 장소로 비정된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수난을 당했으며, 현재는 대한제국 시절의 1/3 이하로 그 면적이 줄어들었다. 덕수궁 주변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로마네스크)과 성가수녀회 본원, 성공회 서울교구장 공관(양이재라는 이름의 한옥) 영국ㆍ러시아ㆍ캐나다 대사관, 덕수초등학교 등도 자리한다.

개요[편집]

덕수궁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대한제국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m²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중건했으며, 1906년엔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게 됐다.

1907년(순종 1)엔 순종이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역이 대규모로 축소되고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이 소실되었던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역사[편집]

이름[편집]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에도 같은 이름인 덕수궁이라 하였다.

월산대군 저택[편집]

원래 1469년(예종 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엮였던 조영달의 집 터였다. 역적의 집이란 이유로 조정에서는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고 1470년(성종 1년)에 성종이 이곳을 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6]에게 내려주었다.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기로 했다.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제사를 맡으면서 이곳을 하사받았고,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이면서 의경세자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되었다. 이후 1475년(성종 6년) 의묘의 위패를 경복궁 안에 있는 연은전으로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남았다.

월산대군 저택이 된 경위를 다르게 보는 의견도 있다. 월산대군과 성종의 어머니인 수빈 한씨가 남편 의경세자의 사망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고 궁궐 밖으로 나가 살면서 시아버지인 세조가 특별히 수빈 한씨와 그 자녀들이 거처할 곳으로 지어주었으며, 이후 둘째아들 성종이 왕위에 올라 그 어머니인 수빈 한씨도 왕대비가 되어 대궐로 들어가자 오롯이 월산대군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성종 이후 이곳은 월산대군 저택으로 불리며 그저 그런 왕자 1의 집에 불과했다. 그러나 약 1세기가 지난 후 월산대군 저택은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다.

정릉동 행궁[편집]

임진왜란 때 의주목까지 피난갔다가 환도한 선조가 도성 내의 궁궐들이(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불타버려 거처 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 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 또는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는 궁궐 공간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불편이 야기 되었기 때문에 주변 민가들을 대거 징발하여 궁궐로 증축, 연결하여 썼다.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는 전각들 중 나중인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중화전 일대와 석조전을 제외하고, 즉조당과 석어당 등 오래된 전각들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전각들은 궁궐이라기 보다 권세 있는 양반집의 모습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줄곧 이 정릉동 행궁에서 거처하다가 중건 중인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다.

경운궁[편집]

1609년(광해군 원년)에 마침내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광해군은 보충 공사를 재차 명하여 약 2년 간 더 정릉동 행궁에 계속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다시 정릉동 행궁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거처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을 꺼렸기 때문인 듯 하다. 광해군이 인경궁, 경희궁 등 여러 궁궐을 마구 건설한 것은 근본적으로 창덕궁에 거주하기 싫어서였다. 광해군은 마침내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경운궁 확장 공사를 벌여 궁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곧 인경궁에다 경덕궁(경희궁)까지 착공하자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도리어 경운궁에 새로 짓던 전각들을 도로 해체하여 경덕궁 건설에 사용했다. 또한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인조의 본의가 아니라 철저히 타의(인목왕후)에 의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거의 전소되었지만,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변 외전 일대만큼은 용하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능양군은 정궁인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러 정통성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인목왕후가 "능양군이 직접 경운궁으로 올 것"을 명하면서 차기 왕과 기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즉위 절차상 대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세자가 없는 경우에는 대비가 차기 왕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능양군 측은 반정으로 정권을 찬탈한 상황이었던 만큼, 한시라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광해군의 폐모살제(인목왕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였던 만큼, 인조가 절대로 인목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능양군(인조)은 경운궁까지 와서 인목대비에게 엎드려 조아린 후에야 간신히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치렀지만, 인조는 바로 경운궁을 떠나 화재로 폐허가 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즉위한지 3달 후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 단 2채를 제외한 경운궁의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인조의 이러한 조치는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인목왕후에 대한 은밀한 견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 생전에는 내내 눈치를 보며 국법까지 무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인조인데 왕 입장에서 그게 편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목왕후는 가렴주구의 상징으로 여겨 장기적으로 없애자는 신하들과 기왕 지어놓은거 활용해 보려는 인조의 눈치싸움 현장인 인경궁으로 거처가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인목왕후의 만수무강을 위한 것이었다.

