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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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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먼거리에 찍은 동명왕릉. 주변 자연환경과 비교해 보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사진 조선의오늘)
북한은 19974년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1994년 대대적인 복원건설을 통해 고구려 시조왕릉으로 성역화하는 작업을 마쳤다.(사진 조선의오늘)
동명왕릉 무덤안길
안칸벽면의 연꽃무늬
동명왕릉 제실
동명왕릉 앞에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 오이, 마리, 협보, 부분노 등 고구려 건국에 동참한 장수들을 묘사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동명왕릉 개건기념비.
동명왕릉 내부에 그려진 고구려 건국벽화 그림.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정릉사

동명왕릉(東明王陵)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한 고구려 시조 동명왕무덤이다. 북한의 국보 제 36호이다. 전설이나 설화상으로 주몽이 재위 19년 만에 사망한 후 첫수도 졸본에 묻힌 것으로 되어 있으나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왕릉을 이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요[편집]

동명왕릉은 고구려 고분 수 십 여기가 있는 평양의 진파리 고분군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즉 고주몽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북에서는 국보급 제36호로 지정, 200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974년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1993년 동명성왕의 음력생일(4월 1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5월 14일에 현재의 웅장한 규모로 새로 개건하였다. 개건 당시 김일성 주석은 동명왕릉을 현지지도하며 지난 세월 비바람에 깎인 높이를 기후변화에 맞춰 계산하도록 교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 결과 기존 9m 정도의 봉분 높이가 현재는 11m가 되었다. 북 학계에서는 동명왕릉에 대해 복원이 아닌 현재의 입장에서 새로 세운 ‘개건(改建)’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명왕릉이 개건되면서, 오이, 마리, 협보, 부분노 등 고구려 건국에 일조한 공신들의 문무석인상과 석마들도 세워졌다. 또한 제사를 위한 제당과 릉문, 그리고 고구려 시조를 기리는 비석과 김일성 주석의 친필이 적힌 개건기념비문도 세워졌다.

1974년의 발굴 전까지 동명왕릉은 벽화나 왕릉급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왕릉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1974년 본격적인 발굴 이후,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벽화가 등장했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과 같이 붉은색 옷을 입은 인물이 그려진 벽화였다. 붉은색의 옷은 왕급을 상징하기에 왕릉의 가능성이 높게 제기되었다. 또한 벽면과 천장에 연꽃무늬를 격자모양으로 그려 장식하였는데, 장식된 연꽃의 입체감이 뛰어나며 복원된 연꽃은 약 641개나 된다. 이러한 벽화 장식은 특수한 양식이라 주목된다. 발굴을 통해 왕릉급 유물도 수습되었는데, 이는 이전 일제의 도굴 과정에서 무덤 주변에 흘리고 간 유물들로 보이며 그 중에는 금관의 잔편도 확인된다. 동명왕릉은 좌청룡-우백호의 지세를 이루는 구릉지대에 위치하여 있다. 평원과 산악지대가 어우러져 사냥터로 이용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고구려는 사냥을 통해 잡아온 짐승을 제물로 제사 지내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입지는 평양으로 이장해온 시조의 무덤을 선정하기에 적합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무덤 앞에는 정릉사가 위치하고 있는데 북한의 학자들은 능을 지킨다는 의미의 '정릉(定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을 증거로 동명왕릉을 지키는 절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근거로 북 학자들은 일반 무덤이 아닌 동명왕릉임을 확신하였다.

