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
수레(Cart)는 바퀴를 달아서 굴러가게 만든 기구로, 사람이나 화물을 싣는 용도로 사용된다.
특징
수레는 축에 설치한 둥근 바퀴와 축의 회전운동으로 사람이나 물건을 쉽게 운반해주는 교통수단이다. 수레의 등장으로 물자의 이동이 촉진되었고, 사람들의 이동 시간을 줄여줌에 따라 도시의 발달에도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수레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인류는 수레를 보다 잘 이용하기 위해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았다. 수레의 등장은 마침내 지구 표면의 모습까지도 변화시켰다. 과거의 수레는 짐을 실을 수 있도록 네모지게 틀을 짜고 틀의 밑에 굴대를 박았다. 수레의 틀은 나비가 1m, 길이가 1∼1.5m 가량 되고, 굴대에는 지름이 1∼1.2m 되는 두 개의 바퀴를 달았다. 또한 사람이 밀거나 허리에 걸어 끌기 쉽게 길게 채를 이어 대고 채의 끝에는 가로장을 댔고, 허리춤에 걸어 끄는 수레는 대차나 평차와 비슷한 모양이다. 수레바퀴는 굴대를 끼우는 장구통과 땅에 닿는 빗등 사이를 바퀴 살을 박아 고정했다. 빗등은 여러 개의 나무토막을 원이 되게 깎아 잇고 그 둘레에 텟쇠를 끼운다. 수레에 쓰는 바퀴는 적은 힘으로도 잘 구르게 하기 위해 달구지 바퀴보다 가늘고 지름이 큰 것을 썼다. 수레를 옛날에는 수레, 술위이라 불렀으며, 한문으로는 車라 썼다. 수레를 사람이 끈다고 해서 손수레라고도 한다. 그리고 소나 말에 쓰는 수레는 달구지라고 부른다. 한사람이 수레로 200kg 정도의 짐을 나를 수 있고 쇠바퀴에 고무타이어를 끼운 작고 가벼운 리어카와 일륜차가 보급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1]
역사
수레는 기원전 3,500년 전 무렵 메소포타미아, 동유럽,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만들어졌다. 최초의 수레바퀴는 바퀴살이 없이 통나무를 원판으로 만들거나, 2〜3개의 나무판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따라서 매우 무거워 사용이 불편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 무렵 나무 테두리에 바퀴살을 박아 바퀴의 가운데 부분을 비우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바퀴는 크게 가벼워졌다. 이렇듯 가벼워진 바퀴를 단 수레는 말, 당나귀 등을 동력원으로 삼아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됨에 따라 활동도가 크게 높아졌다. 인간이 말에 재갈을 물려 사용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이지만, 초기에는 말을 직접 탈 수가 없었다. 인간은 말에게 수레를 매게 하면서, 말의 동력과 속도를 이용했다. 빨리 달리는 수레는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고 달리는 말이 끄는 전차는 고대 제국의 흥망을 좌우한 강력한 전쟁무기가 되었다. 수레는 인도, 아시아의 초원지대, 이집트, 중국 등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중북부 지역으로 널리 퍼져지면 세계사를 바꾸어왔다. 수레가 널리 사용된 대표적인 나라로는 로마, 중국 등이 있다. 로마는 대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도로를 뚫었고, 그 위에 전차병들이 다녔다. 로마는 대전차 경기장을 만들어 시민들의 오락을 위한 전차 경기를 즐겨 열기도 했다. 반면 중세 유럽은 대제국이 아닌 소규모의 영주들이 다스리던 봉건사회에서 이웃과의 대규모 유통이 없었기 때문에 전차가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왕권이 강화된 국가가 등장하는 근대 이후 유럽에서는 수레가 크게 개선되어 자동차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반면 잉카, 마야 등 신대륙에서는 수레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잉카는 엄청난 길이의 도로를 만들었지만, 그 도로는 군대의 이동, 연락병인 차스키 및 왕의 이동 통로로만 사용되었다. 안데스 산맥 지역에 위치한 탓에 높낮이의 굴곡이 심한 도로에 수레가 다니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마야의 경우는 대형 건축물을 만들 능력이 있었지만, 이웃 도시로 연결되는 도로를 전혀 만들지 않았다. 수레를 끌 소와 말과 같은 대형가축이 없었던 탓도 있고, 작은 도시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오래 지속한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수레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58년 중국요령성 영성현남산근 지역에서 한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9〜7세기경의 유적인 남산근 101호 무덤에서 다량의 마구와 함께 전차 2대가 새겨진 뼛조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을 남긴 이들은 고조선 또는 고조선과 가까운 동호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비파형 청동단검은 고조선의 청동단검과 같은 것과 확실한 고조선의 영역인 평안북도 염주군 주의리에서도 기원전 8〜7세기경에 사용된 수레바퀴 조각이 발견된 바 있다. 