인조의 조치를 통해 경운궁은 단 전각 2채 만이 남아 정릉행궁 시절보다 더 조촐해졌다. 이후 경운궁은 이후 왕실에서 왕실 내 토지 및 재산 관리 역할을 하기 위한 별궁 명례궁을 설치한 정도를 빼고는, 별 다른 존재감 없이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다. 여담으로, 2003년 ~ 2004년에 방영했던 SBS 사극 〈왕의 여자〉는 이 정릉동 행궁 시기를 다루고 있다.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궁궐 세트가 아니라 대감집 느낌 나는 세트에서 선조 치세 후반 및 광해군 초반의 시기를 그려냈다. 심지어 동궁(세자궁)은 초가집이었다. 배우개그의 건물 버전으로 용인 한국민속촌의 가옥 중 '중부지방 양반가 22호'는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의 사저이자 후에 월산대군이 물려받는 집으로 등장했다가 〈왕의 여자〉에서 경운궁으로 출연했다.

대한제국의 황궁[편집]

인조반정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274년 후인 1897년(건양 2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에 거처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했다. 고종은 죽을 때까지 경운궁에서 지냈고, 이후 대한제국의 중요한 사건은 경운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다만 1907년(융희 원년) 11월 순종황제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법궁(황궁)의 지위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이 이어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조차 잊혔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서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명경궁(明慶宮)'으로 소개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으며 이제는 고작 건물 2채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인근은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공사관 외에도 프랑스공사관, 독일영사관이[16]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공사관 구역으로 불렸다. 또한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을 비롯한 다른 외국인들까지 주로 이 일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성 내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 점령했던 사건이나 을미사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고종으로서는 외국 공사관에 둘려싸여서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이 무력 도발을 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였던 경운궁은 특히 각별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면서 내외로 환궁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6년(건양 원년) 경운궁 개수를 명하여 환궁을 준비했다. 경운궁은 인조 원년인 1623년에 대거 축소되어 원래 민가였던 즉조당과 석어당 2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정궁으로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우선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성당(선원전) 등 당장 필요한 건물들을 급한대로 지은 상태에서 1897년(건양 2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정전으로는 1902년(광무 6년)에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5년 간 즉조당을 활용했다.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정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이어나갔다. 겉으로는 옛 궁궐을 보수 · 중건한다고 했지만 원래 경운궁에 남아있던 전각이 2채 뿐이었기 때문에 말이 중건이지 그냥 궁궐 하나를 통째로 새로 짓는 것에 가까운 대공사였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창덕궁의 인정전을 본따 지은 복층양식으로 단층인 창경궁의 명정전이나 경희궁의 숭정전과는 격이 달랐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도 이 무렵에 지었다. 그리고 서양식 정전으로 활용할 목적의 석조전도 이때 착공했는데 워낙 큰 규모여서 그런지, 후술하겠지만 경술국치 이후에 완공되었다.

당시 경운궁 공사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이 포스팅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건된 건축물들은 회안전, 문경전, 태원전 축대, 흥복전 행각, 다경합, 만화당 등이었다고 한다. 이 중 만화당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개축되었다.

1902년(광무 6년) 경운궁 공사는 1차적으로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 그때까지 5년 동안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이었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1902년에 완성된 경운궁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 중심으로 짜여진 도성을 경운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도시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대로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경희궁과 연결하는 홍교도 건립했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왼쪽에 경희궁, 오른쪽에 경운궁이 있다. 어느 블로거가 정리한 홍교의 건립 시기와 건립 의도 이 포스팅에 따르면 홍교는 고종이 경희궁에서 열릴 관병식을 보기 위해 건립했으며 1902년(광무 6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세웠다고 한다.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편집]

경운궁 화재현장.

