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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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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다만 현대에는 '광화문'이란 명칭 자체가 궐문으로서의 광화문 뿐만 아니라 세종대로, 광화문광장 등을 포함한 법정동 세종로 및 그 주변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더 많이 쓰이는 감이 있다. 실제 세종대로와 종로, 새문안로가 교차하는 세종대로 사거리도 실제 광화문에선 약 600~700m 가량 떨어져 있지만, '광화문 네거리(사거리)'라고 많이 불린다. 의정부와 육조 관청들이 들어서 조선 시대부터 핵심 행정 기능을 수행했던 지역으로, 숭례문 등과 더불어 서울의 역사가 함축된 곳 중 한 곳이라 볼 수 있다. 즉,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개요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치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 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는데 왼쪽 문은 무신이, 오른쪽 문은 문신이 출입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고, 왼쪽 문에는 거북이가, 오른쪽 문에는 천마가 그려져 있다. 경복궁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문 3개를 지나야 하는데, 그 중 첫째가 광화문이고 둘째는 흥례문, 셋째는 근정문이다. 광화문은 한국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

역사

조선시대

1395년(태조 4년) 9월에 경복궁을 건설할 때 처음 지었다. 원래는 그냥 정문(正門) 혹은 오문(午門)이라고 했다가 1425년(세종 7년)에 광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태조 때 이미 '광화문'으로 불렀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광화문' 명칭은 세종 때 붙은 것이 맞다. 세종 전까지 쓴 이름은 사정문(四正門)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당시를 다룬 실록에서는 이런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성종 때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광화문, 흥례문(홍례문), 근정문에 청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정괄이 저지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이 불타면서 같이 무너졌다. 이후 273년간 공터로 있다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1865년(고종 2년)에 재건했다. 이때 현판 글씨는 당대의 서화가 정학교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종실록》에 따르면 무관 임태영의 글씨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경복궁과 함께 방화로 소실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 이하응)이 경복궁을 다시 중건하면서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일대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그 위치상 청사 앞을 가린다는 이유를 들어 광화문을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조선은 물론 일본의 지식인들까지 철거 결정에 반발하였다. 특히 야나기 무네요시는 1922년 일본 잡지 <개조> (改造)에 '사라져가려고 하는 어느 조선 건축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광화문의 운명을 기리는 글을 게재하였고, 일본에서 발표된 이후 《동아일보》에 한국어 번역본이 실리면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이에 대해 《헐려 짓는 광화문》이라는 수필이 존재한다. 조선총독부는 광화문 철거 계획을 철회하고 총독부 청사가 완공된 이듬해인 1927년 광화문을 건춘문 (경복궁의 동문) 쪽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광화문은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폭격을 맞아 광화문의 목조 부분이 불에 타 없어지고 석축만 남게 되었다. 이후 석축은 그대로 두고 현판은 새로 제작,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1968년 12월 11일에 중건하였다. 하지만 광화문의 자리를 경복궁의 본래 축이 아닌 총독부 청사의 축에 맞춰 재건축하였고, 건축 전부터 겉모양만 복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더구나 높이도 원래 높이보다 좀 더 높게 지어졌으며, 현판 역시 한자 현판이 아닌 당대 한글 전용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한글로 쓴 현판을 사용하였다.

전후 복원

1995년에 문민정부에서는 2003년부터 광화문을 부분 철거하고 2009년까지 본래의 위치에서 석축 위의 목조 건물로 복원할 것을 발표하였다. 2006년부터는 문화재청 주도의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광화문을 고종 중건기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철거 · 해체하였다.

이후 콘크리트 문루를 철거하고 다시 복원 공사를 진행했다. 조선시대 원형대로 문루를 나무로 짓고, 현판을 한자로 바꾸며 틀어졌던 축까지 원래대로 되돌리기로 했다. 이때 광화문 앞의 월대도 함께 복원하기로 했으나, 서울시에서 교통 체증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월대 복원에 반대하고 나섰다. 서울시에서는 광화문 자체가 남쪽으로 14.5m 내려오는 데다가, 광화문 앞 옛 월대의 길이가 40m나 돼, 차로를 55m나 줄여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월대를 복원하는 대신 광화문광장에 월대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육조 거리를 향해 뻗은 광화문 월대는 길이가 52m, 폭은 29.5m였다. 이곳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을 비롯한 전통 문화행사가 열리게 된다. 월대는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종묘 정전, 조선왕릉 정자각에서 볼 수 있는 넓은 대를 뜻한다. 광화문 앞 월대는 중요 행사가 있을 때 국왕이 출입하면서 백성과 연결되던 소통과 화합의 장소였다.

2010년 8월에 완공했다. 같은 달 15일, 즉, 광복절에 현판식을 거행하면서 광화문 복원 공사는 모두 끝났다. 이때 교체된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도 당시엔 나름 뜨거운 감자였는데, 정치 구도상 이념 대립도 있고 한글이냐 한자냐 논란도 있었다. 다만 한글, 한자 논란의 경우 둘 다 일리는 있는게, 전통이란 것은 박제가 아니기에 현실의 반영이란 측면에서는 한글 현판도 가치가 있으며, 반대로 문화재의 충실한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는 반대측의 주장도 가치가 있다.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맞고 틀리고 할 문제는 아닌 것. 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의 수준 자체에 대한 서예 전문가들의 평가는 문화재로 지정해 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광화문 편액(扁額)은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 시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 提調)를 겸하여 서사관(書寫官)으로 광화문 편액을 쓴 임태영 장군의 서체를 원형 복원한 것이다.

