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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필리어(Montpelier)는 미국 버몬트주 중부에 있는 버몬트주의 주도이다. 인구가 가장 적은 주도로 인구는 약 8천 명이다. 도시 이름은 프랑스 남부의 도시인 몽펠리에(Montpellier)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
개요[편집]
몬트필리어는 버몬트주 중부의 위노스키강 상류 부근에 있으며 북서쪽에 배리가 있다. 1781년 매사추세츠 지역의 이민들이 최초로 취락을 건설하여 읍으로 인가받았다. 1787년 노스브랜치강을 따라 여러 마을이 형성되었다. 1805년에 주도로 지정되었고 1895년 시가 되었다. 산들로 둘러싸였으며 주에서 가장 높은 맨스필드산이 근처에 있다. 19세기 역마차 전성시대에는 벌링턴 다음가는 주요도시였으나, 현재는 행정 관련 산업과 보험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주요산업은 주정부가 주도하는 사업을 제외하면 화강암 채굴과 가공 및 경공업 등에 한정되어 있다. 생명보험업과 버몬트주의 정부가 많은 시민들을 고용하고 있다. 다른 산업으로는 복사기와 플라스틱 제조업, 제제업 등이 포함되어있다. 메이플슈거와 메이플시럽의 산지로도 알려져 있다. 임업이 성하며 그 외 메이플시럽, 설탕을 생산한다. 화강암 채석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스페인 전쟁의 영웅 조지 듀이 장군의 출생지이다. 노위치대학교 버몬트분교, 뉴잉글랜드요리연구소가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몬트펠리어는 버몬트주 중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도심은 언덕과 화강암 선반으로 둘러싸인 평탄한 점토 지대이며 해발고도는 158m이다. 타운 힐(Towne Hill)은 도시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3.2km의 능선을 따라 뻗어 있다. 미국 인구 조사국에 따르면, 도시의 총면적은 27km²이며, 그 중 26km²는 육지이고 0.10%는 물이다. 위노스키강은 시내 마을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서쪽으로 흐르며 주거 지역을 가로지르는 여러 개의 작은 지류에서 흘러나온다. 몬트펠리어는 1927년과 1992년에 두 번의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면서 평탄한 도심에 주기적으로 홍수가 발생했다.
몬트펠리어는 습한 대륙성 기후(Köppen Dfb)를 특징으로 하며 겨울은 길고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봄과 가을은 짧고 여름은 따뜻하고 습하다. 1월부터 7월까지 일평균은 –8.7~19.6°C이다. 겨울에는 24일 동안 아침 최저기온이 -17.8°C 이하로 떨어지고 낮 최고기온은 12월부터 2월까지 오후 대부분 영하권에 머무른다. 눈도 자주 내리고 겨울내내 땅 위에 오랫동안 남아 있지만, 해동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연평균 적설량은 2.39m이다. 여름은 따뜻하고 습한 경우가 많으며 2~3일 동안 32.2°C 이상이지만 35°C에 도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3]
역사[편집]
위누스키강의 초원과 평지는 원주민들 사이에서 옥수수 재배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몽펠리에의 자연 유적지는 이 땅에 처음 거주했던 원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로 만들었다. 200에이커에 가까운 비옥한 농지의 평원이 주변 계곡에 의해 바람으로부터 보호되어 이 지역을 비교적 따뜻하고 편안하게 만들었다. 많은 하천이 합류하는 곳 근처에 위치해 있어 사냥, 어업, 무역에 유리한 위치였다. 원주민의 고분, 묘비, 기타 원주민의 삶과 죽음을 기념하는 기념물은 최초의 정착민에 의해 몬트필리어 또는 인근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그중 일부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1600년과 1800년 사이에 유럽 정착민들이 이 지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 질병, 분산으로 인해 아메리카 원주민 정착촌이 사실상 파괴되었다. 그러나 증거에 따르면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은 1800년대 중반까지 늦게까지 이 지역에 남아 있었다.
1781년 8월 14일에 원래 인가된 몬트필리어 타운은 "버몬트 주 자유민 주지사, 의회 및 총회"에 의해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첫 번째 영구 정착은 1787년 5월 매사추세츠주 찰튼에서 제이콥 데이비스 대령과 팔리 데이비스 장군이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데이비스 장군은 토지를 조사했고, 데이비스 대령은 숲을 개간하고 위누스키강의 북쪽 지류 서쪽에 큰 통나무집을 세웠다. 그의 가족은 다음 겨울에 이사했다.
데이비스 대령은 에로주의 주도인 프랑스 도시 몽펠리에(Montpellier)의 이름을 따서 몬트필리어(Montpelier)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독립전쟁 중 미국 식민지에 대한 국가의 지원의 결과로 프랑스에 대한 전반적인 열정이 생겼다. 정착지는 빠르게 성장했고, 1791년에 인구는 117명에 달했다.
초기 마을의 구성은 지리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99년에 윈우스키강을 건너 베를린으로 가는 다리가 건설되었다. 타운 헌장은 타운 주민과 소유주에게 부여된 토지에 대한 경계 설명을 포함하기 위해 1804년 2월 6일에 재발행되었다.
1805년까지 마을의 인구는 1,200명이었다. 그 해에 주의회는 영구적인 집을 구했다. 몬트필리어는 중심적인 위치와 접근성,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땅과 돈을 제공했기 때문에 선정되었다. 곧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에 초라한 스테이트 하우스(State House)가 지어졌다. 1825년,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fayette)은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난 지 50년 후인 미국 개선 여행으로 몬트필리어를 방문했다.