1904년(광무 8년) 2월 29일에 덕수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즉조당과 석어당도 이때 소실되었다.

화제 직후 고종은 황실 도서관 건물로 사용하던 '수옥헌(漱玉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경운궁 주요부를 완전히 복구하기까지 고종은 수옥헌을 침전 겸 편전(사무실)으로 사용했다.

대화재로 사실상 궁궐이 모두 소실되자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집착)을 보인 고종은 결국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경운궁을 재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 창덕궁으로 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고종의 반응은 굉장히 신경질적이었던 듯 하다.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이하영에게 들은, 궁궐 이어에 대한 고종의 반응을 적으며 경운궁에 유달리 집착하는 고종의 모습을 비판했다.

1905년(광무 9년)에 경운궁 수옥헌에서 일제의 강압과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로 인해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당했다.

1906년(광무 10년) 경운궁 중건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인해 규모는 1902년(광무 6년) 전성기 때보다 축소되었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단층으로 바뀌어 원래 복층 건물의 장엄함이 사라졌다.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이어 순종이 돈덕전에서 즉위했다. 즉위 직후 순종은 한동안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나, 4달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이후 중명전은 다시 태황제 고종의 집무실 및 접견실이 되었다.

일제에게 강제 퇴위를 당한 이후에도 경운궁에 머무르는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순종이 '덕스러울 덕(德)', '목숨 수(壽)'의 덕수라는 궁호(宮號)를 지어 올린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德壽宮)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고(경술국치), 고종은 태황제(太皇帝)에서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당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붕어(崩御)할 때까지 계속 덕수궁의 주인으로 남았다.

그해 12월에 석조전이 착공 10년만에 완공되었다. 사실 석조전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부터 정전으로 구상했던 건물이었으나, 결국 이 건물은 망국 이후에 완공되었던 것이었다. 완공 후 고종 일가는 석조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고종은 석조전에 불편함을 느껴 함녕전에 주로 기거했다고 한다. 이후 석조전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영친왕이 귀국했을 때 머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훼손[편집]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덕수궁의 건물들을 대거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중화문과 중화전을 빙 둘러 있던 2칸 폭의 행각 역시 헐렸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복원하지 않았다. 30년대 일제가 당시 경성에 기존의 공원으로도 수용할 인원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덕수궁을 공원화할 때 석조전의 앞마당에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 때 방해가 된 것이 중화전의 서쪽 행랑채였다. 또한 덕수궁 권역의 일부를 민간에 매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덕수궁은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으며, 그 권역 역시 무지막지하게 줄었다.

8.15 광복 직후,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기에는 석조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의논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덕수궁에 북한군이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의 포격으로 없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이후 북한군을 밀어붙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사정거리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할 상황이 된 것. 그러나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라고 고민하던 끝에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개시했다. 만약 딜 중위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포격을 했으면 덕수궁은 그대로 잿더미가 돼버렸을 상황. 이에 감사의 뜻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해밀턴에게 정식으로 감사패를 전달했다.

그렇게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이후로도 덕수궁은 부분적으로 훼손당했다. 1960년대 초반 돌담이 헐리고 창살담으로 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마치 낙동강 오리알처럼 고립되어 버렸고 결국 이 문을 서쪽으로 옮겨야 했다.

복원[편집]

덕수궁 복원 예상도.

