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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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라(Puebla) 또는 푸에블라데사라고사(Puebla de Zaragoza)는 멕시코 푸에블라주의 주도이며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인구 약 170만 명이며 멕시코시티, 몬테레이, 과달라하라 다음으로 멕시코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푸에블라 역사지구가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1]
개요
푸에블라는 멕시코 중부에 위치한 푸에블라주의 주도이며, 시가지는 틀락스칼라 지역까지 확장되어 푸에블라-틀락스칼라 광역 도시권을 구성한다. '천사의 도시'라고도 하며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 멕시코시티 동쪽 136km 지점에 있으며 1531년에 건설되었다. 수도 멕시코시티와 이웃해 있으며, 멕시코시티로부터 베라크루스 항까지의 주요 도로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하여 식민 시기 주요 상업 도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해발고도 2,149m의 고산도시이고 연평균기온 17℃의 비옥한 농업지대이며 타일, 도자기, 면, 모직물 공업 등이 발전하였다. 1964년 대규모의 폭스바겐 자동차 조립 공장이 문을 열었고, 이후 자동차 부품 업체들이 입지하여 멕시코 중앙 지대의 자동차 산업 클러스터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에스파냐의 전형적인 식민도시로서 대성당을 비롯하여 16세기의 훌륭한 건축물이 많다. 대성당은 중앙광장 소칼로에 있으며 1649년에 르네상스양식으로 건설되었다. 3랑식성당으로서 내부 높이 25m, 길이 90m, 너비 47m에 이르는 규모이다. 높이 70m의 종탑 2기가 세워져 있고, 돔은 화려한 장식 타일로 덮여 있다. 1611년에 세운 산토도밍고성당은 도미니크수도회 수도원으로 건설되었다. 이곳의 로사리오예배당에 있는 황금 제단 장식벽은 멕시코 바로크양식의 종교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1987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인근에 있는 촐룰라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2]
지리 및 기후
푸에블라는 쿠에틀락스코판(Cuetlaxcopan) 계곡 또는 푸에블라-틀락스칼라(Puebla-Tlaxcala)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인 멕시코시티로부터는 약 123㎞ 정도 떨어져 있으며,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스 항까지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주요 도로가 지난다.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는 멕시코 중앙부에 위치한 탁상대지인 메사센트럴(Mesa Central)의 남쪽 끝에 해당한다. 기반암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카르스트 지형이 나타나지만, 북위 19° 정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멕시코 횡화산대의 영향으로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에는 고도가 높은 화산이 솟아 있다.
멕시코에서 가장 높은 화산이자 활화산인 포포카테페틀(Popocatépetl, 5,452m)과 이스탁시우아틀(Iztaccíhuatl, 5,286m)이 계곡의 남서쪽에 있고, 휴화산인 말린체(Malinche, 4,461m)가 동쪽에 있으며, 피코데오리사바(Pico de Orizaba)와 같은 여러 높은 봉우리들이 분지를 둘러싸고 있다. 포포카테페틀과 이스탁시우아틀에서는 만년설이 나타난다. 높은 봉우리들로 둘러싸였지만 분지의 남쪽은 지형이 낮고 봉우리들 사이에 골이 잘 발달하여 분지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높은 화산과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분지로 모여들면서 아토약(Atoyac) 강과 알세세카(Alseseca) 강,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 강 등을 이룬다. 이 강들은 분지에서 발세키요(Vallsequillo) 호수를 비롯한 여러 호수를 이룬다. 호수와 습지가 많고,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과 화산재들이 지표면에 쌓여 토지가 비옥하다.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는 위도상으로는 아열대 기후대에 속하지만, 해발 고도 2,15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고산 기후가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은 17.2℃이다. 기온이 가장 낮은 1월과 2월의 평균 기온은 각각 13.9℃, 14.5℃ 안팎이고, 기온이 가장 높은 4~6월은 18~20℃이다. 연 강수량은 960㎜로, 우기인 6~9월의 강수량은 월 150~200㎜ 정도이나 이 밖의 기간에는 10㎜ 안팎의 비가 내리며, 봄이 가장 건조하다.[3]
역사
푸에블라와 틀락스칼라(Tlaxcala)는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에 입지하여 연담(聯擔) 시가지를 이룬다. 1519년에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는 베라크루스(Veracruz)로부터 틀락스칼라를 거쳐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였는데, 저지대의 온난한 기후대를 지나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에 이르러 처음으로 눈을 보았다고 한다. 푸에블라는 식민 시기 이전까지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았던 데 비해, 틀락스칼라에는 나우아틀(Nahuatl) 어와 오토미(Otomi) 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살았으며,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의 인구는 코르테스가 지날 당시 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틀락스칼라의 도시와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였으며,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아스테카(Aztec) 왕국에 조공을 바치던 틀락스칼라는 처음에는 에스파냐 인들에게 저항하였으나 이내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적인 지위와 기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고, 이는 1545년 에스파냐 왕령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틀락스칼라 인들은 에스파냐 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북쪽 지역을 탐험할 때 동행하여 변경의 요새에 배치되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텍사스와 플로리다 지역까지 이르렀다.
