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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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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航海, voyage)는 를 타고 바다 위를 다니는 것을 말한다. 간혹 SF소설 등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우주공간을 이동하는 것도 항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항해를 담당하는 항해사들은 고급 선원인 상선사관에 속한다. 항해사들은 승진하면 선장이 된다. 기관사관이 선장이 될 일은 없으니 해군과 마찬가지로 상선단에서도 항해가 가장 잘 나가는 직종인 셈이다. 단, 배를 내리면 승선 경력으로만 승부를 봐야 되는 경우가 있어 육지에서도 일할 게 많다는 이유로 기관을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항해의 원칙[편집]

항해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해를 하는 시점에서의 이동물체(여기서는 선박으로 한정함)가 정확한 위치를 바탕으로 정해진 목적지로 이동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항해학원론에서는 두 가지의 원칙을 준수하여 항해를 하는 것을 항법의 적용이라 칭하며 이에 대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 Where am I : 말 그대로 현재 내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육지에서는 위치를 찾을 때 주변의 높은 건물이나 주소를 이용한다. 그 외에도 육지에서는 항상 네비게이션과 주기적인 지도 업데이트를 통해 내 위치를 바로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바다에서는 이런 육지에서의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된다. 육지와 가까운 해역에서야 지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어느정도의 촉과 지도를 읽는 지식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겠지만 망망대해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게다가 바다는 항시 높은 파다와 거센 바람의 위협이 항시 존재하고 기상현상에 의한 시정저하 역시 눈으로 보는 항해 즉 지문항해에 있어서는 큰 변수가 된다. 물론 요즘에는 전파항법과 gps가 항시 존재하는 터라 좌표의 개념만 이해한다면 눈으로 보고 방향을 읽고선 이동할 수 있지만 이 역시 기초적인 항법의 이해를 필요로한다. 결론은 선박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항해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이면서도 항시 이루어져야하는 액션이다. 괜히 항해사들이 몇 명씩 배에 타면서 24시간 당직을 돌아가며 선박의 위치를 지도에 작도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는 것이 아니다. 흔히 항해사하면 큰 배의 키를 돌리는 그런 장면을 떠올리지만 그건 조타수라고 하는 보직이 따로 존재하며 항해사는 매 시간 선박의 위치를 작도하고 항해의 시작과 끝까지 항시 선박의 안전을 위해 해도 상에 표기된 계획항로를 따라 선박이 제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며 조타수와 같이 배를 몰아나간다.
  • 두번째론 How to go 이다. 일단 선박의 위치를 구하는 것이 안정화되었다면 둘째론 원하는 목적지까지 어떻게 가야 하냐는 것이다. 지구는 적도를 기준으로 위도 0도에서 90도 경도는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동서 180도씩 나뉜다. 해도 상에는 모든 위치가 좌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좌표란 위경도를 일컫는다. 보통 해도에서 위도의 단위인 도.분.초는 일정 거리를 나타낸다. 1도는 60분. 1분은 60초이다. 여기서 1분은 대략 1항해마일(1.852km) 이며. 만약 경도의 변화없이 위도 37도 59분에서 위도 37도 20분으로 남향 이동한다 하면 대략 40항해마일을 이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현 위치에서 목적지의 위경도를 향해 이동할 때의 거리를 알아내고 방향을 잡아야만이 항해가 가능하다. 물론 실제론 직선방향으로만 주파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다양한 지역과 섬 게다가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저수심해역 등 다양한 변수가 항해에 영향을 미친다. 그에 따라 항해사들은 해도 상에 변침점(waypoint)를 설정해 그에 맞는 코스를 잇게된다. 즉 육지에서 보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갈 때 국도를 타느냐 고속도로를 타느냐 부터 중간에 어느 휴게소를 들를 것이며 연료는 어떻게 채울것인가에 해당하는 것이 항해의 계획에 전부 포함된다. 사실 간추려 표기했지만 입항부터 출항 그리고 항해수역에 따른 위치의 산출과 당직항해사의 모든 항해업무를 총괄하면 너무 복잡해지기에 단순히 설명하였으나. 실제로 24시간 일어나는 모든 변수가 항해의 모든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열심히 대양을 종횡무진하는 항해사들을 위해 경의를 표한다.