고조선 말기에 해당하는 여러 유적지에서도 수레 부속품들이 출토된 바 있다. 고조선은 수레 사용이 비교적 활발한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북부만이 아니라, 기원전 1세기경 마한시대 유적인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도 옻칠을 한 수레바퀴 유물이 발견되었다. 전체를 복원하면 바퀴살이 22개, 지름 120~160㎝의 바퀴가 달린 마차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바퀴살이 많이 달린 수레바퀴는 가볍고 이동하기 편한 반면, 기술적으로 만들기에 꽤나 어려운 것이다. 이런 수레가 다니려면 당시에 일정한 도로도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수레바퀴
바퀴는 축에 돌아갈 수 있는 장치를 한 둥근 물체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이다. 바퀴의 역학 원리는 미끄럼마찰을 굴림마찰로 바꿔 어떤 물체가 이동할 때 저항을 적게 하는 데 있다. 바퀴의 기본 원리인 회전운동의 원리는 바퀴에 앞서 발명되어 토기제작에 사용한 물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인류는 사람 힘에 의지하여 무거운 물체를 옮겼는데, 차츰 인지가 발달하면서 바퀴의 원리를 터득한 것이다. 이후 바퀴는 더욱 발달하여 속력과 기동성을 요구하게 되면서 바퀴살이 있는 바퀴가 고안되었다. 여기에다 동력의 수단이 인력에서 말과 소와 같은 축력으로 바뀌면서 인간은 힘을 덜 들이면서 원활할 물자수송을 가능하게 하였다. 바퀴를 이용한 수레의 기능은 첫째 사람이 타는 수레, 짐을 나르는 운송및 운반용 수레, 무기로 응용 활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레를 사용한 시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바퀴의 사용은 고고학 자료를 통해 볼 때 청동기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기원전 7-8세기의 주의리 니탄층에서 수레바퀴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레바퀴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다양한 형태의 수레와 함께 수레 만드는 제륜신과 야철신이 등장하고 있고, 신라와 가야시대의 옛무덤에서도 수레 모양의 토기가 출토 되는데, 그 구조가 매우 정교한 것으로 미루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에는 로켓 발사대인 화차가 발명 사용 되었는데, 이 수레를 응용한 화차는 평상시에는 물건을 운반하는 생활도구로 사용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신기전을 발사하는 로켓발사대로 기능이 바뀌었다. 정조 20년 완성되어 정조 24년에 간행한 화성축성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기록에 대차, 평차, 발차, 등이 보이는 점에 비추어 실용 과학기술로 수레가 건축공법에 빈번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레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은 수레바퀴를 만드는 일이다. 수레바퀴를 처음에는 통나무인 채로 쓰다가 수레축과 바퀴살을 발명하여 통나무 지름의 한계를 극복하고 바퀴의 지름을 넓히는 기술상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바퀴살의 등장은 바퀴를 조립하는 기술발달의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퀴에 쇠테를 씌워서 수레바퀴가 쉽게 부서지지 않고 지면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먼 거리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차축의 이용으로 수레틀의 바닥폭이 넓어져 많은 양의 물건들을 실어 나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수레의 발달은 인류 문명의 발달 가운데 교통과 수송 과학기술의 결정체를 이루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도로망의 확충을 가져와 교통, 통신, 수송의 핵심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자동차, 기차, 자기부상열차가 등장한 첨단사회에 있어서도 이 요소들의 역할은 가장 중요한 국가 기간산업의 바탕으로 변함이 없으며, 그 원리 또한 고스란히 요즈음의 첨단바퀴에 응용되고 있다.[3]
각주
참고자료
- 〈수레〉, 《네이버 지식백과》
- 〈수레〉, 《네이버 지식백과》
- 윤용현 연구관, 〈한국 고유의 사이언스 - 수레바퀴〉, 《충청일보》, 2007-08-15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