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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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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국기
잔지바르 스톤 타운

잔지바르(영어: Zanzibar, 스와힐리어: Zanzibar, 아랍어: زنجبار)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위치한 자치령으로, 웅구자섬(잔지바르섬)과 펨바섬을 중심으로 한 잔지바르제도로 이루어져 있다. 잔지바르에 있는 스톤 타운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육두구, 계피, 후추 등의 향신료 산지로 유명하다. 잔지바르는 현재도 드물게 향신료섬(Spice Islands)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잔지바르 정부는 1985년부터 약 1만 9000명을 동원하여 지역을 홍보했고, 2016년에는 약 37만 6000명을 동원하여 홍보하기도 하였다. 잔지바르는 아베이드 아마니 카룸 국제공항을 통해 비행기로 이동할 수 있으며, 잔지바르 붉은콜로부스가 잔지바르에서만 서식하고, 잔지바르 표범이 잔지바르에서 서식했었지만 현재 멸종된 상태이다. 또한 잔지바르도 마찬가지로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의 피해를 입고 있다.

잔지바르(Zanzibar)라는 이름은 페리시아어인 zangbâr (زنگبار [zæŋbɒːɾ])로부터 유래하였는데, Zang (زنگ [zæŋ], "black") "검은"이라는 단어와 bâr (بار [bɒːɾ], "coast") "해안"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검은 해안"를 뜻하며 의역을 하면 "흑인의 땅"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개요[편집]

역사[편집]

잔석기 도구의 발견으로 약 2만년 전부터 잔지바르에 인류가 거주한것으로 추정한다. 1세기에서 3세기 사이의 그리스-로마 문서인 에리트레아 해의 페리플러스(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에서는 웅구자섬으로 추정하는 메누티아스(고대 그리스어 : Μενουθιάς ) 섬을 언급했다.

9세기부터 잔지바르의 스와힐리 상인들은 내륙과 인도양 양쪽에서 온 장거리 무역상들의 중개업자로 활동하였다. 페르시아, 인도, 아랍 무역상들은 금, 상아, 호박과 같은 동아프리카 상품을 얻기 위해 잔지바르를 자주 방문했고 그 후 아시아로 수출했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대호수잠베지안 지역에서 온 캐러밴 무역상들이 수입품, 특히 인도 원단을 거래하기 위해 해안으로 왔다. 포르투갈이 도착하기 전에는 남부 마을인 웅구자 우쿠(Unguja Ukuu)와 키짐카지(Kizimkazi)와 북부 마을인 툼바투(Tumbatu)가 무역 중심지였다. 잔지바르는 스와힐리 사람들 무역상들의 중개자, 촉진자 역할을 하면서 부를 증가시켰다. 중앙 아프리카인도양 문화 사이의 이러한 상호작용은 부분적으로 스와힐리 문화의 진화에 기여하였으며 아랍 문자 문학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반투족 언어이긴 하지만, 오늘날 스와힐리어는 일부 차용된 요소, 특히 아랍어에서 차용된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프리카아시아의 많은 외국 무역상들은 잔지바르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과 결혼했다. 특히 몬순 바람이 만연한 탓에 6개월 동안 해안에서 월동한 아시아 남성들은 동아프리카 여성과 결혼했다. 동아프리카의 모계 전통이 중요했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무역상들이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부계 민족 정체성을 물려받았다.

포르투갈의 식민지화[편집]