특히 1849년 6월 20일 몬트필리어에 센트럴 버몬트 철도가 개통된 이후 이 도시는 제조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몬트필리어의 성장과 인구 통계 변화에 대응하여, 1848년 11월 9일 총회는 원래의 마을을 두 개의 지방 자치 단체로 분할하였다. 스트 몬트필리어(East Montpelier)와 몬트필리어(Montpelier) 마을이 만들어졌다. 나중에 정부 형태를 현대화하기 위해 도시는 몬트필리어 마을로 재건되었다. 1858년에는 강과 평행한 주요 거리의 배치가 이루어졌다. 시내 거리 패턴은 그 이후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필립 셰리던(Philip Sheridan) 소장이 버몬트 전 노조 임원들의 제4차 연례 회의에서 연설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만 명이 모여 그를 맞이했다. 그는 특히 남북전쟁의 버몬트 참전용사들이 시더 크릭 전투에서 활약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1875년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시내의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마을은 1884년 버몬트주에서 최초의 도시 수력 구동 수력 시스템을 보유했다. 수력은 가로등을 켜기에 충분한 전기를 발생시켰다.
몬트필리어의 첫 번째 헌장은 1894년에 승인되었고 곧 1898년에 개정되었고 1900년과 1912년에 다시 개정되었다. 첫 번째 수정안은 도시가 베를린 시내의 일부를 합병하는 것을 허용했다. 후자의 법률은 수도 공사, 도시와 워싱턴 카운티 문법 학교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시의회의 구성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1898년 헌장을 개정했다.
주에서는 1899년 10월 12일을 "듀이의 날"로 선포하여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마닐라만 전투의 영웅이었던 원주민 아들 조지 듀이(George Dewey)를 기리기 위해 선포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축하 행사를 위해 주에서 그의 고향인 몬트필리어로 몰려들었다. 1899년 허바드 공원은 미래 세대를 위해 "야생 보존"을 목적으로 존 에라스투스 허바드(John Erastus Hubbard, 1847–1899)가 몬트필리어시에 물려준 허바드 언덕(Hubbard Hill)으로 알려진 땅을 기부하여 설립되었다. 1911년에는 토지를 증여하고 1915년부터 1930년까지 기부된 토지 위에 전망대가 건설되었다.
1927년, 유난히 습한 여름과 가을 이후, 11월 2일 저녁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하여 11월 4일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많은 비가 내린 것은 11월 3일로 6시간 동안 7인치 이상 내렸다. 여름과 가을부터 이미 포화 상태인 토양 위에 장기간 내린 폭우는 물줄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개울과 강이 범람하여 나무와 통나무가 지나갔다. 댐, 다리, 제방이 파괴되었다. 건물이 물에 잠기고 가축들이 익사했으며 집과 축사가 떠내려갔다. 강은 정상 수심보다 13피트 이상 깊었다. 홍수가 점차 물러나면서 진흙과 자갈, 파편들이 남겨졌다. 시내 상점 바닥에는 적어도 1피트 이상의 진흙이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몬트필리어의 두 가게만이 홍수 보험을 들고 있었다. 엄청난 손실은 도시의 모든 남성, 여성, 어린이당 평균 400달러에 달하며, 이는 2018년 약 5,760달러에 해당하다. 홍수 이후 며칠 동안 버몬트는 복구 노력으로 널리 찬사를 받았다. 특히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대통령은 자신도 버몬트 사람들의 불굴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1927년 대홍수로 몬트필리어와 주변 지역사회가 입은 피해에 대응하여, 민간보존단은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라이트즈빌 댐을 건설했다. 그 결과 생긴 저수지인 라이트즈빌 저수지는 당시 최소 30개의 건축물을 포함하고 있던 라이트즈빌 마을을 해체했다.
몬트필리어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주에서 서부의 새로운 땅이나 뉴잉글랜드의 다른 산업 중심지로 집중적으로 이주하는 동안 천천히 성장했다. 몬트필리어는 이미 이 지역의 정부, 시장, 서비스 및 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가 도착했을 때, 새로운 주 고속도로는 도시의 경계까지 연결되었고, 그 후 교통은 도시의 원래 거리를 순환했다. 1954년, 베일리 애비뉴(Bailey Avenue)에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었고 이 다리는 현재 메모리얼 드라이브(Memorial Drive)인 위누스키 애비뉴(Winooski Avenue)의 연장선과 연결되었고, 시내 지역의 교통량을 일부 우회시켰다.
1992년 3월 이른 봄 해빙으로 몬트필리어의 베일리 애비뉴 다리 하류인 위누스키강에 얼음 덩어리가 형성되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위누스키강과 노스브랜치강의 수위가 얼음덩어리 상류로 상승해 몽펠리에 시내가 물에 잠겼다. 이로 인해 120개의 사업체가 문을 닫았고 50명의 주민이 집을 잃었으며 주 정부의 운영이 중단되었으며 5백만 달러 이상의 피해가 발생했다.
2023년 7월 10~11일에 발생한 폭우로 인해 몬트필리어와 버몬트의 다른 여러 지역에 치명적인 홍수가 발생했다. 많은 주택 외에도 물은 시내의 여러 사업체는 물론 시의 소방서, 경찰서, 시청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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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몬트필리어 (버몬트주)〉, 《위키백과》
- ↑ 〈몬트필리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Montpelier, Vermont", Wikipedia
- ↑ 〈몽펠리에, 버몬트 주〉, 《요다위키》
참고자료[편집]
- 〈몬트필리어 (버몬트주)〉, 《위키백과》
- 〈몽펠리에, 버몬트 주〉, 《요다위키》
- "Montpelier, Vermont", Wikipedia
- 〈몬트필리어(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