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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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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彌勒寺址)
미륵사지 석탑(서탑)
익산 미륵사지 야간 전경
강당지
동원금당지
중원목탑지

미륵사지(彌勒寺址, Mireuksa Temple Site, Iksan)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의 사찰터이다.

미륵사지 관광지는 국비 포함 총 386억원의 예산이 투입됐으며, 총 면적 108,743㎡ 에 이른다. 주차장 부지를 제외한 전통문화체험관, 광장, 관광안내소, 자연지형녹지 등 다양한 관광편의시설 규모만 8만6천7,808㎡에 달해 국립익산박물관 면적의 2배가 넘는다. 2021년 8월 지방도 722호선 1㎞ 구간 이설과 4차선 확장하고 336대 수용가능한 주차장을 마련해 관광객들의 교통 편의성을 높였다. 특히 미륵산을 배경으로 동탑과 서탑, 미륵사지 터가 한눈에 펼쳐지는 광장은 역사문화 소통공간으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륵사

미륵사(彌勒寺)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이다. 2009년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따르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륵사는 익산 용화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좌우 능선 사이에 평지에 남향을 향하여 건립되었다.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사적 제150호 익산미륵사지(益山彌勒寺址)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는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서탑)과 복원된 동탑이 있고, 목탑이 있었던 터가 있으며, 미륵사지 당간지주(보물 236호) 외에 무왕과 왕비의 설화가 깃든 유물과 유적 등이 1966년에 발굴되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지역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 4곳(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 2곳(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미륵사지))등 3개 지역 8곳이 세계 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하여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98년 서탑이 붕괴 위험 등으로 인하여 해체 복원이 시작되었고 21년만인 2019년 완료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미륵사지석탑

국보 제11호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은 미륵사지 서원에 위치한 탑으로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절반 이상 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 있던 것을 일제가 1915년에 콘크리트로 보강하였다. 이에 1999년에 해체하여 보수하기로 결정하였고,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체가 시작되어 2018년 7월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 탑은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하고,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생각되며, 석재를 사용하여 목조탑을 표현한 독특한 탑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해체 작업 중 석탑 안에서 사리를 넣어 안치한 유물 일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미륵사지의 3원 가람배치를 생각해 볼 때, 서원과 동원의 탑은 동일한 모양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 동탑은 남아 있던 원래 탑의 석재를 사용하여 복원되어 있다. 중원의 탑은 탑이 있었던 곳의 면적으로 보아 서탑이나 동탑보다 그 규모가 컸을 것으로 생각되며, 주변에서 불에 탄 목탄과 기와 등이 발견되어 목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

미륵사는 동양 최대라 일컬어질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백제의 사찰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719년에 미륵사에 벼락이 쳤다는 기록만 확인된다. 미륵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만 보이는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子寺)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지어 달라고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고,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廡:회랑)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고 하였다.

위의 미륵사 연기 설화에는 사실로 믿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것은 미륵사지의 발굴조사 결과와 일치하기도 하는 등, 실제 사실을 반영하는 내용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무왕의 왕비가 미륵사 창건을 발원(發願)하였다는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무왕의 아버지는 못의 용왕이고, 꾀를 내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절을 세울 것을 간청한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일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런데 2009년에 탑을 해체하면서 사리함이 발견되고, 이 사리함과 함께 글자가 새겨진 금판이 발견되었다. 이 금판에는 사리를 안치한 시기는 639년(무왕 40)이고, 사리를 봉안한 인물은 "왕후인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딸"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사탁(혹은 사택)'氏는 곧 사씨(沙氏)로 백제 후기의 유력 가문의 성씨이다. 639년은 무왕 재위 40년이므로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무왕의 왕비는 선화공주여야 하지만, 639년 작성된 사리봉안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새로운 자료를 활용하여 무왕과 선화공주 그리고 사탁적덕의 딸 3인의 관계에 대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배치

