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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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랑키야(스페인어: Barranquilla)는 콜롬비아 북부 아틀란티코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120만 명으로 콜롬비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콜롬비아 제4의 도시이기도 하다.[1]
개요
바랑키야는 콜롬비아 북부, 카리브해 연안 지역의 최대 항구도시로 마그달레나강 어귀에서 상류쪽으로 18km 떨어진 저지대에 있으며 콜롬비아 내륙과 카리브해를 연결하는 콜롬비아 제1의 무역항이다. 아틀란티코주의 주도이며 콜롬비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다. 지리적으로 카리브해와 면해 있고, 내륙으로 운항할 수 있는 마그달레나강이 흐르기 때문에 예로부터 교역의 요충지로 이용되어 왔다. 17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건설되었으나, 열대의 저지대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1930년대 후반에 강 어귀의 모래톱을 제거한 후, 외양선의 입항이 가능해지면서 도시로서의 본격적인 발전이 시작되었다. 이어 1961년에는 보고타와 연결되는 태평양철도가 완공되었다. 무역항으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하여 콜롬비아 최대의 항구도시가 되었다. 바랑키야는 내륙에서 생산되는 커피, 석유, 목화 수출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으며, 콜롬비아 북부 유전에서 시작되는 천연가스를 운송하는 송유관의 최종 터미널이기도 하다. 다양한 공업이 이루어지는 공업도시이며, 항구는 교역량이 상당히 많다. 콜롬비아 북부 해안지방의 중심지이다. 시멘트, 유리, 화학공업, 맥주, 약품, 섬유, 정유, 담배, 제지, 음료 등의 공업이 활발하고 목화, 설탕, 과일, 소 등의 농축산물을 집산한다. 시가지는 에스파냐풍(風)의 색채가 짙으며, 강변과 운하변에 늘어선 시장이 눈길을 끈다. 볼리바르 중앙광장의 대성당과 아틀란티코대학 등이 있다. 바랑키야에서 열리는 축제로 유명한 바랑키야 카니발은 2003년 유네스코(UNESCO)에 의해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2]
지리 및 기후
바랑키야는 콜롬비아의 서부 지역을 관통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마그달레나강이 카리브 해와 만나는 강어귀에서 내륙으로 약 18㎞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바랑키야는 마그달레나강의 삼각주에 자리 잡아, 평균 해발고도가 18m 정도로 전반적으로 매우 낮으며, 곳곳에 자연제방, 습지와 호수가 분포하는 하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시가지는 마그달레나강의 서안에 입지하고 있으며, 강에 면한 동쪽 시가지는 낮은 평지이지만 서쪽으로 가면서 고도가 차츰 높아지는 모습을 띤다. 토양은 주로 하천 퇴적물, 즉 제4기 충적토와 호성토로 구성되어 있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바랑키야는 열대 사바나 기후(Aw 기후) 지역에 속하며, 연중 덥고 상대 습도가 높다. 연평균 기온은 27.4℃이며, 낮 기온은 보통 32℃ 정도로 높게 유지된다. 그러나 11월 말부터 4월 초까지는 무역풍으로 인해 서늘해져서 낮에도 활동하기 편하고, 저녁부터 밤까지는 바람이 강해져서 기온이 더 내려가기도 한다. 우기는 5월부터 11월까지이며, 이때 배수 시설이 미흡한 일부 구역에서는 홍수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연 강수량은 약 814㎜ 정도이지만,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의 건기, 특히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 동안은 월 강수량이 10㎜에도 못 미친다.
역사
원주민의 정착지였거나 에스파냐 식민 시기에 세워진 콜롬비아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바랑키야는 상당히 후대에 건립된 도시이다. 바랑키야에 관한 가장 오래된 역사적 기록은 1533년 에스파냐 역사학자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 이 발데스(Gonzalo Fernández de Oviedo y Valdés)가 쓴 페드로 데 에레디아(Pedro de Heredia)의 여행 경로에 대한 기록에서 발견된다.
