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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8일 (화) 18:0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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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틀란드주(스웨덴어: Gotlands län)는 발트해에 위치한 스웨덴의 주이다.[1][2]
개요
고틀란드주의 면적은3,184㎢이며 인구는 577,903명(2011년)이다. 주도는 비스뷔이다. 발트해와 접하며 욀란드섬 동쪽에 위치한다. 고틀란드섬을 관할하며 1개 자치시(고틀란드시)로 구성되어 있다. 고틀란드와 부속 도서의 면적과 인구는 스웨덴 전체 면적과 인구의 1%도 되지 않는다.
고틀란드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섬이다. 스톡홀름 남쪽 무스쾨 섬에 위치한 지하 해군기지, 그리고 수상함대가 집중된 칼스크로나 해군기지와 함께 러시아 해군 발트함대의 활동을 막아서는 최전방이다.
냉전 시절 이래로 비스뷔에는 고틀란드 기보여단과 FH77 155mm 견인곡사포로 무장한 고틀란드 포병연대를 중심으로 한 육군 병력이 상주했다. 한편 중서부의 토프타 지역 모래톱에는 거대한 포격훈련장이 존재한다. 포뢰순 마을을 기점으로 하는 북부에는 스웨덴 해군 소속의 작은 해군 전진 기지와 스웨덴 해병대의 기지가 있다.
냉전 후 2005년에 군이 잠시 철수했으나, 최근 러시아의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스웨덴군이 다시 돌아왔다. 제18 전투그룹으로 불리는 해당 부대는 Strv 122 전차 11대로 무장한 전차중대와 기보중대, 본부중대와 지원중대로 구성된다. 그러나 주민들은 군이 너무 약하다며 섬을 방위하지 못하리라 여겨 불안해한다고. 섬은 제주도보다 큰데, 병력은 도합 500명이 안 된다.
1984년부터 매년 8월 1주일 동안 중세 테마의 축제가 비스뷔에서 개최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중세 시대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장관을 보여주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비스뷔에는 13세기~15세기에 걸쳐 건설 및 증축된 중세 성벽과 건물들이 보존되어 있어, 한자동맹시절의 시내구역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역사
고틀란드는 발트해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일찍이 상업이 발달했으며, 비스뷔는 한자동맹 소속 도시로 부흥했다. 하지만 14세기 말 발트해에 창궐한 해적들은 고틀란드를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해적들이 소탕된 이후로도 비스뷔의 상업은 경쟁력을 잃어 다시 부흥하지 못했다.
스웨덴에서 20세기 동안 두 번의 전국적인 지방 정부 개혁 중 첫 번째는 1952년 1월 1일에 시행되었다. 그 날부터 섬의 시골 지방 자치체들은 비스비, 슬라이트, 고틀랜드 카운티 의회와 함께 새로운 행정 패턴을 형성한 12개의 새로운 확대된 지방 자치체로 다시 통합되었다.
10년이 지난 후에 이 개혁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작업은 다음 개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71년 1월 1일 스웨덴에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 지방 정부 개혁이 시행되었다. 농촌과 도시 간의 모든 행정적, 사법적 차이가 폐지되었다. 그 날부터 오직 한 가지 유형의 지방 자치 단체(kommun)만 존재했습니다. Gotland의 경우, 모든 이전의 실체들이 하나의 단위로 통합되었다. 군에는 단 하나의 자치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군의회도 폐지되어 새로운 단일 자치단체로 통합되었다.[3]
교통
주도 비스뷔는 여객선과 비행기로 스웨덴 본토와 연결된다. 페리 여객선은 스톡홀름 인근의 오스카르샴과 뉘네샴까지 가는데 운항시간은 각각 3시간이다.
비스뷔공항은 도심에서 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2018년 이용객은 46만7857명으로 스웨덴에서 9위의 큰 공항이다. 스톡홀름 알란다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은 고틀란드섬에 있는 공항을 오간다. 비스뷔에는 시내 버스뿐만 아니라 고틀란드의 다른 지역으로 가는 버스도 있다.[4]
비스뷔
비스뷔는 스웨덴의 고틀란드섬 해안에 있는 휴양도시이다. 스웨덴의 자치단체 가운데 배와 항공 교통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7월 첫째 주에는 주요 정당 대표들이 교대로 비스뷔의 알메달렌 공원에서 연설을 한다. 중세 때 한자동맹 도시로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지금도 비스뷔 성벽이 남아 있다. 14세기 전반(1300~1350)에 비스뷔는 부와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
비스뷔의 초기 역사는 불확실하지만 서기 900년경에 상거래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기시대 때부터 주민이 살았던 곳인데 아마도 신선한 물과 천혜의 항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2세기에는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비스뷔 대성당이 세워졌다. 13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되었으며, 1225년 린셰핑 교구의 주교에 의해 공식적으로 개원되었다. 그 뒤 몇 세기 동안 다른 교회들도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독일 한자 동맹 덕분에 번성했다. 도시 외곽을 둥그렇게 방어하는 성벽은 12세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300년경에는 성벽을 더 높이 쌓아올려 현재의 높이에 도달했다. 성벽은 여전히 대부분 손상되지 않았다.
