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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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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昌慶宮) 전경
창경궁(昌慶宮)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국보 제226호.

창경궁(昌慶宮)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조선시대궁궐이다. 일제강점기해방 후 40여 년 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6년 궁궐 복원에 따라 창경궁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로 불리면서 실질적으로 하나의 궁궐 역할을 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다.

개요[편집]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세 번째로 지어진 조선시대 궁궐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경복궁을 법궁으로, 창덕궁을 보조 궁궐로 사용하는 양궐 체제를 이어왔다. 그러나 역대 왕들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고, 왕실 가족이 늘어나면서 차츰 창덕궁의 생활 공간도 비좁아졌다. 이에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 비 소혜왕후 등 세 분의 대비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이웃에 마련한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을 넓힐 목적으로 세워졌고, 또한 애초 궁궐로서 계획된 것이 아니라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살았던 수강궁에 몇몇 전각을 보태어 세운 궁궐이다. 따라서 경복궁이나 창덕궁과 비교해볼 때 그 규모나 배치 등에 다른 점이 많다.

우선 창경궁은 전각의 수가 많지 않고 규모가 아담하다. 공간의 구조와 배치도 경복궁처럼 평지에 일직선의 축을 이루도록 구획된 것이 아니라 창덕궁처럼 높고 낮은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아 필요한 전각을 지었기에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도 언덕에 지어졌다.

창경궁의 또 다른 독특함은 조선시대 다른 궁궐과 주요 전각들이 남향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창경궁의 경우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은 동쪽을 향하고, 관청 건물인 궐내각사와 내전의 주요 전각들은 남쪽을 향해 있다. 남·서·북쪽이 구릉이고, 동쪽이 평지인 지세라서 이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발전해온 궁궐이기에 내전이 외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것도 창경궁의 특색이다. 따라서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과 사랑, 왕과 세자의 애증, 왕비와 후궁의 갈등 등 왕실 가족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도 풍부하게 전해온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도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 창경궁에서 들으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던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맞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낮은 언덕을 지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이어져 본래 한 영역을 이루었다.

역사[편집]

1930년대 창경궁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거처한 궁)이 있던 곳이다. 성종 15년(1484년)에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하여 수강궁을 확장하여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세 사람을 위하여 따로 지은 대비궁, 경복궁, 창덕궁의 남향 배치와 구별지으려고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성종 때에는 정전인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 등이 건립되었으며 궁의 둘레는 4325척이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4월에 주요 건물들을 재건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1월에 마무리되었다. 광해군 때 중건된 이후에는 창덕궁의 부속 궁궐로 활용되었으므로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렸다. 창경궁 재건보다 7년 앞서 창덕궁이 먼저 재건되어 법궁이 됨에 따라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는 그다지 활용되지 않았으나, 창덕궁과 인접한 관계로 조선 왕조 역사의 중요한 무대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기를 반복하였는데,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이처럼 창경궁에는 화재로 건물의 변화가 생기고 여러 사건도 일어났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1909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하였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창경원으로 전략하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 훼손되었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의 발굴, 복원 공사로 명정전, 문정전 일곽만이 복구되었다.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되었다.

조선 시대[편집]

1418년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건립 당시 이름은 수강궁(壽康宮)으로 세종이 부왕인 태종의 만수무강과 평안을 바란다는 뜻으로 지었다.

태종 사후에 한동안 사용되지 않아 터로 남았다가 제9대 성종이 세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생모이자 대비인 소혜왕후, 제8대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1483년~1484년 사이 대대적으로 궁역을 확장했고,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의 '창경(昌慶)'으로 고쳐지었다. 다만, 공사가 진행되던 중에 정희왕후는 요양차 머물렸던 온양행궁에서 세상을 떠나 실제 머물렸던 대비는 안순왕후와 소혜왕후 두 분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가 몽진을 떠난 후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다. 왜군에 의해 소실되었다는 설, 선조의 몽진 후 한양이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민중들에 의해 방화된 것 아닌가 하는 설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일본군 종군승의 일기 기록에 왕궁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이는 선조가 대피한 후 왜군이 한양에 입성할 때까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반면 종묘의 경우 왜군에 의해 불에 탄것이 확실하며, 민중이 불태웠다는 기록은 풍문이 그렇다더라 정도이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광해군 7년 때 중건되었다.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게 되면서 창경궁은 조선 전기에 비해 쓰임새가 대폭 커져 여러 사건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 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창경궁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내전이 완전히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난리통에도 명정전, 문정전, 여휘당, 환취정 등 일부 전각이 살아남았기에 인조 11년 인정전 하나만 남아있던 창덕궁보다 먼저 복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창경궁은 비교적 화재 사고가 잦았다.