항해술[편집]

항해술선박해상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까지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기술 및 과학이다.

필요한 시점에서 선박의 위치를 알아내고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필요한 침로(針路)를 구하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이다. 항해라는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선체의 운동에 기초를 두는 선박의 조종술에 관한 것이 포함된다. 항해 또는 항해술을 뜻하는 영어 navigat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navigere로서, navis '배'와 agere '움직이다, 인도하다, 이끌다'에서 유래되었다.

선박의 위치를 구할 때는 육상·해상의 물표를 관측하거나, 이러한 물표가 보이지 않을 때는 수심을 연속으로 측정하여 위치를 알아내며, 대양에서는 천체의 고도를 측정하여 위치를 계산해 내기도 한다. 그리고 특정한 전파를 수신하여 선박의 위치를 구할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선박의 위치는 보통 위도와 경도로 표시된다. 육지를 시야에서 벗어난 원양항해가 고대문명시대에도 있었음은 문헌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

BC 600년경 고대 크레타 문명 시대에는 크레타와 이집트 사이에 무역이 있었고, 페니키아인들은 영국의 콘월에 주석을 무역하였으며, 1,200년 후에는 바이킹이 대서양을 건너 그린란드와 북아메리카로 갔다고 하는데 이들이 해안을 따라서만 항해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이 원양항해를 할 때에는 북극성·큰곰자리·작은곰자리 등의 별과 별자리 그리고 태양을 항해의 지표로 삼았을 것이다.

항해술의 과학화는 15세기부터라 할 수 있다. 1419년 포르투갈 항해 왕 헨리가 보다 정확한 태양의 적위표(赤緯表)를 만들기 위해 천문대를 건설하고 항해연습소를 설치하여 항해가를 양성한 것이 항해에 대한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연구의 출발이라 한다. 그 시대의 역사적인 대항해를 시대순으로 살펴보면 1487년 포르투갈 항해가 B.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1492년 이탈리아 탐험가 C.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1498년 포르투갈 항해가 V.d. 가마의 인도항로의 개척, 1519∼1522년 에스파냐 항해가 F.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 등으로 지리적 발견시대의 항해였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범선(帆船) 시대였으나 원양항해에 필수적인 항해용 자기 컴퍼스, 천체의 고도측정기, 태양·달·행성·항성의 그리니치 시각(GHA) 또는 항성시각(恒星時角:SHA)과 이들의 적위(赤緯:Dec)를 얻을 수 있고, 그 외에 태양·달의 출몰시간, 박명(薄明) 시간, 자오선 통과시간 등 항해에 필요한 천문자료가 수록되어 있는 천측력(天測曆) 등이 있었다. 당시의 천측력은 태양의 매일 적위와 태양·달·행성의 경도를 수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모험 항해가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중엽에는 시진의(時辰儀:chronometer)가 제작되어 천문항해의 난제를 해결하였고, 19세기에는 천문학적 위치선의 개념이 도입되어 천측선위는 보다 쉽고 간편하게 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욱 발전하여 수정차법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무선통신공학의 발전과 더불어 전파항해가 급진적으로 발달·보급되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항해의 역사[편집]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가장 먼저 바다를 항해했던 직접 증거는 지중해 무역에 대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정기 해상 무역은 아마도 크레타 섬 주민이거나, 아니면 이 문명이 기원전 1200년 경 지진과 이후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몰락한 뒤 이들의 우수한 항해술을 이어 받았던 페니키아인이 처음 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뛰어난 항해술을 지닌 페니키아인들은 지브롤터 해협을 나와 영국과 서아프리카까지 교역했다. 배의 구조가 간단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업적이다. 그리스인들 이야기를 해보자면 기원전 900에서 700년 사이에 그리스인들은 대서양을 탐험하였는데, 초기 그리스의 항해자들은 지중해 바깥에서 해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것을 알아 내었다. 초창기에 다른 문명 또한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 중국인은 광대한 내륙 운하를 만들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태평양에 연결시켜 물자의 장거리 수송을 염두에 두었다. 기원전 3000년전부터 폴리네시아인들은 남서 아시아와 인도네시아 일대를 누비고 있었으며 중앙 태평양의 섬들을 하나씩 찾아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서로 다른 문명들 사이에서 직접 접촉은 없었지만 각기 나름대로 해도와 항해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초기 항해자들은 모두 별이나 해가 뜨고 지는 위치를 보고 방위를 알아내는 데 능숙했다. 호기심과 무역은 용감함 이들로 하여금 야심에 찬 항해를 부추겼다. 하지만 이러한 항해를 하려면 천문학적 방위 확인 기술, 지구의 모습과 크기에 대한 정보, 조선술, 정확한 해도를 필요로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기여했던 것은 바다 자체에 대한 이해가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바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하는 해양학은 항해에 대한 기술적인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해양과학의 진보는 이집트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의 해양학은 항해의 필요성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미 기원전 6세기 경 그리스에선 피타고라스 학파의 학자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실제로는 에라토스테네스가 처음으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해냈다고 한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시에네(현재 나일강의 아스완 댐이 있는 곳)에서 돌아온 상인들에게서 일 년에 해가 가장 긴 날에 그곳에 있는 우물 속까지 햇빛이 비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이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곧게 꽂은 막대기에 약간의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보았다. 지구의 모습과 둘레 길이는 기원전 230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정확하게 쟀다. 위치와 항해를 위해 도입된 경도와 위도 체계도 그 곳에서 비롯되게 된다.