2010년 8월 15일 이후로 공개된 광화문의 모습은 현판이 조선시대처럼 한자로 바뀌고 소나무화강암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복원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여장의 색도 고증에 맞게 번경되었다. 기단의 돌 색깔이 어떤 것은 말끔하고 어떤 것은 지저분한데 그 까닭은 옛 돌과 새 돌을 같이 썼기 때문이다. 요즘 복원 추세는 과거에 사용된 자재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다. 숭례문 석축의 돌 색깔이 맞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 역설이 조금은 줄어드는 셈. 세월이 흐르면서 새 돌도 때가 타 옛 돌과 어우러질 것이다.

2021년 오세훈 서울시장이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공사와 함께 월대를 복원하고 해태상도 원위치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2022년 4월에 발굴작업에 착수하여 2023년 완공 예정이다. 월대가 복원되면 100여년 만에 온전한 조선시대 광화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현판

완공 이후 3달이 지난 2010년 11월 즈음, 갑자기 편액이 갈라져 버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자연적인 균열인지, 복원 기간 단축으로 인한 부실 복원으로 생긴 균열인지에 대해 한동안 설왕설래하기도 했는데, 일단 정부는 목재를 잘못 썼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고 한다. 원래 이런 데 사용하는 목재는 몇 개월 이상 잘 말린 것을 사용해야 뒤틀리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목재를 담당한 장인과 전각을 담당한 장인은 서로 남탓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투기도 했다.

2016년 2월 29일 광화문 현판이 본래 검은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씨였다는 주장이 2014년에 이어 또 다시 제기되었다. 이와 더불어 궁궐 전각에 걸린 편액 가운데 4분의 1이 엉터리라는 조사 결과가 나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문화재청에서 2017년 7월 직접 광화문 편액의 위치에 검은색 바탕에 세 가지 광(光)을 쓴 현판을 올려 원본을 유추하는 실험을 진행했는데, 하나는 금색 글자를, 하나는 금박을 입힌 글자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흰색 글자를 그려 당대의 편액을 알아보았고, 최종적으로 현재 편액에서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자 광화문(光化門)을 쓴 편액으로 2020년 중에 교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2018년 12월 27일 발표된 논문 '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에 따르면 위 논문의 저자 김민규가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경복궁 영건일기를 분석한 결과 광화문의 편액이 현존하는 근정전의 편액처럼 금동판을 글자 모양으로 자른 뒤 목판에 붙이고 금칠을 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광화문 복원 공사 당시 한자 현판을 쓰지 말고 과거 박정희 정부 시기 콘크리트 광화문처럼 한글로 '광화문'이라 쓴 현판을 붙이자는 주장이 있다. 특히 이를 위해 조직된 시민 단체 '광화문 현판을 훈민정음체로(대표 강병인)'는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뜻에서 한자 현판이 아닌 한글 현판을 써야 한다는 취지로 관련 모임과 행사를 수 차례 진행했다. 이 단체는 "광화문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이자 문화 강국 코리아의 얼굴"이라며 "현판이 한자로 되어 한국인의 정신과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스스로 '훈민정음체'라는 폰트를 사용한 한글 편액을 예시로 들고 나와 홍보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1960년대 콘크리트 광화문을 짓는 게 아니라 조선시대 광화문을 복원하려는 정부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스에서 파르테논 신전을 최대한 기존의 잔해들로 복원하려 노력하는 것이나, 한국의 숭례문 복원에서 돌의 색깔이 다른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옛 기단부 석재를 재활용한 것, 미륵사지 석탑을 완전한 모습이 아닌 파괴된 모습으로 복원한 것 등의 사례는 가급적 본래 모습을 온전히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처음 경복궁이 건립되었을 때도 19세기 재건될 때까지도 한자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쓰였을 문화재를 복원하면서 한글로 갈아치울 이유가 적었다.

또한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고, 광화문 복원 사업 역시 경복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경복궁 내 다른 한자 놔두고 광화문만 한글로 바꿀 당위성 역시 부족하다.

한편, 광화문의 기존 흰색 현판은 또다시 균열이 발생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은 보수 작업을 하고, 새로운 검은색 금박 현판은 2023년 하반기의 상징적인 날을 선정해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교통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과 180m로 가장 가깝다. 수도권 전철 5호선 광화문역의 경우 역명과는 달리 광화문과는 470m 정도 떨어져 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서 가는 것보다 광화문역에서의 거리가 대략 2.6배 멀다. 실제 광화문역을 광화문광장역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

그러나 5호선에 있음에도 종로3가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여 경복궁역으로 가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환승저항과 배차 시격까지 고려하면 오히려 더 실이 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는 폭염이나 한파 같은 부담스러운 날씨가 아니라면 광화문역에서 내리는 게 훨씬 낫다. 광화문역에서 내려도 광화문의 정면이 보인다. 5호선 광화문역에서 광화문에 가장 가까운 출구는 2번 출구이며, 광화문광장으로 나 있는 9번 출구로 나와도 된다.

세종대로 사거리 중앙(이순신 동상 앞)에는 서울과 다른 도시의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인 도로원표가 있으며, 이는 국내에서 도로가 시작되는 기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요즘 같이 자동차로 붐비는 세종로 한복판에 조형물을 만들 수는 없으니, 도로원표 조형물은 실제보다 151m 떨어진 코리아나 호텔 북쪽에 있다.

광화문 앞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성산대교서부간선도로를 지나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어져 1번 국도 종점인 목포 신항교차로까지 갈 수 있고 동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져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온천장교차로까지 갈 수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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