1980년대에 돌담을 복원하면서 덕수궁은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8년에 경희궁지를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90년대에 창덕궁과 경복궁, 창경궁의 전각들이 차차 복원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덕수궁 또한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현재 창덕궁의 규장각 및 선원전 권역 복원, 인정전 내.외 행각 복원 등은 완료되었다. 2016 ~ 2017년 사이의 3단계 작업에 중화전 행각 복원, 조원문 복원, 금천교 복원, 광명문 이건 등이 포함되었다. 언제 있지 모르는 4단계 복원에는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용산구로 이전하는 대로 선원전 및 덕수궁의 양관(洋館) 중 하나로 석조전과 함께 평면도가 남아 있는 돈덕전이 들어갈 예정이다.

현재까지 문화재청은 덕수궁 복원 사업을 총 4단계에 걸쳐 수립해 놓았다. 1단계인 2010년 ~ 2013년에 석조전 내부 복원, 덕홍전 주변 행각지 발굴 및 복원, 준명당 및 즉조당 보수공사 등이 진행되고 있으며 석조전의 경우 2014년 10월에 '대한제국역사관'이라는 타이틀로 복원이 완료되었다.

다만 덕수궁은 경희궁처럼 궁역의 대부분이 민간에 매입된 상태이다. 4단계 복원 사업 중 하나이자 양관 건물인 돈덕전의 경우 주한미국대사관 관저 동쪽 담장과 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돈덕전과 선원전 일원의 복원에 많은 차질이 우려된다. 물론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이전하는 대로 담장을 세우는 등 덕수궁의 궁역을 차례로 복원할 예정이지만, 이미 중명전을 중심으로 한 옛 수옥헌 권역위에 세워진 예원학교와 선원전 권역 서편에 세워진 구세군 교회, 수학원이 있던 홍원 일원을 점유한 주한영국대사관과 서울주교좌성당과 합의를 봐야하는 실정이다.

특히 정동 1-23에 위치한 구세군중앙회관은 덕수궁 옛 궁역 내 건축된 건물이나, 1926년 완공된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가진 지정문화재이다. 만일 덕수궁 전역을 복원한다면 이 건물은 창경궁 대온실처럼 남겨 궁내 존치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 〈덕수궁 배치도〉와 현재를 비교하면 구세군회관 자리에도 덕수궁 전각이 있었던 것이 확인 가능하지만, 문화재를 복원하겠다고 기존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궐내각사 터가 위치한 동쪽 궁역은 이미 태평로와 서울광장으로 뒤덮인 상태로 교통 혼잡 등의 이유로 복원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2014년 수립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로가 축소될 계획이라 아직은 미지수. 그러나 완전 복원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석조전과 중화전, 준명당의 서쪽 행랑채, 담장 측면의 배치가 처음부터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덕수궁이 동서양의 건축이 한데 어우려져 있다는 평을 받지만 전각 배치가 어긋난 탓에 부조화스러운 일면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중화전이 즉조당 등의 위치에 맞게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중화전은 아직 세워지기 전이었다. 본디 석조전이 먼저 세워질 계획이었으나 전통 방식의 건축과 달리 기초 공사가 1년이 지나도록 계속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법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고종의 지시로 결국 중화전이 석조전보다 빨리 세워졌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그야말로 정신이 나갈 정도의 돈지랄이다. 결국 중화전 서쪽 행랑채를 완전히 복원하려면 석조전의 정원을 밀어버리는 것 외엔 달리 대안이 없다.

그 외에도 복원해야 할 전각이나 양관들이 많지만, 양관들의 경우 현재까지 최소한 평면도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돈덕전과 제 위치를 고수 중인 정관헌, 석조전, 중명전과 달리 현존하지 않는 구성헌이나 환벽정 등은 그 평면도 등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경복궁 내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복원 자료가 없어 터만 남겨두었다.

2015년 8월 20일에는 서울특별시에서 궁역 인근에 위치한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구,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을 철거해 그 자리를 시민광장으로 개장했다.

원형이 유지되었다면 그 자체도 역사 유적의 하나라 보존될 가능성이 컸지만, 사실상 다른 건물이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철거했고 그보다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열어주어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일제 잔재라며 홍보적으로 악용하고, 철거한 자리에서 유적이 발굴되었음에도 도시재생 주제의 건축전시를 위한 가건물을 짓거나 박물관을 짓는 등 다른 현대적 건축물을 지어 홍보 목적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자 철거가 올바른 방향이었냐는 논란이 일었다.

