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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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Sydney, 문화어: 씨드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주도이자 오스트레일리아와 오세아니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다. 대 시드니에 거주하는 인구는 530만 명이며 뉴사우스웨일스주 인구의 약 66%를 차지한다. 시드니의 별명으로는 "에메랄드 시티"(Emerald City)나 "하버 시티"(Harbour City)가 있다.[1]
목차
개요[편집]
시드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동해안에 있는 시드니는 시드니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블루마운틴스, 북쪽으로는 헉스베리시, 남쪽으로는 로열 국립공원, 서남쪽으로는 매카서까지 총 70km 길이로 뻗어 있다. 시드니는 총 658개 교외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3개 지방 자치 단체를 포함하고 있다. 시드니에 사는 주민을 흔히 "시드니사이더즈"(Sydneysiders)라고 부른다. 시드니는 호주의 최초의 도시이자 상징적인 도시로 오세아니아의 대표도시 중 하나이다. 이로 인해 시드니를 호주의 수도로 잘못 아는 경우도 많은데 호주의 수도는 캔버라이다. 시드니는 포트잭슨만의 남안 일대는 세계 3대 미항(美港)의 하나인 시드니항의 항역(港域)이 되어 있다. 이 항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무역액의 1/4, 뉴사우스웨일스주 무역액의 3/4을 취급한다. 온화한 기후로도 유명하며, 연간 평균기온은 21.9℃, 가장 더운 달이 26.5℃, 가장 추운 달이 17.4℃로 연교차가 적다. 연평균강수량은 101mm이며, 1년 내내 강수량이 고르다. 1788년 1월 26일, 보터니만으로부터 포트잭슨에 들어온 총독 A.필립은 유형수(流刑囚) 770명, 군인 250명을 데리고 이곳에서 최초의 식민지 건설을 개시하였다. 시드니라는 이름은 당시 영국의 각료였던 시드니경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 후 시드니는 오스트레일리아 개발의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천연의 양항(良港)이라는 점과 육상교통로의 요지라는 사실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842년 시제(市制)가 시행되었고, 1851년 부근의 배더스트에서 금이 발견된 후로 인구가 급증하였다. 시드니는 또한 이 나라 최대의 상공업도시로 섬유, 제분, 정당(精糖), 피혁, 기계, 화학, 자동차, 조선, 정유(精油), 제재(製材) ·제지 ·차량 ·농기구 등의 공업이 활발하다. 공업지대는 시의 남부와 서쪽 교외 일대에 분포한다. 관청, 금융기관, 회사 사무실, 백화점, 고급상점이 있는 도심 바깥쪽에는 조용한 주택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포츠포인트 등이 최고급 주택지로 알려져 있다. 시드니는 문화와 교육의 중심이기도 하며 시드니대학(1850년 창립), 뉴사우스웨일스대학, 로마가톨릭 교회, 성공회 교회, 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 국립미술관, 도서관 등이 있고, 오페라하우스도 1973년에 완성되었다. 또 시내에는 2개의 국립공원(300km²)과 자연보호지 이외에 하이드파크, 센테니얼파크 등의 공원, 정원과 각종 경기장이 있다. 또한 포트잭슨만과 남쪽의 보터니만은 경치가 아름다운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시드니는 동쪽으로는 태즈먼해, 서쪽으로는 블루마운틴스, 북쪽으로는 혹스베리강, 남쪽으로는 워로노나고원으로 둘러싸인 해안 분지 지역이다. 시드니 시내의 면적은 25km²이고 대 시드니 지역(센트럴코스트, 블루마운틴스, 월런디리 샤이어, 울런공, 셸하버 등 비도심 지역 포함)의 면적은 12,367km², 시드니의 도시 지역 면적만 따지면 1,687km²이다. 시드니 대도시권의 경계는 최북단 팜비치부터 최남단 워터펄까지 남북 88km, 최동단 본다이비치부터 최서단 에뮤플레인즈까지 약 70km 길이이다. 시드니는 크게 지리적으로 두 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항구 서쪽과 남쪽 지역의 컴벌랜드 평원은 비교적 평평한 지형이다. 시드니 북쪽은 혼스비고원이 있으며 가파른 계곡들이 있다. 도시가 성장하자 제일 먼저 남쪽의 평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해안 북쪽 지역은 시드니 하버 브리지가 건설된 이후에야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드니에는 해안선을 따라 70개의 해변이 있으며 이 중 본다이비치 해변이 제일 유명하다.