제19대 숙종 때는 장희빈이 창경궁 통명전 앞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제21대 영조 때는 휘령전(문정전) 앞마당에서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가 쌀담는 뒤주 속에 갇혀서 8일 만에 요절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도 세자의 아들이자 제22대 왕, 정조가 1800년 6월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다.

창경원[편집]

창경궁 자리에 1909년 11월 1일 개원한 유원지이다. 1983~1986년에 거쳐 철거되고, 동물원 기능은 서울동물원으로 이전되었다.

1983년 폐쇄되기 전되기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큰 유원지로써 주말마다 가족 나들이객으로 붐비며 각광 받았던 곳이다. 80년대 이전부터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창경원에 가족들과 놀러가 바람을 쐤던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80년대 이전에는 서울의 유일한 유원지였고, 생활 수준이 급격히 향상되던 시절이라 폐쇄되기 전인 80년대 초 무렵에는 주말마다 발디딜틈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렸었다.

고의적인 훼손이다

본궁이 아니라 하더라도 창경궁은 엄연한 궁궐이고, 또한 단순한 지방의 행궁이 아닌 조선의 5대 궁궐 중 하나로써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하던 곳이다. 왕조와 왕가에 있어서 궁궐이라는 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크다. 궁궐이 왕가에게 가지는 의미를 모르고 유원지로 개조할 생각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를 보면, 일제는 창경궁 외에도 대한제국의 궁궐들을 각각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으로 변경하여 대중에게 공개할 의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심지에서 새로운 부지를 확보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편이 즉각적으로 공원을 조성시킬 수 있고, 또 상징적 의미가 있는 궁궐을 유원지화시키고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기존 질서를 부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대외적으로도 해외에 일본이 대한제국 왕가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과 위와 같은 실제 의도들로 인해 창경궁의 개조를 단행한 것으며, 순종이 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러한 의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근대건축도면집에 실린 1907년 창경궁 도면을 보면, 일본은 건물 몇 개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창경궁 전부를 공원으로 개조할 생각이었고, 왕실의 개인 정원으로 둘 생각도 없었다. 1909년 11월 창경궁에 박물관까지 완공을 하자마자 창경궁을 일반 대중에 공개해버렸고, 조선총독부는 거듭할 수록 기존의 전각들을 허물고 일본식으로 개조하며 '궁궐의 유원지화'를 심화시켰으며 더욱이 순종이 명시적으로 반대한 부분들(창경궁과 종묘의 연결로 파괴 등)에 대해서도 개조를 강행하는 등 애초부터 창경궁의 개조는 순종의 의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만 순종은 어느정도 창경궁에 식물관과 동물원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꼭두각시 황제인 순종 입장에서는 반대를 하기도 어렵거니와 궁궐에 무료로 박물관과 식물원, 동물원을 지어주겠다는데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창경궁으로의 복원 이후[편집]

이후에도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로 계속 남게 되었고, 주말이나 공휴일에 가족 단위 나들이 장소로 시민들에게 가장 각광받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잔재이므로 궁궐로 복원해야한다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에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 및 서울대공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창경원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그 자리에 궁궐을 복원하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과천시에 짓는 새 공원으로 이전하는 계획이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 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 사료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아쉽게도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되었다.

계획에 따라 창경원에 있던 놀이기구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고, 동물원과 식물원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재개장했다. 그리고 유원지와 동물원, 식물원 터는 거의 대부분 산책로로 다시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1단계(2015년 ~ 2021년)및 2단계(장기 계획)에 걸쳐 창경궁을 원형 복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기사 덕수궁과 경복궁 또한 동시에 정비되고 있는 만큼 예산 부담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9년까지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지상 보행길 복원에 들어가 율곡로는 지하 터널로 이어지고 지상에는 담장과 보행길이 함께 조성될 예정이다.

