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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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우크라이나어: Івано-Франківс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의 면적은 13,900㎢이며 인구는 1,361,109명(2021년)이며 주도는 이바노프란키우스크이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리비우주, 남서쪽으로는 자카르파탸주, 남쪽으로는 루마니아 마라무레슈주, 남동쪽으로는 체르니우치주, 동쪽으로는 테르노필주와 접한다.
역사
17세기 중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대귀족인 포토츠키 가문의 요새가 이곳에 건설되고 스타니스와부프(Stanisławów)[8]라는 이름의 마을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1663년 8월 14일 도시 특권을 얻어 도시로 승격되었다. 1772년 합스부르크 제국에 합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하면서 1919년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로 몇 달 있었다가, 리가 조약에 의해 폴란드 제2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에 합병되었다가 2년 후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
1918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1939년 12월 4일 소련에 속해 있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주로 신설되었으며 1939년부터 1962년까지는 스타니슬라우 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44년 전세가 역전됨에 따라 소련이 다시 우크라이나 지역을 회복하여 소련 영토가 되었다. [3]
교통
이바노프란키우스크 국제공항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Ivano-Frankivsk Oblast)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도심에서 남서쪽으로 약 4.4km 거리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 공군과 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하여 민·군용 겸용으로 쓰이며 서부 우크라이나의 주요 공항이다. 1959년 개항했으며, 우크라이나 독립 후 시설을 정비하여 1992년 국제공항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공항 코드는 IFO(IATA), UKLI(ICAO)이다.
여객터미널은 한 동이다. 활주로는 2,507m×45m 크기로 총 1개소를 운영한다. 취항 항공사로는 우크라이나국제항공(Ukraine International Airlines)과 드니프로아비아항공(Dniproavia)의 총 2개사가 있다. 현재 국내선 노선만을 운항하며 키이우(Kyiv), 드니프로아비아(Dniproavia), 오데사(Odessa)의 총 3개 도시로의 직항 노선이 있다. 공항에의 교통편으로는 이바노프란키우스크를 연결하는 H09 도로가 인접한다.[4]
이바노프란키우스크
이바노프란키우스크는 우크라이나 서남부에 자리한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州)의 주도(州都)이다. 르비브(Lviv)에서 140km, 체르니비치(Chernivitsi)로부터 126k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역사적 도시다. 오늘날 동유럽 북부의 폴란드 남동부와 우크라이나 북서부 일대를 일컫는 갈리치아(Galicia, 우크라이나어: 할리치나, Halychyna) 지역에서 르비브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이 도시는 1939년까지 스타니슬라비브(Stanislaviv), 1962년까지는 스타니슬라프(Stanislav)라고 불렸다. 이바노프란킵스크는 폴란드왕국 시대의 시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시대의 비즈니스센터, 소련의 조립식 아파트 단지 등 여러 문화의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1695년에 완공된 뒤 1870년에 재건돼 현재 지역학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폴란드 시대의 시청 건물이나 옛 예수회 대학과 아르메니아 바로크 교회, 포토츠키성과 요새터 등은 역사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이바노프란킵스크는 비스트리치아나드비르니얀스카(Bystrytsia Nadvirnianska)강과 비스트리치아솔로트빈스카(Bystrytsia Solotvynska)강의 합류 지점에서 가까운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카르파티아산맥(Carpathian Mountains) 등반객들의 주요 출발지점이기도 하다. 도시의 남서지역에는 많은 공원과 인공호수가 있다.
이바노프란킵스크는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더운 여름과 상당히 추운 겨울을 가진 대륙성 기후 지역이다. 연간 170일가량 비나 눈이 내리며, 안개가 끼는 날은 연간 296일가량(월평균 24일)이다.
이바노프란킵스크는 우크라이나 서남부의 포쿠티아(Pokuttia)평원에 자리하고 있다. 포쿠티아평원의 남서쪽은 카르파티아산맥, 동쪽으로는 포쿠티아-베사라비아고지대(Pokuttian-Bessarabian Upland), 북쪽으로는 로즈토체(Roztocze)고원이 이어진다. 이바노프란킵스크의 평균 해발고도는 120m다.
이바노프란킵스크는 17세기 중반 크림 타타르(Crimean Tatar)의 침공으로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로 설립되었다. 폴란드의 명문가 출신 군사령관 안제이 포토츠키(Andrzej Potocki)는 1654년 폴란드의 또 다른 명문가로부터 자볼로티브(Zabolotiv)와 크냐히닌(Knyahynyn) 마을 등이 있던 현재의 도시 지역 땅을 사서 요새를 세웠다. 요새는 그의 아버지 이름을 딴 스타니스와부프, 우크라이나어로는 스타니슬라비브로 명명됐다.
