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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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영어: Melbourne) 또는 멜번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도시로, 빅토리아주의 주도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드니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통칭 멜버른이라고 하면 멜버른 시(City of Melbourne) 포함 주변 대도시권 9,900km²를 가리킨다. 멜버른 대도시 인구는 520만 명으로 호주 인구의 19%를 차지한다.[1]
개요
멜버른은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 빅토리아주의 주도로 포트필립만의 북안 야라강의 저지 및 구릉지에 있다. 멜버른 일대는 1803년 발견되었다가, 1835년 태즈메이니아섬에서 건너온 J.베트먼이 원주민으로부터 약 24만 ha를 사들였으며, 이어 J.포크너가 가게와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멜버른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명칭은 당시 영국 총리의 이름을 따서 1842년에 명명되었다. 1847년에 시제(市制)가 실시되고 영국국교회의 주관구가 설치되어 교회도시가 되었다. 1851년에는 서쪽 약 100km에 있는 밸러랫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일어났으며 여기서 얻은 부의 힘으로 대도시가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금의 산출량이 감소했으나, 그 대신 농산물 가공을 비롯한 제조업이 발전하여 광산 이직자를 흡수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 이후 오스트레일리아 최대의 도시로 군림해 왔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지위를 시드니에 빼앗겼다. 1901년에 연방 수도가 되었으나 1927년에 캔버라로 옮겨졌다. 1956년 제16회 올림픽 대회가 개최되었다. 멜버른이 급속하게 발전한 것은 포트필립만이 빅토리아주에서는 대형선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항구이기 때문에 외국무역이 성행하였고 이에 따라 각종 공업이 활발해졌기 때문이었다. 현재 멜버른은 중화학공업도시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제2의 무역항이기도 하다. 농산물 가공 외에 자동차, 전기기계, 항공기, 화학공업, 석유정제, 금속, 직물 등의 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그 중심은 포트필립 북부의 만입인 홉슨만 연안의 포트멜버른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공장들이 클레이튼, 오클리, 모라빈 등의 교외로 활발히 진출하였다. 중심부는 약 2.5km²의 지역으로 ‘시티’라 불리며, 폭 30m의 가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되어 있다. 19세기 이래의 공회당, 주의회 의사당, 법원, 도서관, 대성당, 대학 등의 대규모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도 관청가, 오피스가, 쇼핑가가 형성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건물의 높이를 40m로 제한하였으나 전후에 그 제한이 해제되자 100m급의 고층건물이 들어서게 되어 시가지의 모습이 일변하였다. 시티로부터 14개의 교외선과 8개의 하이웨이가 교외를 향하여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기후가 온화하여 연평균기온이 14.7℃이며, 가장 더운 달(2월)의 평균기온 19.9℃, 가장 추운 달(7월)은 9.6℃이다. 연강수량은 691mm이며, 월평균 강수량이 50∼70mm로 고르다. 시내에는 로열파크와 야라파크를 비롯하여 2,400ha에 이르는 공원과 녹지대가 있어, 아름다운 숲의 도시라는 인상을 준다. 멜버른대학(1853년 창립)과 라 트로브대학, 모나시대학 등이 있다. 2016년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분석기관 인텔리전트 유닛(EIU)의 ‘살기 좋은 도시’에 6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도시이기도 하다. 빅토리아주의 상업, 각종 산업 및 문화적인 활동의 중심지이며 도시 곳곳에 공원이 있어 ‘정원의 도시’란 별칭이 있다. 또한 스포츠 도시로도 유명하다. 1956년 하계 올림픽과 2006년 코먼웰스 게임의 주최 도시였다.[2]
지리 및 기후
멜버른은 호주 대륙의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륙에서는 최남단에 위치한 빅토리아의 주도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서쪽으로 네 개의 용암이 흘렀던 합류 지점에, 동쪽으로는 제4기 이암이, 포트 필립스를 따라서 남동쪽으로 홀로세 모래가 쌓인 합류지점에 건설되었다. 남동쪽 시외는 마사 산과 크레인본을 가로지르는 셀윈 단층 위에 자리잡고 있다. 멜버른은 야라를 따라 야라 계곡과 단데농산맥 쪽으로 뻗어있으며, 동쪽으로는 야라산맥으로 확장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야라 지류의 침수된 관목 계곡을 관통하고 있다.
포트 필립 베이에 위치한 교외 동쪽으로 펼쳐져 있다. 만 입구의 남동부에 위치한 쇼핑센터와 야라 구릉에서 야라강이 따라 흐르고, 마리비농 강과 그 지류의 서쪽과 북쪽은 평평한 농업지역이다. 구 시가지는 초 고층 빌딩이 늘어선 풍경을 볼 수 있고, 그 남단은 야라강에 접한다. 교외는 인구 밀도가 낮고, 한쪽 편 4차선 정도의 도로가 바둑판의 목장에 깔려 있고, 단독주택에서는 넓은 정원을 가진 집들이 늘어서 있다.