미륵사지의 경우 1탑 1금당의 형태이면서 서쪽과 중심 그리고 동쪽으로 배치하여 '3탑 3금당의 3원 병렬식 가람'의 형태이다. 이는 백제계의 가람배치인 남북을 축으로 하면서 남쪽부터 차례대로 탑, 금당, 강당 그리고 승방이 일직선상으로 하나하나 씩 배치되는 것과는 다르며고, 탑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북에 3개의 금당을 배치한 고구려의 회탑식(回塔式) 가람배치와 고신라의 일탑삼금당 형식과도 또 다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중심에 있는 중금당의 목탑을 중심으로하여 동(東)금당과 서(西)금당 앞에는 각각의 석탑이 세워졌었다. 현재의 동원 구층석탑의 경우 발굴한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미륵신앙을 이유로 독특한 방법으로 세운 것이다. 3번의 설법 모임에 참가한다면 그 누구도 구제 받을 수 있다는 내용 때문에 미륵 하생경의 미륵이 이 땅으로 하계하면서 용화수의 아래에서 3번 생각을 설법한다. 미륵사지는 원래는 9층이었지만 폐사가 된 이 후에 원래의 형태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6층의 형태만이 남아있었다. 서(西)탑은 처음에는 석탑이 7층이라고 생각했지만 동(東)탑지에서 발견한 지붕돌과 노반석들을 지붕돌을 바탕으로 서(西)탑과 비례하여 복원한 결과로 9층이라는 것을 알아내게 되었다. 원래의 크기를 추정하자면 상륜부까지 모두 합쳐서 26m 가량 되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상하(上下) 2층으로 구성되어있었으며 전체의 너비는 총 12m이다. 초층 탑은 네 면에 3칸씩이고 그의 중앙 칸의 경우 내부와 통하고 네 쪽 모두에 문이 있다. 또한, 탑의 중앙에는 커다란 철주가 있다.

그리고 미륵사지의 경우 목탑 기법이 반영되었다. 기단부의 경우 목탑의 기단과 같이 단층의 기단으로 삼았으며, 1층 탑신 4곳에 사람들이 행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는 특징이 있다. 탑신의 기둥에는 아래는 넓게, 위에는 좁게 함으로써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각각의 면에는 배흘림 기법으로 기둥을 세웠으며 그 기둥 위쪽엔 창방이라 불리는 목조로 된 건물의 특징인 구조물로 되어있다. 또한 그 위쪽에는 3단 층 급으로 하여 지붕을 받들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공포를 석재로 만들어서 목조 건물의 공포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은 3단 층급 받침은 목조 건물의 공포에 해당하였으나 멀리서 바라본다면 목조 건물에서의 공포와 매우 비슷하다는 평을 받는다. 이것을 통하여 당시의 백제 사람들의 뛰어난 석재 가공능력을 알 수 있다.

탑 주위의 4개의 귀퉁이에는 수호 석인상이 존재한다. 서남(西南)쪽 것은 없어졌으며 오랜 기간이 흐르면서 비바람에 닦이면서 두루뭉수리 돌덩어리로 변한 3개의 석인상이 남아 있다. 특히, 그 중에서 동남(東南)쪽의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이 비교적으로 본래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눈 코 입은 거의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이지만 아담하면서도 공손한 느낌을 주는 몸과 가슴의 앞쪽에 종그려서 모아 놓은 두 손으로 소임을 지금까지도 충직하게 지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 조형물 속에서 끌어들인 백제 전통적인 수호신상으로써, 돌하르방이나 돌장승과 같이 우리나라의 토속신앙 조형물의 원형 중 하나로 생각한다.

관람안내

  • 관람시간 : 오전9시 ~ 오후 6시(전시관) 옥외공간 7시~일몰시까지
  • 휴관일 : 1월1일, 설날·추석 당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하고 다음 평일에 휴관
  • 관람료 : 무료
  • 주차비 : 무료
  • 관람예약 : 별도 예약 없이 관람이 가능.

교통안내

기차(KTX, SRT, 새마을호, 무궁화호)
  • 익산역 하차, 익산역 정류장에서 시내버스(41, 41-1, 60, 60-1, 60-3) 이용
버스
  • 익산공용버스터미널 하차 평화동 정류장에서 시내버스(60, 60-1, 60-3) 이용 미륵사지 정류장에서 하차
  • 전주 공용버스터미널에서 금마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운행
  • 금마에서 41, 41-1, 60, 60-1, 60-3 시내버스 이용 또는 금마에서 미륵사지까지 택시 이용(소요시간 5분, 요금 5000원 정도).
택시
  • 익산역 기준 소요시간 약 30분, 택시비 약 15,000원
승용차 (네비게이션 검색 
국립익산박물관)
  • 호남고속도로 익산 I.C → (722번 지방도) → 익산시내방면 5.3㎞ → 금마사거리 → 우회전 → 금마, 미륵사지
  • 삼례 I.C → (1번 국도, 10.4㎞) → 금마, 미륵사지
  • 논산 I.C → (1번 국도) → 연무 → 여산 → 금마, 미륵사지
  • 서해안 고속도로 이용 시 동군산 I.C → 718번 지방도 이용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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