철거한 자리에 2019년 3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개관했다.

2019년 3월 1일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옮기는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여담으로 광명문 내에 있었던 국보로 지정된 자격루와 보물로 흥천사명 동종의 경우, 어디로 옮길 지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돈덕전은 1902년(광무 6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을 하기 위한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지어졌으며,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장소나 외국사신 접견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1907년(융희 원년)에는 순종이 즉위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이어해 옮긴 후에는 덕수궁 공원화 사업 때문에 같이 훼철되었고 이후에는 아동 유원지로 활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는 2017년에 마쳤으며, 2018년 현재 복원을 위한 설계를 하는 중이다. 2018년 내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하반기에 완공할 예정이다. 복원되면 대한제국과 관련한 자료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선원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광무 4년) 10월 화재로 모두 불타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 옛 경기여고 터)로 옮겨 1901년(광무 5년) 7월 11일에 재건했다. 그러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모두 없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가 해체당하는 과정을 겪어왔다.

광복 이후에는 경기여고 용지로 쓰이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양도받았다. 2003년 6월 미국공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한 문화재 지표조사 중에 덕수궁 선원전 터를 확인하면서, 용산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하여 2011년에 소유권이 한국으로 다시 넘어왔다. 이후 교환한 부지 사이에 경계벽을 설치했고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종의 길'을 2018년에 완공하면서 덕수궁 복원 사업을 재개했다.

문화재청은 2038년까지 3단계에 걸쳐 진전(眞殿)인 선원전(璿源殿),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54동), 배후림(상림원), 궁장(宮牆) 등을 복원해 나갈 예정이다.

  • 진전(眞殿): 역대 왕의 御眞(어진:초상화)을 봉안한 건물
  • 빈전(殯殿): 왕이나 왕후 승하 후 그 시신을 모셔둔 곳
  • 혼전(魂殿): 발인 후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옮기기) 전까지 신주(神主)를 모셔둔 곳

이름에 대한 논란[편집]

2011년 4월 한 시민에 의해 "덕수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 명칭을 회복해야 한다."라는 민원이 제기돼 시작된 것으로 학계 일부에서도 덕수궁이 일제 침략의 잔재이므로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한민국 문화재청이 주최한 공청회 등에서 "일제 잔재라는 근거가 없다."라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돼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문화재청은 2011년 12월 14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회의에서 덕수궁 명칭 변경 문제를 심의한 결과 경운궁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은 만큼 명칭 변경 안건 심의 자체를 '보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 문화재위원회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덕수궁에 대한 광범위한 학술 연구 등을 거쳐 추후에 명칭 변경 재추진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문화재청 측에서 발의된 '경운궁' 환원에 대해 3차례에 걸쳐 의논한 결과 '덕수궁'으로 유지하기로 결정났다고 한다. 명칭 변경에 대한 혼선과 더불어 바뀐 명칭을 홍보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그 밖에 '덕수궁'에 대한 역사성이 그렇게 짧지 않다는 것(100년 이상)도 이유로 거론되었다. 덕수궁이란 이름이 가진 역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ek.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는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공식 자료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서적을 참조할 수 있다.

(전략) 궁호에 '수(壽)'가 포함된 것은 선왕의 장수를 기원하기 함이다. (중략) 이들 궁호는 건물이 남아있다고 해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왕의 붕어와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고종의 경우도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양위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궁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때 순종은 태황제의 궁호로 '덕수(德壽)'를 택했고,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은 그 때부터 덕수궁이 된 것이다. (중략) 국민들은 나라를 뺏긴 국민으로서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종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다.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2009, p.311

건축물[편집]

궁문[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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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과거 덕수궁의 정문은 중화문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전소되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으로 개칭해 정문으로 삼았다. 원래는 태평로 한가운데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말미암아 1970년 8월 21일 이건공사를 시작해 1971년 1월 2일 마무리되어 원위치보다 22m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시청앞 광장과 마주보고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이 있다.