도시 서쪽 가장자리에는 네피언강이 흐르는데 혹스베리강으로 합류해서 브로큰만까지 향한다. 시드니 상수도원의 절대다수는 바로 이 네피언강의 지류에서 나온다. 패러매타강 유역의 경우 대부분 산업화되어있고 시드니 서부 교외 넓은 지역을 훑어가다 포트잭슨으로 흘러간다. 도시 남부에는 조지강과 쿡스강이 있으며 보터니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오스트레일리아 통계국에서는 시드니를 쾨펜의 기후 구분 상으로 "온난하고 가끔 더운" 여름과 "시원한" 겨울을 가진 온난 습윤 기후(Cfa)로 두고 있다. 크게 엘리뇨-남방진동, 인도양 다이폴, 남방주기가 시드니의 기후를 좌지우지한다. 한 때는 가뭄과 들불이, 다른 한 때는 폭풍과 홍수가 몰아닥치며 오스트레일리아의 기후주기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날씨는 바다 해륙풍의 영향으로 온난하고 서쪽의 내륙 교외 지역은 극심한 연교차의 기온을 기록한다. 시드니의 옵저버터리 힐에 있는 시드니 중앙기상관측소는 2013년 1월 18일 역대 최고 기온 45.8 °C와 1932년 6월 22일 역대 최저 기온 2.1 °C을 관측했다.
역사[편집]
식민지 이전[편집]
오늘날 시드니라고 알려진 지역에 처음으로 거주한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와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한 원주민인 애버리지니이다. 시드니 서부의 자갈 퇴적물에서 발견된 조각돌 파편을 통해 기원전 45,000년 전에서 기원전 50,000년 전 사이부터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통해 약 30,000년 전부터 시드니 지역에서 인간이 활동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영국인이 상륙하기 직전까지 오늘날 시드니 대도시권 지역에는 약 4천명에서 8천명의 원주민이 거주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원주민들은 사냥, 낚시, 식물과 어패류 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연안 씨족의 식단은 해산물 비율이 높았던 반면 내륙 씨족의 식단은 숲속 동식물 비율이 더 높았다. 원주민들은 돌, 나무, 식물성 재료, 뼈, 껍데기 등으로 만든 독특한 장비와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만의 독특한 신체 장식, 머리 스타일, 노래와 춤도 가지고 있었다. 원주민 집단은 조상신, 토템, 초자연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 바탕이 된 신앙의식적인 생활도 했다. 서로 다른 씨족과 언어군의 사람들이 입회식과 기타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로 모였다. 이런 모임 활동으로 무역, 씨족간 결혼, 씨족 동맹 등이 만들어졌다.
초기 영국 정착민은 '유어라'(Eora)라는 단어가 원주민 용어로 '사람들' 혹은 '이곳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고 기록했다. 시드니 지역의 씨족들은 전통적으로 각 씨족마다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토 간 경계도 있었다. 하지만 각 씨족들이 어느 집단이나 국가에 속했는지, 언어와 방언, 입회의식 등은 어느 정도로 서로 차이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논쟁이 진행중이다. 시드니 지역의 주요 씨족으로는 해안가의 유어라족, 패러매타에서 블루마운틴즈까지 이르는 내륙 지역을 점령한 다루그족, 보타니만 남쪽의 다라왈족 등이 있다. 시드니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다르기눙어와 군둥구라어를 사용했다.
유배 마을(1788-1840년)[편집]
18세기 대부분 영국은 본토의 죄수들을 미국 식민지로 보냈으나 미국의 독립으로 1783년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상실하며 보터니만에 유배 식민지를 세우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또한 식민화 지지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세울 새 기지의 전략적 중요성과 함께 해군에 필요한 목재와 아마섬유를 보급받을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라고 지적했다.
