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김녕사굴
제주 김녕사굴(金宁蛇窟)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용암 동굴이다. 김녕굴이라고도 한다. 총길이는 705m다.
김녕사굴은 용암동굴로 만장굴과 함께 1962년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7월 2일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보전되고 있다.
개요[편집]
제주 김녕사굴은 제주도 북동쪽 26km 지점 만장굴 부근에 자리 잡고있다. 원래 만장굴과 하나로 이어진 굴이었으나 천장이 붕괴되면서 두 개로 나뉘어진 것이다. 한라산의 기생화산(오름) 중 '거문오름'이 신생대 플리오세와 플라이스토세기 사이에 분화하면서 그 용암이 지하를 뚫고 해안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용암동굴을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라 칭하는데, 만장굴과 김녕굴은 그 일부다.
이 동굴의 내부형태가 뱀처럼 생겼다 해서 '사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입구는 뱀의 머리부분처럼 크게 벌어져 있는 반면,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갈수록 뱀의 형체처럼 점점 가늘게 형성되어 있어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게 한다.
동구(洞口)는 해발고도 60m이다. S자형의 동굴은 지표가 함몰된 2개소의 협착부(狹窄部)에 의하여 3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동굴이 52m, 제2동굴의 상층부 54m, 하층부 156m이며, 제3동굴이 352m이다. 지표 함몰에 의한 협착부를 합하면 길이 705m이다. 김녕사굴은 그 동안의 한일합동 동굴조사 등에 의하여, 남쪽으로 연속되는 만장굴(萬丈窟)과 동일한 동굴 시스템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으므로 넓은 의미로는 만장굴계(系)에 속한다. 동굴 생성 당시의 상태, 즉 만장굴과의 사이에 함락부가 뚫린 상태로 있어 2개의 동굴이 연결된 것으로 본다면 길이는 엄청나다. 동굴의 특이한 지형으로는, 관리사무소 부근의 짧은 공동(空洞) 윗부분에 발달된 모식적인 용암선반[熔岩棚]과 거기 부착된 규산화(硅酸華) 등을 들 수 있다. 또 동굴 끝부분에 발달된 대규모의 용암폭포, 다량의 용암이 흘러내린 동굴바닥의 형상 등이 특이한 경관을 이룬다. 동굴 깊은 곳의 공동 천장에서 패사(貝砂)가 용해된 석회질 침전물과 퇴적물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지표에 운반 퇴적된 해안사토 속의 패사가 그대로 지층 속에 매몰된 것이다.
현재는 동굴 생태계 보호를 위해 출입을 제한한다. 주변 관광지로는 만장굴, 김녕해수욕장, 김녕미로공원 등이 있다.
전설[편집]
사굴(蛇窟)이라는 명칭은 뱀굴이라는 의미로 다음의 전설에서 유래한다.
- 제주 구좌읍 김녕리 마을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여기에서 큰 뱀이 살았다고 하여 '뱀굴[蛇窟]'이라고 한다. 이 뱀에게 매년 처녀 한 사람을 제물로 올려 큰굿을 했다. 만일 굿을 하지 않으면 뱀이 곡식밭을 다 휘저어 버려 대흉년이 들었다. 그런데 양반집에서는 딸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평민의 딸이 희생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평민의 딸은 시집을 갈 수가 없었다. 그즈음, 조선 중종 때 서련이라는 판관이 제주에 부임해 왔다. 서 판관은 뱀굴의 소문을 듣고 괴이한 일이라며 분개하였다. 곧 술, 떡, 처녀를 올려 굿을 하라 하고, 몸소 군졸을 거느리고 뱀굴에 이르렀다.
- 굿이 시작되어 한참이 지나자 과연 어마어마한 크기의 뱀이 나와 술과 떡을 먹고 처녀를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이때 서 판관은 군졸과 함께 달려들어 창검으로 뱀을 찔러 죽였다. 이것을 본 심방(무당)이 "빨리 말을 달려 성(현재의 제주 읍성) 안으로 가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서 판관은 말에 채찍을 놓아 무사히 성의 동문 밖까지 이르렀다. 이때 군졸 한 사람이 "뒤쪽으로 피비[血雨]가 옵니다."라고 외쳤다. "무슨 비가, 피비가 오는 법이 있느냐?"라고 하며 서 판관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마자 서 판관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죽은 뱀의 피가 하늘에 올라가 비가 되어 서 판관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변이[편집]
김녕사굴과 관련된 이야기의 변이로 판관 서련 대신에 이삼만(李三萬)이 등장하는 것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삼만이 뱀을 죽이고 관아 마당에 이르러 안심하고 돌아보자 그만 즉사한다는 내용으로 나타난다. 그 뒤로 정월 사일(巳日)에 종이에 '李三萬'이라 써서 뱀이 잘 다니는 곳에 붙이면 뱀이 무서워서 다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 이삼만
이삼만이란 이는 실존했던 인물이다. 설화 속 이삼만의 만은 일만 만(萬)이지만 실존인물 이삼만은 늦을 만(晩) 자를 쓴다. 실존인물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은 설화와 달리 관직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고,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게 사사한 명필로 유명하다. 호는 창암(蒼巖)으로 전주 지방의 명사였다. 본디 정읍 사람으로 집안이 본래 부유했으나 이삼만이 글쓰기에만 몰두하느라 가산을 다 탕진해 가난히 살았다.