한편 고구려를 건국한 시조의 무덤이 왜 후대에 천도한 평양지역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들게 한다. 『삼국사기』에도 동명왕은 졸본의 용산에 장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무신왕 3년에는 동명왕의 사당인 동명묘를 처음 세웠고, 이후 후대의 왕들은 졸본의 동명묘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북에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중요한 시조의 무덤이니만큼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 무덤도 옮겨왔다고 보고 있다. 또한, 대동강변에 위치한 부벽루 아래(청류벽)에는 동명왕이 기린마를 길들였다는 기린굴, 동명왕이 기린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어린 조천석 등의 유적이 존재하며, 평양으로 동명왕릉을 옮겨오며 설화 역시 평양으로 옮겨와 이후에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측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지만, 북측 학계에서는 이보다 240년이 앞선 기원전 277년으로 보고 있다. 『광개토왕릉비』, 『동명왕편』, 『삼국사기』 등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는 동명왕의 건국신화는 그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강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가 정을 통해 임신하였고, 홀로 남은 유화를 동부여의 왕인 금와왕이 거두었다. 유화는 상서로운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주몽이라는 이름은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주몽은 총명하고 용맹하기가 남달라 대소를 비롯한 금와의 아들들과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어머니 유화를 통해 이 계획을 미리 알아차린 주몽은 오이·마리·협보를 만나 남쪽으로 떠났다. 주몽이 엄호수(혹은 엄시수, 오늘날 송화강)에서 추격병에게 위험을 당했을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모둔곡에 이르러 재사·무골·묵거를 만나 이들과 함께 졸본(중국 료녕성 환인현)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주몽은 스스로 성을 고씨라 하였는데,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북녘의 국가관광총국이 1997년 발간한 조선광광안내 책자에 따르면 동명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동명왕릉은 평양시중심에서 동쪽으로 25km 떨어져있는 력포구역 룡산리에 자리잡고있다. 이 무덤은 5세기초엽에 만든것으로서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온것이다. 동명왕릉은 고주몽(동명왕의 본래이름)의 생일 2,290돐이 되는 주체82(1993)년 5월 14일을 계기로 다시 개건하였다.
220여정보의 부지안에 왕릉구역, 정릉사구역, 신하무덤구역이 있다.
왕릉구역에는 동명왕릉개건비, 중문, 왕의 무덤, 문무관돌조각상들, 제당 등이 있다. 왕의 무덤은 바닥이 4각형인데 큰 돌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우에 흙을 높이 쌓아올려 봉분을 만든것이다.
기단한변의 길이는 32m이고 무덤전체높이는 11.5m이다. 제당에는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그 9개의 벽면에 22개의 주제를 형상한 벽화들이 있다.
정릉사구역은 회랑으로 둘러친 마당한가운데 있는 8각7돌탑을 중심으로 중문, 보광전, 룡화전, 극락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하무덤구역에는 고주몽에게 충실했던 15기의 신하무덤들이 있다."

외부 구조[편집]

평양의 동남쪽 제령산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분구에 2단 이상의 돌기단이 둘러 있고 묘역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고구려 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큰데, 둘레는 34x34m, 높이는 11m이다. 왕릉은 1.5m 높이의 계단식으로 된 돌기단 위에 흙으로 쌓은 돌칸흙무덤이며,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다.

널길은 바깥길과 안길로 구분되는데, 바깥길에서 안길로 들어가는 곳과 안길에서 널방으로 들어가는 곳에 문을 설치하고 잠금 장치를 두었다. 봉분 주위에는 기단에서 사방 5m 정도로 강자갈을 깐 묘역이 있다.

내부 구조[편집]

안길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좁아진다. 널방은 사각 평면에 동서 4.21m, 남북 4.18m, 높이 3.8m로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천장은 꺽음천장으로 짰다.

입구[편집]

왕릉 입구에는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로 1413년(태종 13)에 최초로 종묘(宗廟)와 궐문(闕門)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標木)을 세워놓았는데, 이것이 후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벽화[편집]

벽화는 널방의 벽과 천장에 바탕색을 칠하고 지름 12cm의 연꽃을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맞추어 그렸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고, 흔적만 일부 남아 있는 상태다.

왕릉 주변[편집]

왕릉 뒤쪽으로 온달평강공주의 묘를 포함해 10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고, 앞쪽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정릉사가 위치해 있다. Eh 조선 말기에 제주에서 공수해 심었다는 소나무들이 왕릉 안쪽을 향해 인사하듯 자라고 있다. 6.25때 절반이 소실됐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400~600년 수령의 소나무들 1500여 그루 때문에 개미조차도 없다고 한다.

정릉사[편집]

정릉사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릉을 옮겨올 때 이 앞에 지어진 절로 1974년 5월부터 11월까지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 연구팀이 밭을 2m 파내며 발굴했다고 한다. 발굴 당시 ‘정릉능사’ 등이 적힌 그릇조각들을 보고 이곳이 정릉사임을 알게 됐다고.