1788년 아서 필립 선장이 이끄는 11척의 제1선단이 보터니만에 도착했다 필립의 선단은 죄수 736명을 포함한 1천명 이상의 정착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선단은 이후 정박하기 더 좋은 포트잭슨만으로 이동했으며 1788년 1월 26일 시드니 코브에 첫 정착지가 세워졌다. 1788년 2월 7일 필립 총독은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설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정착촌은 직접 경작하는 농업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하는 유배 식민지로 계획되었다. 죄수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무역과 조선업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정착지 주변의 토양은 경작에는 적절하지 않은 질이 낮은 토지로 판명되었고 첫해 농사가 흉작이 되어 몇년간 굶주림과 엄격한 식량 배급이 이어졌다. 식량 위기는 1790년 중반 제2선단과 1791년 제3선단이 도착하며 완화되었다. 이전의 죄수들은 작은 토지보조금을 받았고 정부와 개인 농장은 컴벌랜드 평원의 패러매타, 윈저, 캠던 등 더 비옥한 토양으로 퍼저나갔다. 1804년이 되면 식민지는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정도로 발전했다.
1789년 4월 천연두의 유행으로 시드니 지역에 살던 원주민의 절반이 사망했다. 1790년 11월에는 벤넬롱이란 원주민이 시드니 지역 씨족의 생존자 전체를 전부 모아 정착지로 이끌어 들어가면서 시드니 정착지 내에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살기 시작했다.
필립은 도시 개발에 관한 지시를 받진 못했지만 1788년 7월 시드니 코브의 새로운 도시개발계획을 작성했다. 이 계획에는 넓은 중앙대로, 정부 청사 건물, 법원, 병원 및 기타 공공건물은 있었지만 창고, 상점, 기타 상업 건물은 없었다. 필립은 자신의 계획을 별달리 신경쓰지 않았고 시드니 지역은 전체적으로 계획되지 않은 도시개발이 하나의 특징처럼 되었다.
1792년 12월 필립이 총독을 그만두고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나자 식민지의 군사 장교들은 토지를 취득하고 방문한 배에서 얻은 소비재를 수입해 오기 시작했다. 또한 전과자들도 무역업에 종사하며 소규모 사업도 운영했다. 군인과 전과자들은 허가 유무에 상관 없이 전부 오늘날 흔히 시드니타운이라고 부르는 왕령지에 집을 짓고 살았다. 뒤를 이은 총독 윌리엄 블라이(1806-1808년 재임)는 시드니의 무역과 상업에 제한을 가했고 퇴역 군 장교들이 소유한 집을 포함해 국왕령에 세운 모든 건물을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1808년 럼 반란이 일어났고 뉴사우스웨일스 군단의 쿠데타로 블라이가 총독 자리에서 축출당했다.
3대 총독인 래클런 매쿼리(1810-1821년 재임)는 시드니와 뉴사우스웨일스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은행을 설립하고 통화를 제정했으며 병원을 세웠다. 또한 시드니의 거리를 계획하기 위해 도시계획자를 고용하고 도로, 부두, 교회, 기타 공공건물의 배치와 건설을 의뢰했다. 시드니와 패러매타를 잇는 패러매타 도로는 1811년 개통했고 블루마운틴즈를 관통하는 도로도 1815년에 완공되어 그레이트디바이딩산맥 서쪽 나무가 드문 목초지에서 대규모로 방목과 농업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매쿼리가 1821년 총독직을 그만두고 떠나자 뉴사우스웨일스의 공식 정책이 영국 이민자들의 자유로운 이주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식민지를 향한 이민자는 1826-1830년 자유민 이민자 900명에서 1836-1840년 29,000명으로 급증했고 이들 중 대다수가 시드니에 정착했다. 1840년대까지 시드니는 더 록스와 같은 탱크 스트림 서쪽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계층이 거주한 지역과 부유한 주민이 거주하는 동쪽 지역이 확연히 구분되었다. 자유 정착민, 자유 정착민 사이에서 태어난 자유민, 재소 기간이 끝난 전과자가 시드니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민의를 대표하는 정부 수립과 죄수 이송 중단 요구을 향한 대중의 압력이 증가했다. 결국 1840년 뉴사우스웨일스로 죄수를 이송하는 작업이 중단되었다.