이삼만을 두고 한 가지 야사가 내려온다. 이삼만의 부친은 이삼만이 어릴 적에 뱀에 물려죽었고 이로 말미암아 집안이 기울어졌다는 것. 그래서 이삼만은 뱀을 원수로 여겨 길가다가도 뱀만 보면 돌이나 지팡이로 찍어 죽이고 잡아먹었다. 하도 이삼만의 살기가 등등해 뱀들도 이삼만이 오면 숨기 바빴다고 한다. 이런 내력이 있어 이삼만은 죽어서도 나름대로 신격화되었다. 이삼만의 고향 정읍 지방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이나 상사일(上巳日)인 첫 뱀날에 '배암뱅이' 풍속이라 하여(뱀막이) 이삼만이 쓴 글, 또는 이삼만 이름 석자를 거꾸로 붙이고[3]이삼만의 이름을 외치면 뱀이 안 꼬인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무튼 뱀의 저주를 받고 풀썩 쓰러져 죽는 설화 내용은 알아주는 뱀사냥꾼이었던 실제 이삼만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사실 이런 설화들은 서울에서 온 유학으로 무장한 혁신적인 수령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지방 토호들간의 대립을 나타내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제주도는 예전부터 내지와 다른 문화 생활을 영위했는데 한양에서 부임한 수령들 중에 음란하고 천박한 풍속이라며 예전부터 전해오는 악습들을 없애는데 주력하는 이들도 있었다. 괴력난신을 배제하고 지방 곳곳에도 유학 장려와 성리학 보급에 힘썼던 조선에서는 당연한 일이였다. 비슷한 이유로 서낭당이나 부군당도 이렇게 갈려나갔다. 이렇듯이 서문표 설화처럼 지방 토호나 유지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일부러 미신이나 악습을 조장해 힘없는 민초들을 핍박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다 못한 유학자 출신 수령들이 본보기 삼아 그들이 표면적인 구실로 삼은 여러 미신들을 앞서서 타파했다. 위 설화 속의 큰뱀도 지방에 오래 뿌리잡아 세력화된 악질 토호들의 은유일지도 모른다.
분석[편집]
이 전설은 용기와 지혜가 있는 관장이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악을 제거하고 백성을 살린 구조다. 한편 제주도의 큰굿에서 연행되는 뱀굿으로 '용놀이'가 있다. 이 굿은 서련 판관이 김녕사굴의 뱀을 퇴치하는 과정이 굿으로 전승되는 사례다. ‘용놀이’는 신들을 모시는 제장에 청룡·황룡의 두 구렁이가 들어서 있는 모습을 설정한다. 시각적 효과를 위해 양쪽 당클(높이 매어 놓은 선반)에 긴 광목천을 바닥까지 늘어지게 드리워 놓은 것이다. 당클이 하늘이고 바닥이 땅이라고 할 때, 구렁이의 머리는 하늘에 꼬리는 땅에 드리워진 것이며, 이는 신성한 제장이 부정을 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심방이 이 두 구렁이에게 술을 먹여 잠들게 하고, 잠이 든 뱀 ‘천구아구 대맹이’를 신칼로 죽이고, 뱀의 골을 후벼 파서 약으로 파는 뱀장사 놀이를 한 뒤, 제장에서 뱀을 퇴치하여 치워 버리는 순서로 진행된다.
의의[편집]
서련 판관이 김녕사굴의 큰 뱀을 죽였다는 <김녕사굴전설>은 제주도 큰굿의 소제차인 '제오상계'에 큰 구렁이를 잡는 놀이굿 '용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관람안내[편집]
※ 학술적 연구 목적 일 때만 출입가능
- (사전방문신청필수 / 일반관광불가)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만장굴길 34
- 문의 및 안내 : 1600-0064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김녕사굴〉, 《나무위키》
- 〈김녕사굴〉, 《비짓제주》
- 〈김녕사굴〉,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김녕사굴에 사는 큰 뱀을 퇴치한 판관〉, 《지역N문화》
- 〈김녕사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뱀의 형상을 닮은 천연기념물〉, 《대한민국 구석구석》
- 〈김녕사굴〉, 《네이버 플레이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