2019년 1월 1일부로 덕수궁과 마찬가지로 상시 야간개장으로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건축물[편집]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였다. 창경궁은 조선시대 왕궁 가운데 유일하게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향을 하지 않고 동향을 한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듯하다

현재 창경궁에는 조선시대 건물로는 명정전(국보 제226호), 통명전(보물 제818호), 홍화문(보물 제384호), 숭문당·함인정·환경전·경춘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관덕정·월근문·선인문·명정문과 명정전 회랑(보물 제381호)이 있고, 석조물로는 옥천교(보물 제386호), 풍기대(보물 제846호), 관천대(보물 제851호),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이 있다. 현 낙선재(樂善齊) 지역은 원래 창경궁에 소속되었었으나 지금은 창덕궁 경내에 있다.

창경궁의 정전이고 명정전이고, 명정전의 출입문인 명정문은 중문이며, 궁궐의 정문은 홍화문이다. 홍화문의 좌우에는 익각이 있고, 홍화문을 들어서면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옥천에 옥천교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 바로 명정문이 나오는데, 창경궁은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에 해당하는 문이 없어 홍화문에서 바로 명정문으로 들어가도록 구성된 점에서 다른 규모에 비해 규모가 작고 격식이 떨어진다. 창경궁의 중심 건물인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은 중심축에 맞추어 놓여 있으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지 않고, 주변 행각도 이에 맞추어 약간 틀어져 있다.

궁문[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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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북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마련돼 있다.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했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동궐도에는 우진각지붕이 아니라 팔작지붕으로 묘사되었다. 2009년경 퇴색한 단청들을 보수한 것이 오늘날 만나볼 수 있는 홍화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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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근문(月覲門)

홍화문 북쪽에 있는 문으로 특이하게 대문과 작은 문이 나란히 붙어있는 형태다. 정조가 친부 사도세자의 묘(廟)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하여 1779년(정조 3년)에 건립했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참배하러 거둥할 때에는 반드시 이 문을 경유했기 때문에 월근문이라 이름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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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문(宣仁門)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에 있는 문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초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8년)에 재건했는데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소실되어 1877년(고종 14년)에 복원했다. '동궐도'에 보면 현재의 월근문과 같이 솟을지붕의 외관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때 재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건립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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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춘문(集春門)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까워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했다 한다. 현재 이 문 외부 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외조[편집]

정전 권역[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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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문(明政門)

홍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 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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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明政殿)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

현존하는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 창경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의 겹처마 전각이다. 총 칸수 15칸으로, 다른 궁궐의 정전에 비해 규모가 제일 작다.[1]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인데,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랐기 때문이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세워졌으나 1592년(선조 25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려 1616년(광해군 8년)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명정전 앞 조정에 깔린 박석은 일제강점기에 뜯겨지고 잔디를 심어 훼손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복원 작업의 일환으로 다시 박석을 깔았는데, 창덕궁의 조정과 마찬가지로 자연박석이 아니라 인공박석이다.

편전 권역[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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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전(文政殿)

창경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 겹처마로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져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명정전과 함께 중건했다. 중건 당시 문정전이 남향(南向)인 것을 광해군이 문제로 삼아 동향(東向)으로 바꾸고 건물 기둥이 둥그렇지 않고 네모나게 각진 것을 문제 삼아 이를 모두 고치도록 하여 논란이 빚어졌으며, 당시 이미 건물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기에 다시 시공을 하려면 백성이 수고로움이 크고 옛부터 이런 형태였다는 신하들의 반박을 광해군이 받아들여 결국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이후에 헐린 것으로 보이며 바로 이 주변이 위에 거론한 창경원의 동물원과 식물원 자리였다. 지금이야 모두 서울대공원으로 모두 이전했으며, 현재 그 자리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산책로로 바뀌었다. 1984년부터 발굴 조사를 한 후 1986년 창경궁 중창 공사 때 중건되었다. 나중에 위패가 모셔지는 혼전(魂殿)으로 사용됨에 따라 전각 앞에 월랑(月廊)이 덧지어졌고 이는 동궐도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나 복원되지 않았다. 문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된 것은 신정왕후 조씨가 세상을 떠난 1891년(고종 28년)이 마지막이었다. 이곳의 뜰은 임오화변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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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문당(崇文堂)