컴벌랜드 평원 분쟁[편집]
1804년 아일랜드 출신 죄수들이 약 300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시드니로 진군해 배를 징발하고 자유를 향해 항해하러는 캐슬힐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반란군의 무장이 빈약했고 지휘관이었던 필립 커닝엄이 포로로 붙잡히면서 반란군 본대는 로즈힐에서 약 100여명의 정규군과 자원병으로 구성된 수비군에게 대패했다. 최소 죄수 39명이 봉기과 이후 진압, 처형으로 사망했다.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가 시드니 서북쪽의 헉스베리강 인근 비옥한 영토로 넓어지면서 식민지 정착민과 다루그족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 분쟁은 1794년에서 1810년 사이에 최고조에 달했다. 페물우이와 그의 아들 테드부리가 이끄는 다루그족 무리는 식민지 개척지가 확장되자 농작물을 태우고 가축을 죽이며 정착민의 오두막과 상점을 급습하는 등 반복되는 패턴으로 계속 저항했다. 1795년에는 헉스베리강에 군 주둔군이 배치되었다. 1794년부터 1800년까지 분쟁으로 정착민 26명과 다루그족인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814년부터 1816년까지는 시드니 서남쪽 네핀 지역의 다라왈족이 사는 지역으로 식민지가 확대되면서 분쟁이 재개되었다. 여러 명의 정착민이 사망하자 매쿼리 총독은 다라왈 지역에 군 분견대 3개 이상을 파견하며 분쟁이 일어났고 1816년 4월 아핀에서 원주민 최소 14명 이상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며 분쟁이 절정에 달했다.
식민도시[편집]
1842년 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가 임명제에서 준선거제로 전환되었다. 같은 해 시드니도 도시로 선언되었고 행정위원회가 수립되어 도시를 통치하는 사람이 부유층에게 제한적으로 투표권이 있는 제한선거제로 뽑히기 시작했다.
시드니는 19세기 전반까지는 영국의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의 중심지로 명실상부한 최대 도시였다. 하지만 1851년에 뉴사우스웨일스주와 빅토리아주에서 금이 발견되며 골드 러시가 시작되자 처음에 남성 노동자들이 금광으로 대규모로 이주하며 경제적인 혼란이 발생했다. 멜버른이 곧이어 시드니를 제치고 호주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고 이후 두 도시가 계속해서 경쟁관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골드 러시로 해외에서 유입되는 이민자가 증가하고 금 수출로 인한 부의 증가로 주택, 소비재, 서비스, 도시 편의시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뉴사우스웨일스 정부는 시드니 지역에 철도, 트램, 도로, 항구, 전신, 학교, 도시 서비스를 부설하고 많은 투자를 하며 성장이 촉진되었다. 시드니와 인근 교외 지역 인구는 1861년 95,600명에서 1891년 386,900명으로 급증했다. 이와 함께 도시도 여러 특징적인 부분이 발전했다. 인구가 증가하며 좁은 거리가 줄지어 있는 테라스가 있는 집으로 가득찼다. 또한 시드니 대학교(1854-1861), 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1858-1866), 시청(1868-1888), 시드니 중앙우체국(1866-1892) 등 샌드스톤 지역에 새로운 공공건물들이 지어졌다. 정교한 커피 팰리스와 호텔들도 세워졌다. 자카란다나 프루메리아 같은 이국적인 식물들이 공원과 정원에 심어지며 시드니에 소개되었다. 시드니 해변에서 일광욕은 금지되었지만 지정된 해수욕장에서 분리되어 해수욕하는 것이 인기가 많았다.
가뭄, 공공사업의 축소, 재정 위기가 겹치면서 1890년대 내내 시드니는 극심한 경제 불황을 겪었다. 한편 시드니에 본부를 둔 뉴사우스웨일스의 총독 조지 레이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연방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901년-현재[편집]
1901년 1월 1일 오스트레일리아의 6개 식민지가 연방으로 합쳐지면서 시드니는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주도로 정해졌다. 1900년에는 시드니에 가래톳페스트가 확산되면서 새로 수립된 주정부는 부두를 현대화하고 도심의 빈민가를 철거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1914년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연방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시드니 남성이 군에 자원하였고, 도시의 실업률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1918년에는 1차대전 참전용사들이 종전으로 귀국하면서 데이시빌이나 매트라빌같은 신 교외 지역에 "참전용사를 위한 집"을 제공받았다. 정원이 딸린 교외지역과 주거와 산업지대가 혼합된 지역이 철도와 트램이 지나가는 지역을 따라 발전하기 시작했다. 1926년 시드니 인구가 1백만명을 돌파했으며, 이와 동시에 시드니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도시 지위를 탈환했다. 정부는 1차대전 전후 시드니의 철도를 전철화하고 시드니 하버 브리지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공공건설 프로젝트를 운용하며 일자리를 창출했다.
