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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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람섬(인도네시아어: Pulau Seram)은 인도네시아 말루쿠제도에서 할마헤라섬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섬이다. 반다해 북부에 위치하며 면적은 약 17,100km²이다. 역사적 중심지였던 암본섬을 제외하면 말루쿠 주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옛 표기법은 세람섬(Ceram)이다.[1]
개요
스람섬은 반다해 북부에 위치하며, 지형은 산지가 많다. 남부는 비교적 평야가 많고 열대림에 뒤덮여 있으며 다마르(수지)가 특산물이다. 스람섬은 산맥 중간을 가로지르며 가장 높은 산인 비나이야산은 빽빽한 열대우림으로 가득하다. 세람섬의 복잡한 지질은 그 구조상으로 여러 미세판 (microplate)들이 만나는 지점에 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지질구조상으로는 지구에서 가장 복잡한 곳 중 하나"로 불려왔다. 세람섬은 실제로는 자체 미세판이 있으며, 이 미세판은 파푸아 미세판의 비교적 빠른 움직임 때문에 지난 800만년간 지면 각으로 80° 정도까지 뒤틀렸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판이 북쪽 방향으로 밀고 올라오기까지 하면서, 융기가 일어나 세람섬의 최고 고도는 3000m 이상으로까지 늘어났다. 섬에 있는 카르스트 지형 역시 증요하다. 사와이 부근의 산지에는 하투사카 동굴이 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깊은 동굴 (지하 388m)이다.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타니웰 구에는 지하에 사팔레와 강이 흐르는데 지구 최대의 지하 강 중 하나였다. 2010년 인구 총조사 결과 스람섬의 인구는 434,113명으로 3개의 행정 당국으로 나뉜다. 세람섬 내의 말루쿠텐가 당국은 인구가 170,392명이며, 나머지 섬은 스람바기안바랏 당국과 스람바기안티무르 당국으로 나뉘며 인구는 191,306명이다. 북동부의 불라에는 유전이 있고, 그 밖에 니켈, 보크사이트, 철광 등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하다.[2]
역사
네덜란드가 섬을 발견했고 1899년에 지진이 났다. 1950년대에는 남 말루쿠 공화국이라는 미승인국이 스람섬에서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항해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63년에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소탕되어 남 말루쿠 공화국은 사실상 멸망했다.[3]
1899년 스람섬 지진
1899년 9월 30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스람섬에 규모 7.8의 지진과 10m의 지진 해일이 닥쳤다. 바타비아 자기장 기상관측소에 의하면 지진은 아마헤이 현지시각으로 새벽 1시 42분 2초에 발생했다. R. D. M. 베르베크 박사는 이 지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저술 <1899년 9월 3일 세람섬의 지진과 해진에 관한 소논문>을 출판했다. 세람섬 지진은 구조진으로 분류된다. 진동은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갔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쪽은 동서 방향으로, 짐작건대 지각에 오래된 금이나 찢겨져 나오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899년 스람섬 지진은 1898넌 암본섬 지진과는 상관이 없었다. 후자의 지진이 수많은 동심 단층을 따라 발생했다고 하면 스람섬 지진은 방사형 단층을 따라 발생했다. 지진은 특히 엘파푸티 만에서 진동이 강했다. 그 이유는 수치상에서도 보이듯이 지진의 진앙지가 만 서쪽 산맥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를 통해 산맥의 바위를 시각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데 이들 바위가 지진으로 인해 금이 갔거나 깨져 있었다. 지진 자체는 큰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러 해안 절벽이 지진으로 무너져 바다로 떨어지고 지진 해일과 그로 인해 발생한 홍수가 해안가와 그 부근의 마을을 덮쳤다. 파괴적인 지진 해일로 3,864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여러 마을을 완전히 휩쓸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모두 스람 단층대에 위치해 있으며, 하투수아 (피루 만 지역), 파우로히사마수루와 마카리키 (엘파투티 만 지역), 테호루, 월루, 라이무 (탈루티 만 지역)이 피해를 보았다. 동쪽 지역에만 한차례 해일을 겪었는데 하투수아 마을을 완전히 파괴했다. 2.4m의 파고로 내륙으로 203m 지점까지 쓸고 들어와 마을을 휩쓸었다. 피루 만처럼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쪽은 만 동쪽 지역 (파울로히사마수루와 마니는 피해를 입은 유일한 서쪽 지역 마을)이었다. 여기서는 해안 절벽이 붕괴하여 9m의 파도가 덮쳤으며 170m 지점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 지역에서민 2,400명이 지진 해일로 사망했다.[4]
반다해