오세아니아인의 항해 이야기[편집]

인류 이주의 역사에서 중앙과 동부 태평양의 섬들로 이주한 폴리네시아인의 항해만큼 전설적인 것도 찾기 어렵다. 폴리네시아 문명은 태평양에 존재하는 네 가지 문명의 하나로 26,000,000km 제곱에 널려 있는 일만 여 섬에 자리 잡았다. 해양 문명을 세운 오세아니아 주민의 선조는 먼 옛날 동남아시아 또는 인도네시아에서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전문가에 따라 다소 견해는 다르지만 대략 3만 년 전 뉴기에 이르렀고 2만 년 전에 필리핀을 장악한 것에 의견을 같이 한다. 기원전 850년 무렵엔 소위 폴리네시아의 요람이라 불리는 통가, 사모아, 마케이저스, 그리고 소사이어티 제도에 정착하여 뿌리내렸다.

이런 여정을 통해 폴리네시아인들은 항해 지식을 갈고 다듬어 완성해 나갔다. 익숙한 뱃사람에게 뱃머리에 규칙적으로 와 닿는 파도의 변화는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섬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해질 무렵 새들이 날아가는 곳은 육지가 있는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었죠. 보이지 않는 섬의 구름과 마찬가지로 별의 위치도 뭔가 갈 길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물의 냄새, 수온과 염분, 빛깔들도 정보를 지니고 있다. 또한 태양에 대한 바람의 방향이나 배에 들러 붙는 생물체도 정보를 제공한다. 노을 빛과 달의 색깔 등등의 모든 미묘한 변화도 다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통의식을 통해 대대로 전수되었다. 폴리네시아인이 가장 집착했던 것은 항해로서, 하와이의 발견은 그들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된다. 바다에 대한 탁월한 지식이 바로 이들의 보호자였던 것이다.