1930년대 대공황이 닥쳐오자 시드니는 뉴사우스웨일스 다른 지역이나 멜버른보다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신축 건물 공사는 완전히 중지되었고 1933년까지 남성노동자의 실업률은 28%였는데 알렉산드리아나 레드펀같이 노동자 계급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실업률은 40% 이상으로 올랐다. 많은 가족들이 집에서 쫓겨났고 시드니 해안가와 보터니만을 중심으로 판자촌이 형성되었는데 이 중 제일 큰 곳은 라페루즈에 있는 "해피 밸리"였다. 대공황은 정치적 분열도 악화시켰다. 1932년 3월 포퓰리즘 노동당 소속 주총리인 잭 랭이 시드니 하버 브리지 개통식에서 리본 커팅식을 할 때 극우 신전위대 출신 프랜시스 드 그루트가 난입해 사브르로 리본을 모두 잘라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드니는 전시 경제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산업 발전이 급격하게 이뤄졌다. 실업이 사실상 사라졌고 여성들은 예전에는 남성들이 가지고 있던 직업에 고용되었다. 한편 시드니는 1942년 5월과 6월에 일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21명이 사망했다. 도시 전역의 가정들이 공습 대피소를 짓고 대피 훈련을 했다.
2차대전 전후 이민과 베이비붐으로 시드니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고 컴벌랜드 평원 전역의 교외 지역에 저밀도 주택단지가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1947년부터 1971년까지 시드니 인구증가분의 3/4 이상이 이민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차지했다. 새로 세워진 컴벌랜드군 의회는 그린벨리와 마운트드뤼트에서 그동안 가장 큰 규모의 저밀도 주거단지 개발을 감독했다. 패러매타, 뱅크스타운, 리버풀과 같은 구 주거단지는 도심의 교외 단지가 되었다.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높은 관세의 보호를 받는 제조업이 전체 노동력 고용의 1/3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전후 긴 경제 호황이 이어지면서 소매업과 기타 서비스업이 신규 고용 일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954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오스트레일리아 왕실 순방의 일환으로 165년 전 필립 선장이 꽂은 유니언 잭 기가 나부꼈던 팜 코브를 방문했는데 이 때 도시 인구의 거의 대부분인 1백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을 지켜봤다. 당시 여왕은 재위중인 군주 중 처음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한 군주였다.
1950년대 시드니의 고층건물 건설이 늘어나고 도시계획자들이 구상했던 그린벨트 너머의 교외 지역도 개발, 확장되기 시작하자 지역 사회에서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노동조합과 주민들이 모인 시민단체연합은 더 록스와 같은 역사가 깊은 지역의 개발 프로젝트에 그린 밴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연방, 주, 지역 정부는 이후 다양한 문화유산지역과 환경에 관련된 법률을 제정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경우 건축가인 예른 웃손과 정부 사이에 비용 관련해서 분쟁이 일어나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오페라 하우스는 1973년 완공과 개방 직후 시드니의 주요 관광명소이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1974년부터 점진적으로 관세가 줄어드면서 시드니는 국내시장에 집중된 제조업 중심지에서 지역 주민과 오스트레일리아 국내, 그리고 해외 시장에 금융, 상업, 문화, 교육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시드니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주로 유입되었다. 2021년 기준 시드니는 인구 520만 명을 돌파했고 이 중 40%가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또한 영국을 제치고 중국과 인도가 해외에서 태어난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3]
경제[편집]
러프버러 대학교의 연구원들은 시드니가 전세계적인 경제와 고도로 통합된 세계 10대 도시 중 하나로 선정했다. 세계 경제력 지수에 따르면 시드니는 세계 11위의 도시이다. 세계 도시 지수에 따르면 세계적 참여도를 기준으로 시드니가 세계 14위에 등재되어 있다. 시드니에는 외국계 은행과 다국적 기업이 꽤 밀집되어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금융 수도이자 아시아-태평양의 선도적인 금융 중심지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시드니는 세계에서 15번째에서 5번째 사이로 물가가 제일 높은 도시이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물가가 제일 높은 도시이다. 2012년 UBS가 15개 재화에 대해 평가한 결과 노동자 임금의 경우 시드니는 전 세계 77개 도시 중 7번째로 높은 도시이다. 시드니의 노동자의 경우 연평균 1,846시간을 일하고 있으며 약 15일의 연가를 받는다.