14세기 전반(1300~1350)에 비스뷔는 부와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다. 발트 지역과 여타 지역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해양법인 '비스뷔법'이 공포된 것도 이 시기였다.
1361년 고틀란드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에 의해 정복되었다. 1,800명의 고틀란드 병사들이 도시 앞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 발데마르는 성벽의 일부를 허물고 거대한 맥주통 3개를 갖다 놓았다. 그 통 안에 금은을 가득 채우지 않으면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부하들을 풀어놓겠다고 위협했다. 비스뷔의 신부들은 성당의 귀중품을 탈탈 털어 그들에게 바쳤다. 발데마르는 그의 호칭에 '고틀란드의 왕'을 추가했다.
비스뷔는 1391년, 1394년, 1398년에 각각 발트해에 출몰하는 비탈리엔브뤼더라는 해적 집단에 약탈당했다. 1398년 가톨릭의 튜턴 기사단이 고틀란드를 정복하여 비탈리엔브뤼더 해적들을 추방하였다.
1409년 튜턴 기사단의 울리히 폰 융잉엔(1360~1410) 사령관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마거릿 여왕에게 고틀란드섬을 팔아 스칸디나비아의 칼마르동맹과 평화를 보장했다. 1411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국왕 에릭이 비스보리성(城)을 건설하고 12년 동안 그곳에 정착하였는데 그동안 비스뷔는 사실상 해적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상업이 중단되었다. 1470년 한자동맹은 비스뷔의 한자동맹 도시 지위를 박탈했다.
1525년에 최후의 일격이 왔다. 덴마크 왕위 다툼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자유도시이자 한자동맹의 유력 도시인 독일의 뤼벡은 프레데릭 1세를 지지했다. 반면 고틀란드의 덴마크 총독 쇠렌 노르비는 크리스티안 2세를 위해 싸웠다. 노르비가 스웨덴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는 동안 뤼벡 병력은 비스뷔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네 곳에서 불을 질렀다.
몇몇 교회들은 소실되지 않았다. 성 제임스 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 성 게르트루드 교회 등은 뤼벡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성 요한 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는 문을 닫았다. 1528년 비스뷔 시민들은 뤼벡 군대의 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성 삼위일체 교회의 문을 닫아버렸다.
1533~1534년 새로운 덴마크 총독 헨릭 닐센 로센크란츠는 성 요한 교회, 성 바오로 교회를 그의 비스보리 성의 방어력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파괴했다. 성 마리아 성당은 마지막으로 남아 신도시 교구의 중심이 되었다.
고틀란드는 덴마크 통치 300년 만에 1645년 브룀세브로조약에 의해 다시 스웨덴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에 비스뷔는 서서히 발전했다. 18세기 중반에 전염병이 비스뷔의 인구를 감소시킨 후 스웨덴 정부에서는 이곳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 시도했지만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비스뷔는 다시 한 번 상업과 항만산업을 끌어들였다. 1808년에는 고틀란드가 러시아에 의해 정복되었지만 스웨덴은 불과 몇 달 만에 평화적인 협상으로 되찾았다.
비스뷔에서는 7월 첫째 주에 스웨덴의 정치 관련인 모두에게 중요한 포럼인 알메달렌 위크(Almedalen Week)가 열린다. 주요 정당 대표들이 교대로 알메달렌 공원에서 연설을 하게 된다.
8월은 관광 시즌이 한창이다. 32째 주에는 일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년 '고틀란드의 중세 주간' 행사가 열린다. 이런 기간엔 일상복을 입은 관광객보다 중세풍의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더 많다.
이 축제는 1984년에 시작되었다. 음악, 어릿광대 공연, 연극, 중세 시장, 마상(馬上) 창 시합 토너먼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스웨덴 작가 마리 융스테트는 고틀란드섬을 주요 무대로 한 9권의 탐정 소설을 썼다. 주인공인 DS 안데르스 크누타스는 비스뷔 경찰서의 형사이며 이들 작품에는 비스뷔와 고틀란드섬의 장소에 대해 묘사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는 비스뷔에서 그의 작품 <마녀 배달부 키키>에 나오는 마을의 시각적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1971년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은 비비 안데르손, 막스 폰 시도, 엘리어트 굴드 등 명배우와 함께 <터치>를 촬영하였다. 비스뷔에는 작가 및 번역가를 위한 발틱 센터, 작곡가를 위한 비스뷔 인터내셔널 센터가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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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고틀란드주〉, 《위키백과》
- 〈고틀란드〉, 《나무위키》
- 〈고틀란드 주〉, 《요다위키》
- 〈유럽지명사전 : 스웨덴 비스뷔〉,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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