1498년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잔지바르에 도착하였으며 1503년 또는 1504년, 루이 루렌소 라바스코 마르케스 선장이 잔지바르에 도착하여 평화의 대가로 술탄에게 조공을 요구하였고 잔지바르는 조공을 바침으로 포루트갈의 일부로 넘어 갔다. 잔지바르는 거의 2세기 동안 포르투갈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일부가 되었고 총독에 의해 관리되었다. 1571년경에 잔지바르는 포르투갈 제국의 서부 분할의 일부가 되었고 모잠비크에서 관리하였다. 1591년 웅구자를 방문한 최초의 영국 선박인 에드워드 보나벤처는 포르투갈의 요새나 수비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635년경에 포르투갈은 몸바사의 술탄이 포르투갈 주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펨바 섬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포르투갈인은 1498년에 동아프리카에 도착하여 이슬람 아랍어를 사용하는 귀족이 있는 해안에 여러 독립 도시를 발견했다. 포르투갈은 그들을 "흑인"이라고 부르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인구를 명확히 구분했다. 포르투갈인들과 이들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부분 적대적이었지만 16세기 동안 이 지역에 대한 확고한 권력을 확립하고 조공을 바치던 술탄의 도움으로 통치했다. 포르투갈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어서 기존의 지역 지도자와 권력 구조의 손에 행정이 맡겨졌다. 이런 관리 구조는 1631년 몸바사 술탄이 포르투갈 주민들을 학살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후 포르투갈은 유럽 총독을 임명했다. 무역 억제와 지역 권력의 약화로 인해 몸바사와 잔지바르의 스와힐리 엘리트들은 유럽인들을 몰아내는 데 도움을 줄 오만 귀족들을 초대했다.

잔지바르 술탄국[편집]

1698년에 잔지바르는 오만 술탄국 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784년에 오만 통치에 대한 짧은 반란이 있었다. 잔지바르 귀족들은 19세기 전반에 오만 상인 왕자들을 포르투갈인보다 선호하여 잔지바르에 정착하도록 초대했다.

1890년경까지 잔지바르의 술탄들은 몸바사다르에스살람을 포함한 잔즈 로 알려진 스와힐리 해안의 상당 부분을 통제했다 . 1886년부터 영국과 독일은 자신들의 제국을 위해 잔지바르 술탄국의 일부를 획득할 계획을 세웠다. 1886년 10월, 영국-독일 국경 위원회는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의 해안을 따라 19km 넓이의 좁은 지역을 잔즈로 정하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거의 모든 잔지바르 영토가 유럽 제국에 넘어갔다.

술탄들은 잔지바르 군도의 무역과 현금 작물의 경제를 아랍의 지배 귀족들과 함께 발전시켰다. 상아는 주요 무역 상품이었다. 향신료와 정향나무로 세계적으로 유명했고 재배 농장이 개발되고 군도의 상업은 점차 인도 아대륙의 무역상들의 손에 넘어갔다.

술탄으로서 14년 동안 통치하는 동안 Majid bin Said는 동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 19세기 중반, 잔지바르시의 말린디는 매년 50,000명의 노예를 통과시키므로 중동과의 노예 무역을 위한 스와힐리 해안의 주요 항구로 되었다.

영국 보호령[편집]

1822년 무스카트의 영국 영사는 술탄 사이드를 압박하여 노예 거래를 중단시켰다. 술탄은 영국과 맺은 일련의 노예제도 반대 조약 중 첫 번째인 모레스비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아프리카의 케이프 델가도에서 인도 해안의 디우 헤드로의 모레스비 선 남쪽과 동쪽의 노예 이동을 금지했다.

1890년에 잔지바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890년부터 1913년까지 당지 비지어(vizier)들을 통하여 통치했으며 그들은 식민 사무소에서 임명한 고문의 감독을 받았다. 1913년부터 총독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로 전환되었다. 1896년 8월 27일 아침, 영국 해군 의 함선이 베이트 알 후쿰 궁전을 공격했고 38분 후에 휴전이 선언되었고 오늘날까지 포격은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1963년 12월 10일, 영국 잔지바르법에 의해 영국은 보호령을 폐지하고 영연방 내 독립국으로서 잔지바르에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보호국이 폐지되자 잔지바르는 술탄 치하의 연방 내 입헌군주제가 되었다.

1964년 1월 12일 술탄 잠시드 빈 압둘라는 잔지바르 혁명 중 퇴위하고 술탄국은 아프로-시라지당이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 잔지바르 인민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혁명으로 2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난민들, 특히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섬을 탈출했다.

1964년 4월, 공화국은 탕가니카 본토와 합병했다. 탕가니카 연합 공화국잔지바르 연합 공화국은 곧 두 개의 이름을 혼합하여 탄자니아 연합 공화국으로 개명되었고, 잔지바르 연방은 그 안에서 자치 지역으로 남았다.