시드니는 수많은 국제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관문이다. 2013년 기준 약 28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시드니를 방문했으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전체를 방문한 관광객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관광객들은 시드니에서 총 5,900만 밤을 지냈고 59억 달러 이상을 사용했다. 관광객이 들어오는 주요 국가로는 중국, 뉴질랜드, 영국, 미국, 대한민국, 일본, 싱가포르, 독일, 홍콩, 인도 순으로 많다.
교통[편집]
시드니 국제공항, 정식 명칭 킹스포드 스미스 국제공항은 시드니 남부 마스코트에 있으며 활주로 중 2개가 보터니만으로 뻗어 있다. 총 46개 국제선 노선과 23개 국내선 노선을 운영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공항이며 2013년 기준 3,790만명의 승객이 방문했으며, 2011년 기준 53만 톤의 화물이 운송되었다. 2016년에는 뱃저리스 크릭에 25억 달러의 건설비로 새로운 공항인 웨스턴 시드니 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시드니에서 두 번째로 큰 공항인 뱅크스타운 공항은 일반 항공과 전세편, 일부 정기 화물항공편을 운영하고 있다. 뱅크스타운 공항은 항공기 이동 횟수 기준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네 번째로 많은 공항이다.
시드니의 주요 해운 항구는 보타니 항으로 시드니 항을 넘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큰 항구이다. 그 외에 시드니의 유람선 터미널로 시드니 코브에 해외 승객 터미널이, 화이트배이에 화이트배이 크루즈 터미널이 있다.
1906년 개업한 시드니 센트럴 역은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 가장 크고 이용객이 많은 역이며, 시드니 철도의 중심역 중 하나이다. 시드니 교외 지역을 다니는 철도로 시드니 트레인스가 있다. 이 선로들이 모여 뉴사우스웨일스 철도망을 구성한다.
시드니는 한때 런던에 이어 대영제국에서 두번째로 거대한 노면전차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운영한 노면전차 노선의 총연장은 291 km이다. 하지만 내연기관의 등장으로 노면전차보다 버스가 더 유연성을 가지게 되면서 노면전차가 밀리기 시작했고 1961년을 끝으로 노면전차의 운행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1930년부터 시드니 전역에 연간 9천만명의 승객을 태우는 612대 버스가 있었다.
관광[편집]
시드니의 주요 관광 명소로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시드니 하버 브리지, 왓슨배이, 더 록스, 시드니 타워, 달링 하버,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 왕립 식물원, 오스트레일리아 박물관, 오스트레일리아 현대미술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 퀸 빅토리아 빌딩, 시 라이프 시드니 아쿠아리움, 타롱가 동물원, 본다이비치, 루나 파크 시드니, 시드니 올림픽 공원 등이 있다.
시드니의 관광업을 부흥하기 위해 고안된 프로젝트로 바랑가루의 카지노와 호텔 건설과 오스트레일리아 최대 크기의 전시장 및 컨벤션 센터인 인터네셔널 컨벤션 센터 시드니 건설을 포함한 달링 하버 재개발 프로젝트가 있다.
시드니는 전 세계적으로 유학생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기도 하다. 5만명 이상의 유학생이 시드니의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5만명 이상이 추가로 직업학교 및 영어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국제 교육은 시드니 경제에 약 16억 달러 어치 생산을 창출하고 있으며, 매년 4천개 가량의 일자리도 창출하고 있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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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오스트랄라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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