창경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로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1830년(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명정전 뒤쪽에 있는 빈양문의 남쪽에 맞닿은 전각이다. 현판과 내부에 걸린 일감재자(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며 학문을 숭상한다는 뜻답게 영조 당시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양성했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내조(침전 권역)[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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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景春殿)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왕비와 대비의 침전이다. 정면 7칸, 전후퇴칸을 포함해서 측면 4칸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1484년(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다가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했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소혜왕후 한씨와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난 곳이자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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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전(歡慶殿)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 1484년(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했다. 그 후 1830년(순조 30년)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동왕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과 소현세자가 이곳에서 승하했고, 효명세자가 승하했을 때는 관을 모시는 빈궁으로 사용되었다가 화재가 발생해 재궁을 불속에서 가까스로 꺼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동궐도에는 누마루가 있지만 현존하는 건물에는 누마루가 시설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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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通明殿)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은 7칸이고 측면이 4칸인 이익공계(二翼工系)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했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통명전 서쪽에 있는 연못에는 석재 수통이 있다. 성종 때 구리 수통을 설치했다가 사치라는 신하들의 반발에 돌로 바꾼 것인데, 정작 설치 비용은 석재 수통이 더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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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養和堂)

창경궁의 침전 중 하나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 건물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했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년) 철종비 철인왕후 김씨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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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헌(迎春軒) · 집복헌(集福軒)

영춘헌은 창경궁의 북쪽에 있는 침전 건물이다. 정조의 서재였으며 이곳에서 승하했다, 정조 대 이후 왕들도 서재로 사용했다. 〈동궐도〉(1824년 ~ 1830년)에 그려진 영춘헌은 집복헌의 동남쪽에 있지만 전면 공간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별개의 영역을 형성했다. 그런데 1830년(순조 30년) 8월 1일 환경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함께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영춘헌은 1834년(순조 34년)에 중건된 건물로, 화재로 소실된 영춘헌을 다시 지으면서 이전과 달리 영춘헌과 집복헌이 이어져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부속 건물이 된, 현재와 같은 건축 형태가 완성되었다. 참고로 집복헌에서 1735년(영조 11년)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1790년(정조 14년)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재위 24년인 1800년 6월 승하했다.

기타 건축[편집]

사진 설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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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양문(賓陽門)

명정전을 돌아나와 만날 수 있는 명정전의 후문이자 창경궁의 내전권역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중앙간의 지붕이 솟아있는 솟을지붕 형식이다. 명정전 후면에 설치된 가설툇마루부터 빈양문까지 복도각이 쭉 연결되어 날씨가 궂을 때도 간편히 행차를 할 수 있게 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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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정(涵仁亭)

창경궁의 정자 중 하나로 환경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빈양문을 지나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건물이며, 내밀한 내전권역으로 가기 전에 거쳐갈 수밖에 없는 건물로, 사랑방 같은 역할의 정자라 할 만하다. 연혁으로는 1484년(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때에 재건되었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동궐도에는 함인정의 서쪽과 동쪽에 벽체를 둘러 막혀 있지만 현재는 사방이 트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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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觀德亭)

창경궁 춘당지 동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사정(射亭)으로 정, 측면 1칸에 초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공혜왕후 한씨가 잠례를 거행하던 장소에 1642년(인조 20년) 취미정(翠微亭)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나 1664년(현종 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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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식물원)

창경궁 후원 춘당지 북쪽에 위치한 서양식 건물로 1909년 목재와 철재, 그리고 유리로 지어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일제가 순종황제를 유폐시킨 후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며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해 건축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열대 지방의 관상 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했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있다. 건축 양식은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 박람회 전시 건물의 양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한국 근대 건축사의 보고 중 하나다. 원래는 창경원에 딸린 식물원이었으나 식물원 자체는 창경궁 복원 공사에 따라 1983년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하고, 1986년에 궁이 복원된 후에는 자생목본류를 중심으로 야생화를 함께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현재 대온실은 2004년 2월 6일에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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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지

창경궁 후원에 있는 연못. 본래 이 곳은 국왕이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사를 시연하는 땅인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이었다. 이를 일제가 1909년에 없애고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일본식 정원을 만들었다. 광복 후에는 이 위를 떠다니는 케이블카가 개통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철거되었다. 1980년대 복원 당시 한국식 정원으로 개조했다.