반다해(영어:Banda Sea, 인도네시아어: Laut Banda)는 인도네시아 동부의 술라웨시섬, 티모르섬, 스람섬과 뉴기니섬에 둘러싸인 바다이다. 수심이 깊어 해역 동부에서는 7,000m를 넘는 곳이 있다. 반다해는 인도네시아 말루쿠 제도를 둘러싼 4개의 바다 중 하나로 태평양과 연결되어 있지만 할마헤라해와 세람해뿐 만 아니라 티모르섬을 포함한 수백 개의 섬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약 1000km,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500km이다. 북쪽은 세람해, 북서쪽은 말루쿠해, 남동쪽은 아라푸라해, 남쪽은 티모르해, 남서쪽은 플로레스 해와 접해있다. 바다의 경계는 항해에 위험하지만 작은 바위 섬이 많고 바다 한가운데는 비교적 개방되어 있다. 바다 내의 섬 그룹에는 반다 제도가 포함된다. 반다해의 여러 섬에서 반다 제도의 구눙 아피와 마누크는 활화산이다. 반다해 지역에서는 유라시아판, 태평양판, 인도-호주판 등 3개의 지각판이 합류하기 때문에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 반다해는 세계야생생물기금이 정의한 해양 생태지역이다. 이곳은 넓은 인도양과 태평양에서 가장 다양한 산호초 종을 가진 산호 삼각지(Coral Triangle) 지역의 일부이다. 해류는 계절풍에 따라 여름에는 서쪽으로 향하고, 겨울에는 동쪽으로 향한다. 가다랭이, 참치 등의 어장으로 알려져 있다.[5]
말루쿠 제도
말루쿠 제도(인도네시아어: Kepulauan Maluku)는 인도네시아의 군도로 말레이 제도의 일부이다. 술라웨시섬의 동쪽, 파푸아섬의 서쪽, 티모르섬의 북쪽에 자리한다. 말루쿠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은 할마헤라섬이다. 1950년부터 1999년까지는 제도 전체가 하나의 주였으나, 말루쿠주와 말루쿠우타라주로 나뉘었다. 1511년 8월, 포르투갈이 현 말레이시아의 항구도시 말라카(Malacca)를 정복하였다. 인도와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말라카 해협에 위치한 말라카는 선박 항해에 있어서 교통의 요충지중에 하나였다. 포르투갈인들의 출현이 끼친 중대한 영향은 동남아 교역의 파괴와 재구성이었다. 또한 말루쿠 제도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동부에서는 가톨릭교의 유입이었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는 반다 제도(Banda Islands)와 향료 제도(Spice Islands)로 가는 항로를 알게 되었고,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António de Abreu), 시망 아폰수 비시구두(Simão Afonso Bisigudo), 프란시스쿠 세랑(Francisco Serrão)의 지휘 하에 선박 3척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파견하였다.[5] 1512년, 귀항 길에 세랑은 암본 섬(Ambon island) 북단을 지칭하는 히투 섬(Hitu island)에 좌초되었다. 그곳에서 세랑은 자신들의 전투기술에 반한 지역 통치자와 관계를 형성하였다. 상호 경쟁 중이던 테르나테 술탄국(Sultanate of Ternate)과 티도레 술탄국(Sultanate of Tidore) 통치자들도 포르투갈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인들이 말라카를 침공함으로 인해서 자바인(Javanese)들과 말레이인(Malay)들이 이 일대로 항해해 와서 교역하는 지역 무역(regional trade)이 일시적으로 단절됨에 따라 발생한 단기적 소강상태에서, 포르투갈인들은 이들이 생산하는 보급품과 향료를 구입해 주는 고객으로서 환영받았다. 향료무역은 곧 부활했지만 포르투갈인들은 향료무역을 완전히 독점하거나 단절시키지 못하였다. 테르나테의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세랑은 테르나테섬에 요새 1기를 설치하였고, 포르투갈 뱃사람들로 구성된 용병 부대의 수장이 되었다. 이 용병부대는 향료 무역(spice trade)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서로 앙숙이었던 테르나테와 티도레의 지방 술탄(local sultan)들 중 테르나테를 위하여 복무하였다. 그러나 세랑과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서로 만나기 전에 사망하였다. 1513년, 포르투갈인들은 처음으로 암본(Ambon)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이 테르나테로부터 쫓겨난 후, 암본은 포르투갈인들의 말루쿠에서의 활동에 있어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지역 내 유럽인들의 힘은 약하였고, 테르나테는 확장 중에 있던 강경한 이슬람 성향에 반 유럽 성향을 갖춘 국가였다. 포르투갈-테르나테 전쟁(Portuguese-Ternate wars)은 술탄 밥 울라(Sultan Baab Ullah, 재위 1570~1583)과 그의 아들 술탄 사이디 베르캇(Sultan Saidi Berkat, 재위 1583~1606)의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하였다.[6]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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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스람섬〉, 《위키백과》
- 〈1899년 스람섬 지진〉, 《위키백과》
- 〈반다해〉, 《위키백과》
- 〈말루쿠 제도〉, 《위키백과》
- 〈스람 섬〉, 《나무위키》
- 〈세람섬(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