유럽인들의 항해 이야기[편집]

폴리네시아의 지구 반대편에 있던 르네상스기의 유럽인들도 자각과 외부 현실에 자극 받아 배를 타고 바깥 세상으로 향했다. 단순히 탐험 목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부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때를 우리는 '발견의 시대' 라고 부른다. 발견의 시대에 살았던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선장,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항해의 대가이자 뛰어난 상인이었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실수로 발견했다. 이들이 소란스럽게 도착하기 전에 미주 대륙에는 11,000년 전부터 원주민이 살고 있었고 노르웨이 사람들도 500년 전에 벌써 식민지를 세우고 24차례 이상 다녀갔었다. 하지만 신대륙 발견은 콜럼버스의 업적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냐하면 특별한 선물과 과장된 이야기, 엉터리 해도와 더불어 엄청난 재물에 대한 약속이 왕가를 들뜨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북미 대륙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장안의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콜럼버스의 의도는 사실 신대륙의 발견이 아니었다. 그는 당대 내노라 하는 항해사들과 마찬가지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쪽으로 항해하면 그가 위도를 추정하고 있던 동방국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자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근대 항해자 가운데 지구를 가장 작게 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생각한 지구는 실제의 전반 크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착오 때문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그가 바라던 인도나 일본으로 믿었다. 그는 이후 세 번이나 더 북미로 향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그가 본 곳이 아시아 해안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곧 이어 다른 탐험가들이 합세했고 콜럼버스의 실수는 곧 정정되었다. 서기 1522년에 스페인에 귀환한 마젤란 탐험을 끝으로 유럽인의 발견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뒤이어 미주대륙의 원주민과 천연자원을 약탈하는 암흑기가 찾아온다. 원주민의 제국은 무너지고, 가치를 따지기 어려운 고고학적 문화재가 유럽 전쟁에 군비를 대기 위해 또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녹여져 동전이 되고 만다.

과학을 위한 항해[편집]

톰슨과 머레이가 항해한 배, '챌린저호'

발견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는 항해를 위해 필요했던 과학이 아니라, 상황이 역전되어 과학탐사를 위해 항해가 필요하게 된다. 순수하게 해양 과학에 목적을 두고 실시한 해양 탐사는 스코트랜드의 에든버러 대학에서 자연사를 담당하던 톰슨 교수와 캐나다 출신인 그의 제자 머레이가 마련하였다. 바로 그 유명한 챌린저 탐사이다. 이들은 왕립학술원과 정부로 하여금 전 세계를 일주하는 길고 고된 항해를 위한 군함과 숙련된 선원을 지원해달라고 설득하였다. 톰슨과 머레이는 이 사업을 위해 '해양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다. 글자 자체로는 '해도 제작'을 뜻했지만, 점차 이 단어는 '바다의 과학'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열성에 감동한 학술원과 정부는 이 탐사로 발생되는 재정 이익은 모두 영국 왕실에 귀속시킨다는 단서를 달고 지원을 약속하였다. 챌린저 호는 2,306톤이 나가는 증기범선인 전함으로 1872년 12월 21일 출발하여 4년간 총 127,000km를 항해하였다. 선장은 영군 해군 장교였지만 항로는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과학자들이 결정했다. 챌린저 탐사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심해무생물설을 검증하는 것이었다. 심해에서는 수압이 높고 빛이 없어서 동물이 살지 않는다는 학설인데요, 이 주장은 틀린 것으로 드 러난다. 133번의 바닥 끌기를 통한 채취에서 채집기를 올릴 때마다 갑판은 처음 보는 동물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는 무려 4,717종의 새로운 동물을 발견한다. 또한, 조사 기간에 과학자들은 수온과 염분, 그리고 밀도를 측정하였다. 새로 값을 잴 때마다 심해의 물리 구조가 차츰 밝혀지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최소한 151번에 걸쳐 중층 저인망 시료를 채집했고 77개의 해수 시료를 보관, 분석 했다. 최초의 순수 학술 탐사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성공이었다.

심해 생물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해양생물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으며, 이 탐사 보고서는 역대 과학서적 가운데 명저로 꼽힌다. 지금까지도 챌린저 탐사는 역사상 최장기 해양 탐사로 기록되고 있다.[1]

각주[편집]

  1. KIOST, 〈인류, 바다로 눈을 돌리다! 항해의 역사〉, 《네이버 블로그》, 2017-06-30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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