멜버른은 서안 해양성 기후(Cfb)로 분류되지만, 일교차가 크고 날씨가 변하기 쉽다. 겨울에는 호주의 주도 중에서 가장 춥지만, 눈이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 2006년에는 관측 사상 최악의 가뭄에 시달렸다. 평소라면 년간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9월, 10월에 전혀 비가 내리지 않았다. 2009년 2월 7일에는 관측 사상 최고 기온 46.4°C를 관측했다. 이는 평년보다 약 20°C 높은 것이었다.[3]
역사
현재 멜버른 도심 지역이 위치한 포트필립과 야라강 사이 지역은 몇몇 다른 언어를 쓰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집합체인 쿨린의 땅이었다. 그들의 선조는 31,000-40,000년 전부터 그 지역에 살아왔다. 그들은 어업, 수렵, 채집 등을 행하며, 포트필립의 풍부한 자원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었다. 유럽 이민자에 의해 반입된 질병으로 많은 타격을 받았다. 쿨린 족은 학대, 오진, 알코올, 성병으로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870년대까지 많이 남아있던 쿨린족이 현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오늘날 멜버른에 사는 대부분의 원주민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다. 오늘 원주민의 역사에 남아 있는 것은 카누에 쓰인 나무가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 근처에 있는 것과 포트 필립 연안에 있는 패총 정도이다.
1798년에 웨스턴 포트까지 간 죠지 배스에 의해서, 배스해협이 발견된다. 레이디 넬슨호로 1802년에 존 말레이가 포토 필립을 발견하면서, 매슈 플린더스가 그 뒤를 이었다. 1803년에 찰즈 그림즈는 야라강의 하구를 발견했고, 지금의 케이라 지구까지 도달하였다. 같은 해 1803년 하반기에 NSW 총독은 프랑스의 배스 해협 지역의 점령을 두려워해서 데이비드 콜린스 대령을 300명의 죄수와 함께 포토 필립, 모닌톤 반도의 소렌트에 보내 거주지를 개척하려 했다. 그러나 담수의 부족으로 단념하고 만다. 1804년에 태스매니아로 거주지를 옮겨 호바트를 만든다. 그 죄수 중에는 이후의 개척자이자, 정치가인 존 파스코 포크너가 있었다.
배스해협의 북쪽 해안에는 고래 수렵꾼과 물개 수렵꾼이 20년 정도 있었다. 1824년 해밀턴 흄과 윌리엄 호벨은 육로로 NSW에서 웨스턴 포트를 목표로 해 왔지만, 대신 코라이오 만에 도착했고 양질의 목초지를 발견한다. 10년 후, 태즈마니아에서 방목을 하던 에드워드 헨티는 지금의 빅토리아 서부 포틀랜드(Portland, Victoria)의 왕 영지에 불법 양목장을 설립했다.
배트맨은 론세스톤으로 돌아와 야라에 거주지를 개척하기 위한 대규모 탐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동 시기에 론세스톤의 실업가였던, 존 파스코 포크너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포크너는 스쿠너선 엔터프라이즈호를 사 이주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4월 4일에 출항했다. 1835년 4월 30일에 대리 함장을 맡고 있던 존 랜시는 거주지가 될 땅을 고르고, 배를 정박시켜 배 위의 짐을 내렸다. 그곳은 야라강 북쪽 기슭으로 지금의 스펜서 스트리트와 킹스 브릿지 사이 부근이었다.
한편으로 배트맨은 레벡카호로 출항하여, 9월 2일에 야라에 도착했지만 이미 포크너의 사람들이 있는데 낙담하면서 분개했다. 하지만 두 집단에게 충분한 토지가 있었기 때문에, 10월 16일 포크너가 다른 거주자와 함께 도착하자, 그는 토지를 분배하고, 누가 최초로 도착했는 지로 논쟁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했다. 배트맨과 포크너는 새로운 마을에 살았고, 1837년 3월에 영국 수상 멜버른 경을 기념하여 정식으로 "멜버른"으로 불릴 때까지 몇 개의 다른 이름이 그 마을에 사용되었다.
멜버른은 야라 하구 언덕에 텐트나 오두막 모임에서 시작되었지만 10년도 지나지 않아 목축의 중심지가 되었고, 돌이나 벽돌로 금융 빌딩이 지어졌다. 1836년 9월에는 뉴사우스 웨일즈 식민지의 포토 필립 지구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1851년 7월 거주자들에 의한 빅토리아를 독립 식민지로 하는 운동을 수습한 라 트로브가 최초의 총독 대리가 되었다. 몇 달 후 금이 밸러랫, 벤디고를 비롯한 식민지의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계속된 골드 러시는 빅토리아, 특히 멜버른을 급격하게 변혁시켰다.
1850년대 빅토리아 중앙에서 금이 발견됨에 따라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고 항구를 통해 무역의 필요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1880년대는 대영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되어 "좋은 멜버른"으로 알려졌다. 오늘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건물이 런던을 제외한 전 세계 도시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다.
1901년에 호주가 성립된 후 1927년에 캔버라로 이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연방의 임시수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이민자의 유입으로 20세기 전반은 꾸준히 성장을 계속했다. 1956년 남반구 최초의 하계 올림픽대회(멜버른 올림픽)가 개최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개최되기 전까지는 남반구에서 유일한 개최지였다. 1990년대에 크라운 카지노와 멜버른 박물관, 멜버른 전시 컨벤션 센터 등 공공 건축물이 활발하게 건설되었다.[4]
경제
멜버른은 오스트레일리아 제2의 금융 중심지로, 오스트레일리아의 3대 대기업인 텔스트라, BHP 빌리톤, 오스트레일리아 은행의 본사가 있으며, 호주상공회의소, 호주증권거래소에 상장된 대부분의 회사의 본사가 밀집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이자 기계 공업, 식품 가공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한때 섬유, 의류, 신발 산업이 성행했지만 수입품이 들어오면서 그 영향으로 지금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다만 해당 산업의 영향으로 멜버른은 여전히 패션의 중심지로 꼽히고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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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오스트랄라시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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