사라진 전각[편집]

  • 자경전 :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던 전각이다. 자경전에서는 경모궁이 한눈에 보였다고 한다. 고종때 경복궁 중건시 철거하여 경복궁의 자미당을 짓는데 활용했다. 일제때 장서각이 세워진 곳이다. 장서각은 1992년에 철거되었다.
  • 저승전 : 숙종의 모후이자 현종의 정비인 명성왕후 김씨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경종이 왕세자 시절 거처하였기에 경종의 사후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도 이곳에서 살았다. 이후 사도세자의 동궁전이 되었다가 화재로 전소되었다.
  • 통화전' : 임금의 편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순조 33년 화재때 불탄 이후 아직도 중건되지 않았다.
  • 낙선당
  • 시민당 : 창경궁의 동궁전으로서 왕세자나 왕세제가 대리청정을 하거나 정무를 보던 곳으로 쓰였다. 여기서 시민이라는 뜻은 백성이 이익되게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영조가 왕세제 시절 여기서 거처하였다.
  • 요화당
  • 취선당 : 숙종 때 희빈 장씨가 거처했던 전각. 한중록 기록에 의하면 저승전 건너에 위치하였고, 영조시대에 저승전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다. 영조 시대에 저승전과 함께 화재로 전소되었다.
  • 환취정
  • 궐내각사 : 일제가 식물원과 동물원을 세우기 전만 해도 존재했었으나 1900년 초반에 동물원을 세우면서 다 헐어버렸다.

관람[편집]

관람요금 및 시간[편집]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休宮日). ※휴궁일이 공휴일(대체공휴일 포함)과 겹칠 경우 개방하며, 이 경우 개방한 공휴일 다음의 첫 번째 비공휴일을 휴궁일로 한다.

관람시간
  • 매표 및 입장시간 : 09:00 ~ 20:00
  • 관람시간 : 09:00 ~21:00
  • 야간 상시관람 : 오후 9시까지
창덕궁 연계관람(함양문) 매표시간
  • 2월 ~ 5월, 9월 ~ 10월 : 09:00 ~ 17:00
  • 6월 ~ 8월 : 09:00 ~ 17:30
  • 11월 ~ 1월 : 09:00 ~ 16:30

※ 창경궁, 창덕궁 연계관람 가능 (별도 관람권 구입)

-매표장소 : 함양문 (창경궁 경내)
기간별 야간개방구역 이동시간 및 대온실 내부개방 일정
구분 11~1월 2월 3월~5월/9~10월 6~8월
야간개방구역

이동시간

오후5시30분 오후6시 오후6시 오후6시30분
대온실 내부 ☆ 11월(개방)

☆ 12월~1월

(오후6시부터 비개방)

오후6시부터 비개방 개방 개방

※ 야간개방지역은 홍화문, 명정전, 통명전, 춘당지, 대온실 권역이며, 기간별 이동시간에 따라 주간개방구역에 계신 분들께서는 야간개방구역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또한,대온실 내부도 식물 보호를 위하여 위와 같이 야간에는 기간별 제한 개방을 운영하고 있다.

관람요금[편집]

일반권
대상 개인 단체
내국인 만25세 ~ 만 64세 1,000원 800원 (10인 이상)
외국인 만 19세 ~ 64세 1000원 800원 (10인 이상)
만 7세 ~ 만 18세 500원 400원 (10인 이상)
무료(외국인)
  • 만 6세이하
  • 만 65세이상 ('14.10.1.부터 시행)
  • 한복착용자
  •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무료

(내국인)

※무료 관람대상자는 반드시 관련 증빙(주민등록증, 국가유공자증, 복지카드, 교원자격증, 관광통역안내사 및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증 등)을 매표소에 제시 후 무료입장권을 발권 받아 입장하시면 됩니다.


