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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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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백담사와 설악산
2008년의 백담사
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
백담사 소원돌탑
목조아미타불여래좌상

백담사(百潭寺)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외가평에서 동남쪽 약 8 km 되는 내설악 쪽에 있는 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한용운, 춘성 등이 수행하던 곳이고 제6공화국 성립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과 부인 이순자 여사의 은둔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개요[편집]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가야동 계곡과 구곡담을 흘러온 맑은 물이 합쳐지는 백담계곡 위에 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신라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세웠는데 처음은 한계사라 불렸으나 그 후,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가 백개 있어 백담사라 이름 붙였다. 십여차례 소실되었다가 6. 25동란 이후 1957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는 등 역사적 곡절이 많은 절이다. 자장율사의 유물소동일좌와 인조 때 설정대사에게 하양한 칠층소형옥탑 등이 있으며, 암자로는 영시암, 오세암, 봉정암이 있다. 그 밖에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머리를 깍고 수도한 곳으로 유명하다. 만해 스님은 민족와 국민을 위해 그곳에서 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집필을 하였다면, 전두환 전대통령 부부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참회를 하였다 한다. 백담사 앞 계곡 한쪽으로는 무수한 돌탑이 있는데, 백담사를 다년간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쌓은 것이다.

현재 백담사에는 극락보전, 나한전, 산령각, 법화실, 화엄실등 기존 건물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만해기념관과 만해 교육관 외에도 일주문, 금강문, 불이문, 만복전, 요사채, 만해당, 농암실, 적선당 등 24개의 건물들이 있어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에는 대한불교조계종의 기본선원으로 지정되었다. 한번 들어가면 일정 기간 동안 나올 수 없는 무문관이 개설되어 참선정진을 주로 하는 젊은 승려들의 수행요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역사[편집]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 자장(慈藏)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였으며, 그 때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고 한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에 실화(失火)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狼川縣)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더러워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전후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宗演)·광학(廣學)·각동(覺洞)·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였다.그러나 984년(성종 3) 다시 불탔으므로 승려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深源寺)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 때 법당·극락전·벽운루(碧雲樓)·선승당(禪僧堂)·동상실(東上室)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東庵)·원명암(元明庵)·백련암(白蓮庵)·오세암(五歲庵)·봉정암(鳳頂庵) 등이 있었으며, 동훈·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동하(洞下) 30리쯤 되는 곳에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고,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그러나 김시습(金時習)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愼悅) 등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 등과 인법당(因法堂)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한 뒤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최붕과 설담(雪潭)이 절을 중건한 1783년(정조 7)이었고, 이 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특징[편집]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칠성각(七聖閣)·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觀音殿)이 있다.

산내의 부속 암자는 현존하는 것보다 이미 폐허가 된 것이 많다. 한용운은 유지(遺址)만 남아 있는 역사 미상의 암자로서 동암·백련암·원명암·은선암(隱仙庵)·극락암(極樂庵)·오봉암(五峯庵)·복호암(伏虎庵)·지장암(地藏庵)·흥성암(興盛庵)·자장암(慈藏庵)·금선암(金仙庵) 등 11개가 있었다고 『백담사사적』에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폐허가 되어버렸지만, 1777년에 창건한 통선암(通禪庵)과 심적암(深寂庵), 1864년(고종 1)에 역암(饑庵)이 창건하였고 1919년에 훼철된 보문암(普門庵), 1884년에 창건한 축성암(祝聖庵) 등이 있다.

현존하는 부속 암자로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자장이 창건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함으로써 전국의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한 곳이 된 봉정암, 자장이 선실(禪室)로 사용하기 위해서 창건하고 주석하다가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뒤 관음암(觀音庵)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다섯살의 신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견성(見性)한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바꾼 오세암, 1648년 유학자 김창흡(金昌翕)이 은거하기를 맹세하고 창건한 영시암(永矢庵), 구전으로 전해져오던 옛 절터에 1903년 원호(源湖)가 세운 원명암(圓明庵) 등이 있다.

문화재[편집]

백담사의 문화유산과 주변 명소

백담사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제1182호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다. 극락보전 안에 주불로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은 영조 24년(1784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18세기 전반기의 불상 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담사의 산내암자인 봉정암은 자장율사가 중국 유학길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곳으로 유명하다. 백담사에서 산길로 11킬로미터나 더 올라가는 1,244미터 높이의 봉정암 뒷산에 보물 제1832호로 지정된 오층석탑(석가사리탑)이 놓여 있다.

백담사에서 수렴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계곡이 구곡담과 가야동으로 나뉘는데, 왼편 가야동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백담사의 또 다른 산내암자인 오세암이 나온다. 다섯 살 동자승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설악산의 긴긴 겨울을 무사히 나게 되었다는 영험설화가 동화와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암자다.

입장료 폐지[편집]

국립공원의 여러 전통사찰들이 입장료를 받는데에 반해, 백담사는 2007년에 입장료를 폐지하였다. 백담사도 엄연히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인데도 문화재 관람료를 받지 않음은 굉장히 이례적이다.

전설[편집]

낭천현(狼川縣: 오늘날 강원도 화천군)에는 비금사(琵琴寺)란 절이 있었는데, 주변 산에 짐승들이 많았으므로 사냥꾼들이 자주 찾아와 사냥하였다. 이런 살생 때문에 터가 부정해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에게 공양하였다. 산신령이 이런 부정함을 싫어하여 어느날 밤 신통력으로 비금사를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 옛 한계사(寒溪寺) 터로 옮겼다. 승려들이 이튿날 일어나 보니 절은 틀림없이 비금사인데 주변 지형은 생판 달라져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나타나 알려주었다.

"낭천에 있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느니라."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절이 옮겨질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린 사연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백담사는 그 뒤로 여러 번 불이 나서 위치를 옮겨가며 재건하기를 반복하였다. 또한 사찰의 명칭 또한 자주 바꾸었다. 조선 정조 7년(1783)에 현재의 '백담사'라는 사명을 지었는데, 여기에도 전설이 있다.

당시 주지승이 꿈을 꾸었는데, 도포를 입고 머리가 백발인 산신령이 나타나서 "대청봉에서 절 터까지 웅덩이가 몇 개나 되는지 세어보라." 하였다. 날이 밝자 주지가 일어나 꿈에서 들은 대로 산에서부터 절까지 물 웅덩이 수를 세어보았더니 꼭 100개였으므로 절 이름을 백담사(百潭寺)라고 지었다 한다.

체험 및 시설[편집]

템플스테이[편집]

백담사에서는 내국인을 위한 다양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백담사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예약 및 안내 클릭

이용안내[편집]

  • 휴일 : 연중무휴
  • 입장료 : 무료(버스 탑승 시 2,500원)
  • 주차장 : 있음

교통[편집]

▶ 자가용

서울 → 홍천 → 인제 → 용대리(약 2시간 30분)
강릉→양양 →속초 → 용대리(약 2시간)
강릉 → 양양 →한계령 → 용대리(약 2시간 30분)

▶ 시외버스

동서울 → 백담(용대리, 약 2시간 30분 소요) → 백담 매표소까지 도보 이동(10분 소요)

▶ 백담사 매표소에서 용대리 운행 버스

문의전화 : (주)용대향토기업 033) 462-3009
※ 시기별 운행시간이 다르므로 사전 문의 후 이용해야 착오가 없으며, 겨울에는 도로가 얼고 위험하여 운행이 중단될 수도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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