원래 이름인 푸에블라데로스앙헬레스(Puebla de los Angeles)는 1531년에 세워졌으며, 이는 에스파냐 정복의 역사에 매우 주요한 순간이었다. 에스파냐 인들의 식민지 정복 초기는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지역에 대한 조사, 1524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도래, 코르테스와 반(反)코르테스파 간의 긴장 등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새로이 도착한 에스파냐 인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원주민에 비해 소수였던 에스파냐 인들은 원주민의 반란이나 식민지의 정치적 불안정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를 적절히 방어하고 대처할 수 있는 중심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푸에블라는 누에바에스파냐 지역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전략적 근거지로 세워졌다. 당시 푸에블라는 멕시코 중부 교통로의 요지였으며, 특히 동서 교통로의 주요 지점이었다. 1530년 당시 틀락스칼라의 주교인 훌리안 가르세스(Julián Garcés)가 에스파냐 국왕에게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스 항 사이에 에스파냐 인의 도시를 건설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하였고, 국왕은 푸에블라에 천사의 도시라는 뜻의 시우다드데로스앙헬레스(Ciudad de los Angeles)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는 쿠에틀락스코판(Cuetlaxcopan) 계곡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나우아틀 어로 ‘뱀이 허물을 벗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푸에블라는 1538년에 에스파냐 왕으로부터 문장을 하사받았고, 1558년 기품 있고 충성스러운 도시(Noble y Leal)라는 칭호를 받는 등 이후에도 각종 칭호를 얻었다.
푸에블라는 1530년대 초에 전형적인 에스파냐의 도시 건설 양식으로 세워졌다. 도시 중심에 광장(Zocalo)을 두고 주변으로 교회, 공공 기관, 지배층의 거주지가 건설되었다. 가로망은 광장을 기준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되었다. 쾌적한 기후와 전략적 위치 때문에 푸에블라는 건설 직후 번영을 이루며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서 멕시코시티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로 부상하였다. 에스파냐 식민 시기에 도시는 배후의 농촌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18세기 말 푸에블라의 관할 구역은 현재의 베라크루스 주에서 게레로(Guerrero) 주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다. 멕시코 독립 전쟁 당시 푸에블라는 혁명 정신에 관한 인쇄물의 발간과 배포의 역할을 맡았다.
푸에블라는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지로, 19세기에 멕시코가 외국과의 전쟁을 겪을 때에는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외국 부대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미국과 멕시코 전쟁(1846~1848년) 기간 중 1847년에는 멕시코시티로 향하던 미국 군대에 약 한 달간 점령당하였다.
1862년 5월 5일 멕시코군은 베라크루스를 통해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프랑스군과 푸에블라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그나시오 사라고사(Ignacio Zaragoza) 장군이 이끌던 멕시코군은 당시 세계 최강인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당시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 대통령은 푸에블라의 이름을 푸에블라데사라고사(Puebla de Zaragoza)로 바꾸었다. 또한 그날의 승리를 기리며 5월 5일을 휴일로 지정하여 오늘날까지 기념하고 있는데, 푸에블라에서 가장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1863년 프랑스군은 푸에블라를 재차 공격하여, 1866년에 프랑스군이 멕시코에서 철수할 때까지 점령하였다.[4]
경제
푸에블라-틀락스칼라 지역은 호수와 습지가 많고,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과 화산재가 지표면에 쌓여 토지가 비옥하다. 또한 아토약 강(Río Atoyac)을 비롯한 여러 강들이 흘러들어 호수를 이루었기 때문에 식민 시기 이전부터 관개 시설을 갖춘 농업이 발달하였다. 높은 봉우리들 사이에 위치한 저지의 계곡들로 여러 방향의 길이 교차하던 교통의 요충지로서 서쪽으로는 멕시코시티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할라파(Jalapa), 오리사바(Orizaba) 등의 도시와 연결되며, 베라크루스를 통해 멕시코만과 대서양으로 연결된다. 식민 시기에도 멕시코시티와 에스파냐를 잇는 가장 주요한 항구였던 베라크루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상업적 중개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푸에블라-틀락스칼라 지역은 전통적으로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였지만, 도시 경제 활동의 약 80% 는 제조업이 차지한다. 푸에블라는 식민 시기부터 섬유 산업이 발달하였는데, 도시 주변에서 생산되는 양모를 바탕으로 오브라헤(obraje)라는 모직물 생산 작업장이 발달하였다. 오브라헤는 멕시코시티와 리마(Lima) 등 큰 소비 시장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 특징으로, 오브라헤가 집중되었던 우아만틀라(Huamantla)는 오늘날까지도 주요한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식민 시기부터 면직물 생산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섬유 산업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푸에블라-틀락스칼라의 제조업은 외곽에 위치한 신코데마요 공업단지(5 de mayo Parque Industrial), 레수렉시온 공업지구(la Zona Industrial Resurrección), 푸에블라 2000 공업단지(Puebla 2000 Parque Industrial) 등에 많은 업체들이 들어서 있다. 주요 생산품은 기초 금속 제품, 화학, 전자 부품 및 섬유 제품 등이다.