정치[편집]

잔지바르는탕가니카와 별개로 자치권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법적으로 탄자니아 부통령을 잔지바르에서 뽑도록 규정되어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도 인구수에 비해서 큰 편이다.

탄자니아 혁명당이 일당 독재하는 탕가니카 본토와는 다르게 잔지바르에서는 시민연합전선의 힘도 강한편이며, 그래서 선거에서 여러번 접전이 벌어져서 충돌이 벌어진적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잔지바르 내에서도 웅구자 섬펨바 섬이 따로 놀기 때문이며, 잔지바르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아랍인을 축출하자 따로 독립하려고 하기도 했고, 이후로도 잔지바르 정부에서 펨바 섬에 별로 신경을 안써준다는 인식 때문에 불만이 많다. 한때 갈등이 심했을 때는 펨바 섬에서 수백 명의 난민이 발생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부통령 사미아 술루후 하산이 전임 존 마구풀리 대통령이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경제[편집]

잔지바르, 주로 펨바섬은 한 때 1970년대 동안 세계 일류의 정향 생산지였지만 연례 정향 판매가 1970년대 이래로 80%가량 폭락한 상태이다. 잔지바르는 현재 세계 정향 공급에서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3위이지만 인도네시아는 세계 정향의 공급의 75%, 잔지바르는 7%를 차지하므로 격차가 크다.

잔지바르는 향신료, 해초, 품질이 좋은 라피아를 수출한다. 또한 큰 어장을 갖고 있으며 환목선 생산을 한다. 관광은 주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2008년 5월과 6월 동안 잔지바르는 정전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섬주민들은 5월 21일에서 6월 19일까지 전력이 없거나 디젤 발전기같은 전기 생산의 대체 방안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거의 한달 동안 지내야만 했다. 이 정전은 주로 국제적인 관광 사업에 기반을 둔 섬의 빈약한 경제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지리[편집]

잔지바르는 인도양의 섬들 중 하나이며 탕가니카(탄자니아 본토)와 인접한 스와힐리 해안에 위치해 있다.

웅구자섬은 해협에 의해 탄자니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으며, 가장 좁은 곳은 36.5km이다.이 섬의 길이는 약 85km, 폭은 39km이며 면적은 1,464km²이다. 웅구자는 주로 낮은 곳에 있으며, 최고점은 120m이다. 웅구자는 산호초가 주렁주렁 달린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특징이다.

펨바 섬은 탄자니아 본토와 56km 너비의 해협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이 섬의 길이는 약 67km, 폭은 23km이며 면적은 985km²이다. 펨바는 또한 주로 낮은 곳에 있으며 최고점은 95m이다.

잔지바르는 열대 몬순 기후에 속하며 북반구 겨울에 해당하는 여름의 높은 기온은 북동 몬순(키스와힐리에서는 카스카지로 알려져 있음)과 관련된 강한 바닷바람에 의해, 특히 북쪽과 동쪽 해안에서 낮아진다. 적도에 가깝기 때문에, 섬들은 일년 내내 따뜻하다. 강우량은 남서 몬순(키스와힐리에서는 쿠시라고 함)과 관련된 3월, 4월, 5월의 주요 최대치와 11월과 12월의 두 번째 최대치로 나뉜다.그 사이의 달은 비가 적게 오며, 7월에 가장 적게 비가 내린다.

인구[편집]

잔지바르의 첫 영구 거주자는 1000년경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에 도착하기 시작한 반투 하디무와 툼바투의 조상으로 보인다. 1960년대 초 잔지바르의 짧은 독립 기간 동안, 정치적 분열은 인구의 약 56%를 차지하는 시라지(잔지바르 아프리카인)과 17%정도를 차지하는 잔지바르 아랍인들 사이에서 일어 났다. 잔지바르 아랍인들은 대부분 19세기에 오만에서 이주한 아랍인들의 후예이다. 오늘날 잔지바르에는 스와힐리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그외에 페르시아인, 소말리아인, 인도인뿐만 아니라 많은 아랍인들도 있다.

동영상[편집]

지도[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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