5세기 초에 지어진 이 절은 발굴 당시 절터만 남겨져 있었는데 탑을 중심으로 18채의 건물터 등이 발견됐다.

이 절은 8각탑을 중심으로 보광전, 극락전, 용화전 등 고구려의 고유한 1탑 3금당 형식의 건물로서 철저히 터에 근거해 복원을 한 것으로 기와도 고구려 때 유행하던 단청을 본따 구리지붕 그대로다.

동명왕의 무덤인가?[편집]

북한이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 무덤의 구조가 밑에 통구의 고구려 고분처럼 3단으로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내부에 석실을 만들어 벽화까지 그리고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덮은, 평양 천도 이전 국내성 시절의 고구려에서 무덤을 지을 때 주로 썼던 적석총(돌각담무덤) 양식과 평양 천도 이후에 주로 나타나는 석실분(돌간흙무덤)의 중간 형태를 띤다는 것, 그리고 동명왕릉의 무덤 옆에 위치한 절터 우물에서 '정릉(定陵)', '능사(陵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이 지어진 목적이 애초에 능(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능'이란 왕의 무덤을 의미한다는 것.

졸본에서 사망해 졸본에 묻혔을 동명성왕의 무덤이 왜 평양에 있느냐는 반론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같이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 주장을 내놓는데, 외적의 침입 때마다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다보니 수도를 옮기면서 동명성왕릉 같은 중요한 무덤은 평양으로 옮겨서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

문제는 이게 어디까지나 '그러그러해서 그럴 것'이라는 썰 정도의 단계에 지나지 않는 것을 마치 확실하게 검증되어 흔들리지 않는 사실(팩트)인 것마냥 단정짓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무덤이 동명성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북한이 뜬금없이 내세운 것은 아니고 이미 고려나 조선 시대에도 그러한 주장이 존재했다. 고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및 《고려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평양의 이 무덤을 동명성왕의 무덤이라고 기록했고, 대표적으로 18세기 조선 후기의 사학자 순암 안정복 역시 현재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동명왕에 대한 숭배와 그에 따른 제의(祭儀)는 고구려 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고려시대에는 평양(서경)이 제2의 수도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시조 동명왕에 대한 존숭의 의미로 무덤 앞에 신분이 높은 자라도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가 세워져 있었다.

조선의 역대 국왕들은 동명왕 무덤의 보전과 관리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고, 더불어 동명왕 사당을 유지하고 제사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국왕이 직접 제수비용을 내리면서 무덤과 사당에 대한 수리를 하게 하였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고종 때에는 동명왕 무덤을 동명왕릉으로 부르고, 대대적인 개수공역을 시행하고 사당도 정비하였다.

이와 같은 동명왕릉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는 동명왕릉 위치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고려시대 이래로 지속되어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북한도 1974년 이래 지속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학계에서는 되려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후보들은 본 동명왕릉을 포함하여 길림성 집안시 소재 장군총, 평양 동쪽의 광대산 자락의 토포리 대총, 그리고 한왕묘(경신리 1호)가 있다.

토포리 대총이야 장수왕릉 후보에서 많이 뒤쳐진 편이지만 와당이 출토된 '동명왕릉', 한왕묘, 장군총은 여전히 각 연구자마다 와당의 변천을 기준으로 장수왕릉일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한다. 그 밖에도 묘실의 구조에 따른 판단도 있지만 고구려 석실이 장수왕 시절까지도 통일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널리 인정받는 무덤으로 딱 하나를 꼬집기는 어렵다. 거기다가 고구려 왕릉이 왕릉급 고분과 실제 왕들이 딱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정하기가 어렵다. 일부 논자들은 장군총을 일종의 허묘로 축조하고 동명왕릉 또는 한왕묘를 실제 무덤으로 축조했으리라 보기도 한다.

이외에 동명왕릉이 실제로는 문자명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주홍규 2019).

하지만 이 무덤이 동명성왕 고주몽의 진짜 무덤이 아니라고 한들 무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고구려 왕릉급 무덤인 것은 물론, 이 무덤이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장수왕의 무덤이라고 확인된다면, 장수왕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어마어마해진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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