외조[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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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中和門)

중화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02년(광무 6) 창건되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원래는 중화전 주변을 두르는 행각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이 사라지고 중화문 오른쪽에 일부가 잔존하고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전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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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中和殿)

덕수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1902년(광무 6) 창건 당시에는 2층 전각이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단층으로 중건했다. 대한제국 때 영건했기 때문에 중화전 답도에는 제후국을 상징하는 봉황이 아니라 황제국을 상징하는 용 2마리가 새겨져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내조[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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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浚眀堂)

고종이 함녕전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에 한동안 머물며 외국 사절을 접견하던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이다.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즉조당과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고종은 늘그막에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를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다. 딸바보 편액으로 걸린 '명'이 일반 적인 '밝을 명(明)'이 아니라 '眀'인 점이 특이한데 둘은 모양만 다르고 같은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를 두고 대한제국 측에서 일본의 '일(日)'이 들어간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라는 한자를 대체해서 썼다는 설이 있으나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구한말 전부터 써오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덕수궁 내 가이드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자 이런 거짓 정보를 퍼뜨린다고 하니 주의할 것. '眀'이 들어가는 건 '중명전(重眀殿)'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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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조당(即阼堂)

정면 7칸, 측면 4칸의 침전 건물로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한성으로 환어한 이래 이곳을 시어소로 사용했으며,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장소였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광무 원년) 환궁한 고종이 1902년(광무 6) 중화전 창건 전까지 경운궁의 정전으로 삼았으며[1],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부터는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1년 7월 20일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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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어당(昔御堂)

누각을 제외한 궁궐 내의 전각 중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전각으로,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며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원래의 석어당은 1593년(선조 26)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승하하고, 1618년(광해군 10) 인목왕후가 폐위되어 유폐되었던 장소였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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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德弘殿)

1911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덕수궁 내의 전각 중 가장 나중에 영건되었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서쪽에 있으며, 고종이 내외 귀빈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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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咸寧殿)

정면 9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고종의 침전이었다. 1897년(건양 2)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온돌 교체공사 도중 발생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모두 전소되었다가 곧바로 중건 공사에 착수해 1906년(광무 10) 복구했다.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 후에도 줄곧 이곳에서 거처했으며, 1919년 1월 21일 승하한 장소도 여기였다. 함녕전의 정문인 광명문은 일제강점기 덕수궁 유원지화 계획에 따라 중화문의 서남 측으로 이전되었다가, 2018년 6월에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마무리함으로써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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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靜觀軒)

1900년(광무 4) 고종이 다과회, 연회장, 음악당 등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전통 건축 양식이 가미되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특징이다. 완공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커피를 즐겼으며, 현재도 매년 봄과 가을에 명사를 초청한 강연회를 여기서 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강연을 청취할 수 있다. 다만 고종실록 등에 의하면 1912년까지 이곳을 어진을 봉안한 장소로 이용한 것으로 보여 단순히 다과회, 연회장 등의 용도로 볼 수가 없다.

서양식 건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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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石造殿)

영국인 하딩과 로벨 등이 설계에 참여했으며 1900년(광무 4) 착공해 1910년(융희 4) 완공한 정면 54.2m, 측면 31m의 신고전주의 양식 석조 건축물이다. 원래는 황제와 황후가 거처할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했으나 경술국치로 황궁으로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완공 후에도 암살시도에 시달렸던 고종은 석조전에서 실제로 생활하지는 않고 행사에만 사용했다.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이곳을 이용하는 등 호텔처럼 운영되었다. 석조전은 광복 이후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복궁에 마련되면서 비게 되어 근대미술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황궁으로 복원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9년부터 2014년 10월 7일까지 복원 공사를 거쳐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당시 영국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석조전 내부를 관람하려면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해 해설관람으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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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구 이왕가미술관)