· 만 24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 국민(신분증 지참)

· 다자녀를 둔 부모로서 지방자치단체에서 발급한 다자녀(다둥이)카드 등 관련증빙서류를 소지한 부모

· 「모자보건법」제2조에 따른 임산부와 보호자 1인

· 국빈 및 그 수행자, 외교사절단 및 그 수행자

· 국 · 공립기관에서 정양 중에 있는 상이군경

· 공무수행을 위하여 출입하는 자, 한복을 착용한 자

· 학생인솔 등 교육활동을 위해 입장하는 초·중·고 교원(유치원 및 보육시설 교사 포함)

· 「장애인 복지법」에 따른 등록장애인 및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의 동행 보호자 1인

· 독립유공자 및 배우자, 애국지사, 선순위 유족

· 국가유공가 및 배우자, 상이(장애)1~3급자와 동행하는 보조인 1인, 선순위 유족

· 5.18 민주유공자와 배우자, 선순위 유족 및 특수임무유공자와 배우자, 선순위 유족, 참전유공자

· 고엽제후유증 등외자 및 수당지급 후유의증환자

·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및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증을 패용하고 단체관람객 인솔·안내를 위해 입장하는 자

· 「효행 장려 및 지원법」에 따른 효행우수자

·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에 의한 기초생활수급자

· 차상위계층 중 자활급여, 건강보험료 경감대상, 장애수당, 한부모 가정 중 하나 이상의 급여를 받고 있는 자 및 기타 보건복지부장관이 인정한 차상위계층

· 병무청 발급 병역명문가증 소지자(본인), 군복을 입은 현역군인

·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전수교육조교

· 문화재위원 및 전문위원

· 기타 궁능유적본부장 또는 해당 궁능유적기관의 장이 인정하는 자

·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 무료관람대상자는 반드시 관련 증빙을 제시하여야 함.

특별권
구분 이용시간 관련요금 비고
5대궁

통합관람권

관람 시간 내 대인 10,000원 - 구매일로부터 3개월간 사용가능

- 4대궁 및 종묘 매표소에서 구입 가능

상시관람권 한달중 언제나 10,000원 - 구매일로부터 1개월간 사용가능

- 사진 1매 제출

- 구입한 고궁만 입장 가능

점심시간

관람권

3개월간 점심시간중

12:00 ~ 14:00

3,000원 - 구매일로부터 3개월간 사용가능(10회한정)

- 구입한 고궁만 입장 가능

시간제관람권 1년간 점심시간중

12:00 ~ 13:00

30,000원 - 구매일로부터 1년간 사용 가능

(창경궁, 덕수궁)

100,000원 - 구매일로부터 1년간 사용가능

-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 14개능 가능

- 동반 1인 무료

교통[편집]

지하철[편집]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출구 300m 직진
  • 횡단보도 건너 왼쪽길로 직진 300m

버스[편집]

  • 혜화동로터리 방향에서 홍화문쪽으로(정류소번호 : 01002)
-파랑버스(간선) : 100, 102, 104, 106, 107, 108, 140, 143, 150, 151, 160, 162, 171, 172, 272, 301, 710
-공항버스 : 6011
  • 원남동사거리 방향에서 홍화문쪽으로(정류소번호 : 01224)
-파랑버스(간선) : 151, 171, 172, 272, 601

자동차[편집]

경부고속도로 - 서초IC - 반포IC - 한남IC - 한남대교 - 남산1호터널 - 청계천2가 사거리 - 종로2가 사거리 - 재동교차로(안국역) 우회전 - 돈화문 교차로 - 원남사거리 좌회전 후 직진 - 서울어린이과학관 맞은편 신호앞에서 좌회전 (서울어린이과학관 지나 바로 주차장)

주차장[편집]

창경궁 주차장은 유료이며, 국유재산 유상사용허가에 따라 공개경쟁절차를 통해 운영자가 선정되어 위탁관리되고 있다.

  • 주차 대수: 22대 (주차장이 협소하므로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
  • 주차장 운영시간 : 09:00 ~ 22:00 ※ 휴궁일 : 무료개방 (문화재 및 시설물 보수 시 이용제한)
주차요금
  • 일반차량 외 입차불가
  • 일반차량 : 승용차·승합차(15인승 이하)·트럭(최대적재량 1톤 이하)
  • 기본요금 : 30분 1,500원. 초과요금 매 10분 500원, 회전시간 10분 무료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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