에스파냐 정복자인 페드로 데 에레디아는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Cartagena)를 건설한 인물이기도 한데, 그에 따르면 바랑키야는 산타마르타(Santa Marta)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카누를 타고 마그달레나 강을 오르내리면서 정박하던 곳이었다. 즉 마그달레나강은 교역로로 활용되었으며, 강어귀에 있는 바랑키야는 원주민들이 말린 새우를 가져와 소금과 다른 물건들을 교역하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1629년에 인디언의 한 부족이 정착하면서 촌락이 형성되었다.
19세기 초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콜롬비아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바랑키야는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812년 피에레 라바투트(Pierre Labatut) 장군이 이끄는 콜롬비아 독립군은 바랑키야 인근에서 에스파냐 군대를 격파하였고, 당시 카르타헤나의 최고 지도자였던 마누엘 로드리게스 토리세스(Manuel Rodríguez Torices)가 1813년 4월 7일에 바랑키야를 도시로 승격시켰다. 이날은 후일 ‘바랑키야의 날’이라고 불리며 기념일이 되었다.
1815년 바랑키야의 부유한 상인인 호아킨 바예호(Joaquín Vallejo)가 사재를 털어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으나 에스파냐 군대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1821년 카르타헤나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 군대가 패전하면서 당시 카르타헤나의 관할 구역이던 바랑키야도 독립을 이루었다. 에스파냐 세력은 1823년 마라카이보호(Lago de Maracaibo)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콜롬비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바랑키야는 1823년에 증기선이 도입되고 2년 뒤에 마그달레나 강을 항해하는 항로가 열리면서 교역의 요충지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바랑키야는 콜롬비아 내륙의 도시와 촌락을 연결하는 교역 도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콜롬비아의 주요 특산물인 커피를 수출하는 관문이 되었다.
1863년 콜롬비아 합중국(Estados Unidos de Colombia)이 설립되고, 상업이 활성화됨에 따라 바랑키야에 건설 붐이 일었다. 1869년~1871년 사이에 상업의 요충지로서 바랑키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콜롬비아 최초의 철도인 볼리바르 철도(Ferrocarril de Bolívar)가 건설되어 바랑키야와 서남부 내륙의 살가르(salgar)를 연결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수로, 전차, 전화 등 여러 근대적 시설이 들어섰으며, 1893년 도시의 북쪽 교외에 푸에르토콜롬비아 부두(Muelle de Puerto Colombia)의 건설이 완료되었다.
근대 교통수단의 발달로 내륙 운송이 원활해지고, 카리브 해로 통하는 항구의 건설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자 바랑키야는 20세기 전반 동안 콜롬비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가 되었다. 특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력의 수급과 시장의 수요가 증가하여 서남아시아, 유럽, 남부 및 동부 아시아로부터 이주민이 유입되어 성장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또한 다양한 사회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주민의 유입은 바랑키야를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국제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1905년에는 바랑키야 상공회의소가 건립될 정도로 도시 경제가 성장을 이루었다. 푸에르토콜롬비아 항은 콜롬비아의 최초 항구이자 한때 세계에서 가장 긴 부두를 가졌었다. 이와 더불어 유대 인뿐만 아니라 시리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프랑스, 독일, 미국,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의 다양한 나라에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높은 성장세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상수도와 전기가 공급되고 운동 경기장도 건설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사바니야 만(bahía de Sabanilla)에 있는 위성 항구들을 잇는 철로가 완공되었고, 마그달레나 강의 모래톱이 제거되면서 바랑키야는 더욱 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강을 따라 운송되는 화물의 양이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는데, 이는 도로 교통이 발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태평양 연안의 항구 도시인 부에나벤투라(Buenaventura)가 성장함에 따라 무역항으로서 바랑키야의 중요성과 경쟁력은 점차 떨어지게 되었다.[3]
경제