푸에블라-틀락스칼라 지역은 멕시코시티에서 푸에블라, 모렐로스(Morelos), 이달고(Hidalgo)로 이어지는 자동차 산업 클러스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멕시코의 대표적인 자동차 생산 업체인 폭스바겐(Volkswagen) 푸에블라 공장은 1964년 푸에블라의 쿠아우틀란싱고(Cuautlancingo)에 문을 열었으며, 현재 이 지역의 고용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업체이다. 폴크스바겐 푸에블라 공장이 건설되자, 이 지역에 자동차 부품 산업체들이 입지하였다.
푸에블라 역사 지구
푸에블라는 멕시코시티(Mexico City) 동쪽 100㎞ 지점의 포포카테페틀(Popocatepetl) 화산에 있는 도시로, 1531년에 건설되었다. 이곳에는 16세기~17세기에 지은 성당과 대주교의 궁전 등 정교한 종교 건축물과 아술레호스(azulejos) 타일 벽으로 장식된 저택들이 있다. 유럽 양식과 아메리카 양식이 융합되어 새로운 미학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푸에블라 역사 지구만의 독특한 바로크 양식으로 발전했다.
푸에블라 역사 지구는 산토도밍고 성당(Cathedral Santo Domingo)이나 예수회 교회(Jesuit Church) 같은 종교 건축물과 고풍스러운 왕궁, 채색 타일의 벽으로 지은 아름다운 최고급 저택 같은 화려한 건축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19세기 개혁안(1857)으로 인해 도시 경관을 바꾸기 위해 많은 수도원들을 폐쇄시켰는데, 이 종교 건축물로 인해 푸에블라는 고품격의 공공건물과 일반 건축물이 혼재하는 독특한 도시의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푸에블라와 촐룰라(Cholula)는 멕시코에서 가장 높은 화산인 포포카테페틀 산 밑의 멕시코시티에서 동쪽으로 100㎞ 지점에 있다. 두 도시는 더 남쪽에 있는 몬테 알반(Monte Albán)과 오악사카(Oaxaca)와 마찬가지로, 뉴 스페인(New Spain) 사람들이 오기 전의 도시와 새로 지은 도시가 조합된 형태를 지니고 있다. 12㎞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도시는 뉴 스페인과 멕시코 역사상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다.
1519년 여름, 정복자 코르테스(Cortés)가 촐룰라에 당도했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정복 역사상 가장 잔인한 대학살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3,000명~6,0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862년 5월 3일에 사라고사(Zaragoza)의 총독이 최초로 프랑스 원정대를 격파한 곳이 푸에블라였으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기리기 위해서 이후 도시의 이름을 푸에블라 데 사라고사(Puebla de Zaragoza)로 바꾸었다.
상당히 주목받는 문화유산인 촐룰라와 푸에블라를 두고, 단지 고고 현장이나 역사 중심지라고 정의하여 그 가치를 축소하기는 어렵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1519년의 대학살로 불타 버린 신전들이 있던 촐룰라의 폐허 위에 스페인 도시를 건설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성당을 하나씩 지어 총 365개의 성당을 세웠는데, 1년 동안 하루에 성당 한 채씩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프란시스코 수도회가 1549년에 건축하기 시작한 산 가브리엘 성당(San Gabriél)은 실제로 케찰코아틀(Quetzalcoatl) 신전이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18세기에 거대한 아크로폴리스 피라미드의 바로 꼭대기에 세워진 레메디오스 성모마리아 교회(Nuestra Señora de los Remedios)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오기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깨어지지 않은 역사적인 지속성을 확연히 보여 준다. 1531년 푸에블라에서 무(無)에서 기초한 ‘안젤로스의 도시(Ciudad de los Angelos)’ 도시 계획은 쿠에틀락스코아판(Cuetlaxcoapan) 계곡으로까지 크게 확대되어 있다.[5]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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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푸에블라〉, 《위키백과》
- ↑ 〈푸에블라(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푸에블라의 위치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 ↑ 〈푸에블라 (시)〉, 《요다위키》
- ↑ 〈푸에블라 역사 지구〉,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
- 〈푸에블라〉, 《위키백과》
- 〈푸에블라 (시)〉, 《요다위키》
- 〈푸에블라(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푸에블라의 위치와 자연환경〉, 《네이버 지식백과》
- 〈푸에블라 역사 지구〉,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북아메리카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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