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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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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 Cattle)는 소과 우속(牛屬)에 속한 초식동물로, 가축의 하나이며, 학명은 Bos taurus로 책정된다. 어린 개체는 송아지라 부르며, 소는 사람에게 다음으로 일찍부터 가축화되어 경제적 가치가 높아 세계 각지에서 사육되고 있다. 소가 가축화된 것은 기원전 7000년 ~ 6000년경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사육되기 시작하였고, 점차 동서로 퍼지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소는 농사에 많이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80년대까지도 흔히 볼 수가 있었으나, 현재는 소가 하던 일을 트랙터가 완전히 대체하였기 때문에 소로 농사를 짓는 풍경은 보기 힘들어졌다. 물론 기계를 못 쓸 정도로 험한 곳에서는 아직도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그나마도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는 어르신들이 하는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수지가 안 맞기 때문에 아예 경작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 할 교통수단이 없었던 시절에는 때는 타고 다니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말 한 필의 가격이 어마어마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꿈도 못 꿀 정도의 큰 돈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웬만한 말은 전부 파발마 혹은 군마(軍馬)로 쓰이거나 지배계층의 사냥 등에 사용됐던지라, 사실 평민 이하로는 말을 타고 싶어도 탈 기회조차 흔치 않았다. 그래서 보통 걸어다녔는데, 그래도 형편이 좀 나아서 소를 치는 농부는 먼 거리에 화물을 옮길 일이 생기면 소가 힘이 장난 아니게 센 점에 착안해서 태워 트럭처럼 물건을 싣고 다녔으며, 자기도 위에 올라타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양반들 중에서도 청렴한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여기서 더 나가서 느린 소의 움직임이 풍류를 즐기기에 좋다고 하여 나귀 대신 소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소는 보통 느린 게 아니라서, 짐이 많은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해선 그냥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경우가 더 많았고, 심지어 더 빨랐다. 대신 소는 매우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나름 고급기술이었던 승마술을 익히거나 할 필요가 거의 없었고 심지어 안장 없이도 등에 타고 다니기가 가능할 정도로 느리지만 안정적인 움직임을 자랑했다.

마소보다 훨씬 발전한 인력거자전거, 전철 등이 발명되고 실용화되고 나서는 거리에서 소는 커녕 말도 보기 힘들어졌고 이젠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도로교통법에 의거해서 소와 말은 여전히 도로에서 합법적으로 타고 다닐 수 있는 차마로 분류되며, 현대에 도로로 몰고 나와 타고 다녀도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지역 명물 수준으로 드물게 소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차들의 교통흐름에 심하게 지장을 줄 정도로 느리거나 길을 막고 있으면 신고를 받은 경찰이 찾아올 순 있다. 그래도 어쨌거나 합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소를 최대한 갓길 쪽으로 옮겨서 타고 가게 하는 정도의 조치만 취해지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경찰이 친절히 경찰차로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수도 있다.

우차법[편집]

'삼국사기'에는 신라 눌지왕 22년(438) 백성에게 소로 수레를 끄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우차법도 역시 문헌의 기록보다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이때부터 시작된 우차의 법이 민간에 이용됨으로써 교통·운반의 수단으로 경제생활에 큰 변혁을 가져왔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안악고분벽화에도 바퀴가 큰 이륜차가마, 마구간 같은 것, 여물을 먹고 있는 소의 모습과 지금의 한우처럼 코뚜레를 하고 있는 그림이 있다. 경주98호고분에서도 진흙으로 만든 우차가 출토된 것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는 소의 이용이 경제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래 희생용으로 쓰던 소가 수레를 끌고 논밭을 가는 데에 쓰게 된 것은 철의 사용이 무기제조에 국한되어 있다가 농기구 제작에 이용된 것처럼 농업사상 혁명적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소가 농업경영의 한 요소가 됨으로써 이때까지 관련성 없이 떨어져 있던 농업과 목축의 관계가 축산이 농업 속에 포함되는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소달구지[편집]

본디 이름은 달구지이지만, 소가 끌면 '우차(牛車)', 말이 끌면 '마차(馬車)'라고 부르며, 소가 끌어도 '마차'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 달구지는 바퀴 수가 두 개와 네 개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앞의 것은 북한지방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중부 이남의 평야지대에서 많이 썼다.

두 바퀴 달구지는 반드시 소가 끌었으며, 소 등에 길마를 얹지 않고 쳇대를 길게 하여 소의 등에 걸어 둔다. 그리고 쳇대가 등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양쪽에서 목 앞으로 끈을 둘러 감았다. 이처럼 길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험한 길에서 달구지가 넘어지거나 언덕으로 굴러떨어질 때 소나 말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또 이 지역 달구지 바퀴는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하여 매우 큰 편인데, 이렇게 해야만 상틀이 높아져서(지상에서부터의 높이는 5자) 바닥이 바위나 돌 등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한편, 네 바퀴 달구지는 마소가 함께 끌었으나, 도회지에서 짐을 나르는 경우는 말을, 농가에서 곡식 따위를 운반할 때는 소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이것은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작으며 거덜이가 장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우로 움직여서 방향을 잡는다. 달구지 바퀴는 모두 목재이며, 텟쇠를 둘러서 보강한다. 한때는 나무 바퀴 대신 자동차 타이어를 쓰는 일이 많았다.달구지로는 곡식 가마니를 비롯하여 잔 모래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짐을 운반한다. 예전에는 도회지에서도 대부분의 짐을 달구지를 이용하여 운반했으며 중소도시에서 흙·모래·시멘트 등의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데 사용하였다. 지금은 차나 경운기 등으로 대체되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 틀의 무게는 1,500∼2,000㎏이다.

조선시대 교통수단으로서의 소의 모습[편집]

1900년대의 무학재. 영세한 나무꾼이 산에서 긁어 모은 솔가지와 가랑잎을 소에 잔뜩 싣고 서울 홍제동 쪽에서 영천 쪽으로 좁고 높은 무학재 고개를 넘어오고 있다. 서울 도심 지역으로 팔러 오는 것이다.  
나무꾼 땔감인 솔가지를 싣고 살 만한 집을 찾아다니는 나무꾼.  
통나무 수레바퀴 소 한 필이 끄는 짐수레인데 수레바퀴는 두 개씩이다. 경기 이북에 많았다  
짐만 나르는 소들. 소등에 짐을 실을 때는 등 양쪽에다 똑같은 무게로 지운다.  

참고자료[편집]

  • 〉, 《나무위키》
  • 〉, 《위키백과》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달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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