바랑키야는 콜롬비아의 카리브해 연안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지만,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도로 교통이 발달하면서 태평양 연안 항구도시인 부에나벤투라(Buenaventura)가 더 각광받았다. 1993년에 경제 특구항으로 지정된 바랑키야는 마그달레나 강을 통해 내륙과 교통하고, 카리브해를 통해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과 교역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제조업, 상업, 금융업, 서비스업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내륙에서 생산된 커피와 석유, 그리고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목화 수출의 창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바랑키야 관세자유지구(Zona Franca de Barranquilla)에서는 90여 개의 기업이 입지하여 다양한 상품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4]
교통
바랑키야는 일찍부터 항공 교통이 발달된 도시이다. 1912년에 콜롬비아 최초의 비행이 이루어졌으며, 1919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민간 항공사(SCADTA)가 설립되었다. 바랑키야의 남쪽 교외에 위치하고 있는 에르네스토 코르티소스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Ernesto Cortissoz)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항 가운데 하나로 1919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국내선과 국제선이 운항되고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버스와 미니버스, 택시 등이 주로 이용된다. 2001년에 시 당국이 광역 도시권 내의 간선 급행 버스 시스템인 트란스메트로(Transmetro)를 운영하기 시작하여 굴절 버스로 광역 도시권의 주요 지역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1893년에 건설된 푸에르토콜롬비아 부두(Muelle de Puerto Colombia)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긴 부두를 가지고 있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수많은 유럽 이주자들이 이 항구를 통해 콜롬비아에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시설 노후화와 2009년 발생한 강풍에 의한 피해로 그 기능이 상당히 위축되었다.
오늘날 주요 항만 기능은 카리브해로 흐르는 마그달레나강 하구의 보카스데세니사(Bocas de Ceniza: ‘재의 입구’를 가리키는 에스파냐 어, ‘재의 수요일’ 즉 사순절 첫날 이 강의 어귀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붙인 이름)를 정비한 1936년의 공사로 대형화, 현대화된 바랑키야 항구(Puerto de Barranquilla)가 맡고 있다.
관광
바랑키야는 대도시이고 주로 산업도시라서, 세계 각국의 사업가나 출장객들의 왕래가 잦으나, 관광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볼거리는 바랑키야 축제(Carnaval de Barranquilla)이다. 이 축제는 재의 수요일 전에 4일간 열린다. 2003년 11월, 유네스코는 이 축제를 "구전 및 무형의 인류의 유산의 걸작" 28개 중 하나로 선포하였다.
현지 주민과 콜롬비아 사람들은 바랑키야를 보통 "쿠람바"(Curramba, 낱말 놀이에서 쿠람바는 "축제"를 뜻한다.), "콜롬비아로 가는 황금 문"(Puerta de Oro de Colombia)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랑키야가 막달레나강의 삼각주에 있어, 콜롬비아에서 대서양으로 향하는 가장 중요한 상업 항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랑키야 주민들은 바랑키예로스(Barranquilleros)라 하는데, 외향적이고 친근한 태도 및 편안한 행동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바랑키야 주민들은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졌으며, 목표가 직접적이고 근면한 태도를 보인다.
관광객들은 보통 항공편으로 이 도시에 도착한다. 에르네스토 코르티소스(Ernesto Cortissoz) 공항이 도시 남쪽 멀리에 위치한다. 공항에서 도심까지는 택시로 약 8~12 미국 달러가 소요된다. 국제노선으로는 마이애미와 파나마시로 가는 노선이 있고, 국내노선으로는 보고타, 메데인, 칼리 등이 있다. 공항 렌터카는 허츠(Hertz)와 내셔널 카 렌탈(National Car Rental)이 콜롬비아 국외에서 예약이 가능하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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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바랑키야〉, 《위키백과》
- ↑ 〈바랑키야(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바란퀼라〉, 《요다위키》
- ↑ "Barranquilla", Wikipedia
- ↑ 〈바랑키야의 주요 관광 자원〉,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바랑키야〉, 《위키백과》
- 〈바란퀼라〉, 《요다위키》
- "Barranquilla", Wikipedia
- 〈바랑키야(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바랑키야의 주요 관광 자원〉,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남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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