이왕직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937년 석조전 옆에 지은 석조 건축물로 회랑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박물관 용도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역사적 건물. 한국전쟁 때 훼손되었다가 1953년 수리한 후 199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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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重眀殿)

1901년(광무 5) 건설된 2층 벽돌 건물이다. 중명전 터는 원래는 경운궁 바깥의 땅으로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고, 정동 여학당이란 학교도 있었다. 고종이 환궁한 후 1897~1902년 사이 미국 공사관을 제외한 주변 부지들이 경운궁에 편입되었다. 당시 중명전은 오늘날과 달리 정관헌과 같은 양식으로 수옥헌(漱玉軒)이라는 이름의 단층 건물을 지어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했다. 1899년 3월 헨리 아펜젤러가 찍은 미국 공사관 전경 사진에는 중명전이 있던 자리에 단층 양관이 자리잡고 있었고 호러스 뉴턴 알렌이 1895년에 작성했다는 지도에서 king's library라 적힌 지명이 그 증거로, 1901년 11월 16일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이후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곳을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개칭하고 편전으로 삼아 외국 사절을 접견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1905년(광무 9)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여기에서 체결되었다. 나중에 궁역에서 벗어나 소유권이몇 차례 바뀌면서 외관이 심하게 변형되었으나(위쪽 사진) 2010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했다(아래쪽 사진). 다만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매각되기 이전의 것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다. 매각되면서 외국인 사교 클럽으로 활용되거나 1925년에 화재가 일어나는 등의 변천을 거쳤고, 무엇보다 내부 구조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외형을 간신히 유지한 알현실 또한 사실 다른 방과 달리 길게 늘어진 형태이기에 알현실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 뿐이다. 사실상 극히 일부, 그것도 외장만 복원한 셈이다. 참고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였기에 복원 이후 을사조약에 관한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특한것은 좌측에 보이는 중명전 현판의 밝을 명(明)자의 왼쪽 부수가 날 일(日)자가 아니라 눈 목(目)자이다. 明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변형자의 일부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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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惇德殿)

경운궁의 영역이 확장되던 시기 부지가 경운궁 영내로 편입되고 공사를 시작하여 1903년경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계자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당시 서양식건물을 주로 설계한 러시아 제국 국적의 우크라이나인 사바틴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조전의 북쪽에 있었고 그 규모가 비교될 만큼 큰 양관이다.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건물로서 많은 연회가 베풀어졌던 장소이다. 1920년대초까지 존속했고 덕수궁 공원화계획에 따라 퇴락하여 헐린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07년에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된 것이 있다. 문화재청이 2022년을 목표로 준공할 예정이다.

관람안내[편집]

관람시간
  • 매표 및 입장시간 : 09:00 ~ 20:00
  • 관람시간 : 09:00 ~ 21:00

★야간개방 : 오후 21시까지★

  • 휴궁일 : 매주 월요일

※ 기관 사정에 따라 관람시간 단축 및 조정이 있을 수 있다.

관람요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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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편집]

  • 주소 :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 전화 : 02-771-9955
주변 지하철
  • 수도권 1호선 시청역
  • 수도권 2호선 시청역
  • 수도권 2호선 을지로입구역
  • 수도권 5호선 광화문역
주변 정류장

시청역, 시청덕수궁, 시청앞.덕수궁, 서소문, 시청.서소문청사, 서소문KAL빌딩, 서소문, 프레스센터

주변 버스
  • 마을 : 종로09 종로11
  • 공항 : 6005 6701
  • 간선 : 103 150 401 402 406 N16(심야) 172 472 600 602 N62(심야) 101 603
  • 지선 : 1711 7016 7022 7019
  • 일반 : 790 799 1002
  • 직행 : 1004 8600 8601 8601A
주차시설

덕수궁에는 주차시설이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바란다.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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