1661년부터 1662년까지 5개월 동안 자볼로티브 마을 옆에 요새화된 포토츠키성(城)이 건설되었다. 포토츠키성은 육각형 모양으로 보루들을 갖춘 요새가 둘러싼 형태였다. 요새는 1672년 목조건물에서 좀 더 견고한 석조건물로 재건되었다.
스타니슬라비브는 1663년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마그데부르크 도시법(Magdeburg law)에 의한 자치권을 승인받았다. 1672년 투르크 군대가 이 도시 인근의 카미야네츠-포딜스키(Kamianets-Podilskyi)를 점령했을 때 스타니슬라비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남동(南東) 방어선 역할을 했다.
포토츠키는 이곳에 몰도바와 헝가리로부터 아르메니아 상인들을 초청해 무역을 촉진했다. 1677년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들을 위한 시의회와는 별도로, 그들을 위한 시의회를 운영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상업 활동으로 이 도시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무역 및 제조업의 중심지가 됐다. 몰다비아 · 헝가리 · 오스트리아 등의 상품이 현지에서 생산된 가죽이나 모피 제품과 거래되는 박람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스웨덴과의 북방 대전을 비롯한 18세기의 잦은 전쟁은 이 도시의 성장을 방해했다.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도시를 떠났고, 이들의 자치 체제도 1769년 막을 내렸다.
1705년, 1730년, 1770년에는 전염병으로 도시의 인구가 크게 줄었다. 1772년 스타니슬라비브는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 군(郡) 단위 행정구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801년 정부는 포토츠키가로부터 이 도시의 소유권을 넘겨받았고, 요새는 1809~1812년 허물어졌다. 1848~184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 대항한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 도시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조직을 결성해 헝가리 및 폴란드 반군과 싸웠다.
1866년 철도 분기점 건설은 이 도시의 성장을 자극했다. 1868년 대형 화재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인구는 1849년 1만 1,000명에서 1880년 1만 8,600명으로 증가했다. 1886년경에는 약 30개의 중소기업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선에서 가까웠던 스타니슬라비브는 큰 피해를 겪었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5월까지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주창한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였다.
1919년 5월부터 1939년 9월까지 스타니슬라비브는 폴란드의 통치를 받았다. 1921년에는 스타니스와부프주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939년 이 도시의 인구는 6만 4,000명 가운데 유대인이 2만 6,500명(41%)으로 가장 많았고, 폴란드인이 2만 3,500명(37%), 우크라이나인이 1만 2,000명(19%), 독일인 2,000명(3%) 순이었다.
폴란드 통치하의 스타니슬라비브는 갈리치아에서 가장 큰 산업 중심지 중 하나였다. 기관차 산업과 철도차량 정비, 정유, 기계제조, 식품가공, 목공업 등이 이 도시의 주요 산업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스타니슬라비브는 소련(1939~1941)과 독일(1941~1944) 점령하에 있었다. 1939년 소련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스타니슬라비브는 연방의 구성국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됐다. 1944년 8월 도시는 독일로부터 다시 소련의 통치하에 들어갔고, 도시명은 스타니슬라프로 개칭되었다.
독일 나치 정권하의 유대인 학살과 1945~1946년 소련의 폴란드인 강제이주 정책, 러시아인의 대거 유입 등으로 이 도시의 인구 구성은 크게 변화하였다. 1959년 인구조사에서 우크라이나인이 전체 인구 6만 6,000명 중 67%를 차지하였으며, 러시아인이 25%,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 그 밖의 민족이 8%였다.
전후 도시의 산업은 곧 재건, 확장되었다. 1971년 인구는 11만 명이 되었다. 1962년 이바노프란킵스크로 도시명이 바뀌었다. 이 도시는 1990년대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민주적 변혁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보여왔다. 친(親)러시아 정권에 반대하여 일어난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태 때는 2013년 12월 1일 도심에서 1만 5,000명이 참석한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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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위키백과》
- ↑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나무위키》
-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나무위키》
- ↑ 〈두산백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국제공항〉, 《네이버 지식백과》
-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킵스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위키백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나무위키》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나무위키》
- 〈두산백과 : 이바노프란키우스크 국제공항〉, 《네이버 지식백과》
-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이바노프란킵스크〉,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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