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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멜니츠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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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5일 (일) 17:28 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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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치
흐멜니츠키주 위치

흐멜니츠키주(우크라이나어: Хмельницька область)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주이다.[1][2]

개요[편집]

흐멜니츠키주의 면적은 20,645㎢이며 인구는 1,243,787명(2021년)이다. 주도는 흐멜니츠키이다. 서쪽으로는 테르노필주, 북쪽으로는 리우네주, 동쪽으로는 지토미르주빈니차주, 남쪽으로는 체르니우치주와 접한다. 2020년 7월 18일 우크라이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3개의 구(район)로 재편되었다.

주요도시[편집]

흐멜니츠키[편집]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 중서부에 있는 흐멜니츠키주의 주도이다. 동유럽 평원의 일부인 포딜리아 고지대의 남부흐강 강둑에 자리하고 있다. 1954년까지 프로스쿠리브(Proskuriv)라고 불렸다. 17세기 카자크의 수장이었던 흐멜니츠키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도시명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빈니챠주와 흐멜니츠키주의 중부 및 남부, 그리고 오데사주 · 키이브주 및 몰다비아공화국 일부를 포함하는 옛 포딜리아 지역에서는 빈니챠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15세기 주요 교역로의 교차로에 무역 기지로 세워졌다. 흐멜니츠키 지역은 지리적 위치와 천연자원 때문에 투르크족, 타타르족, 독일,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등 주변의 여러 민족과 국가들의 위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도시의 인구 구성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1926년에 39%이던 우크라이나인이 1959년에 53%로 과반이 되었다. 같은 기간, 러시아인도 7%에서 21%로 늘었다. 반면, 유대인은 42%에서 10%로 급감했고, 폴란드인도 10%에서 7%로 줄었다.

소비에트 시대까지 흐멜니츠키의 경제는 설탕 정제, 곡물 시장, 그리고 가내 공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오늘날 흐멜니츠키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산업 중심지 중 하나다. 주요 산업은 화학공업, 석유화학공업, 기계제조업, 식품가공업 등이다.

흐멜니츠키는 독립국가연합(CIS)과 동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동서양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체코의 프라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폴란드의 바르샤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그리고 베오그라드와 우크라이나의 여러 도시로 연결되는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흐멜니츠키는 남(南)부흐(Southern Buh, 보흐[boh] 혹은 러시아식으로 남부크[Southern Bug]라고도 함)강의 강둑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의 서쪽에서 남부흐강과 합류하는 플로스카(Ploska)강은 이 도시의 옛 이름과도 관련 있다.

흐멜니츠키의 기후는 대륙성이다. 여름인 7월의 평균 기온은 20~22℃, 가장 추운 1월의 평균 기온은 -5~-6℃이다. 여름 최고 기온은 평균 36~38℃에 이르며, 겨울의 최저 기온은 평균 –24~-30℃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10~580mm다.

흐멜니츠키의 토양은 황색의 풍적토와 풍적토 유형의 암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토양과 기후는 겨울 밀과 호밀, 사탕무, 감자 등의 재배에 유리하다.

흐멜니츠키와 그 인근 지역은 암반과 관련된 천연자원도 풍부하다. 특히 건설용 자재로 쓰이는 석회암과 석고, 백악(白堊), 규조토(硅藻土), 사암(砂巖), 흑연, 사포나이트, 카올린, 인광석, 석판석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 또한 토탄(土炭), 역청(瀝靑), 셰일 등의 매장량도 풍부하다.[3]

카미아네츠포딜스키[편집]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우크라이나 서부 흐멜니츠키주(州)에 속한 도시이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군(郡)의 행정 중심지이다. 드니스테르강의 지류인 스모트리치강이 도심을 가로지른다.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경계에 위치한 이 요새 도시는 몽골-타타르의 침략으로부터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도시명은 돌을 의미하는 고대 슬라브어와, 이 도시가 위치한 포딜리아 지방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드니스테르강의 지류인 스모트리치강 연안에 자리하고 있다. 한동안 흐멜니츠키주의 주도(州都)였다. 지금은 카미아네츠포딜스키군(郡)의 행정 중심지로, 시정은 자체적인 시의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기(1919~1920)에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임시 수도이기도 했다. 도시명은 ‘돌’을 의미하는 고대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카미아네츠와, 이 도시가 위치한 지방의 역사적인 지명에서 유래한 포딜스키가 결합된 것이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 지역에 처음 마을을 세운 이들은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고대 민족인 다치아인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이 정착지를 페트리다바 또는 클레피다바라고 불렀다. 이는 ‘돌’을 뜻하는 그리스어(petra)나 라틴어(lapis)에 ‘도시’를 뜻하는 다치아어(dava)를 결합한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11세기부터는 카미아네츠로 불렸다. 나중에 지명에서 유래한 포딜스키라는 이름이 더 붙게 된 것은 바위가 많다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비슷한 이름을 가진 도시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1062년의 기록에 키이브 루스의 한 마을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 마을은 1241년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136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땅이 된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1374년 마그데부르크 도시법에 따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1378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교구가 되었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1430년 폴란드 군대에 의해 점령됐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서부와 남서부, 몰도바 북동부 일대를 포함하는 포딜리아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봉건영주들이 벌인 전쟁은 1434년 폴란드 측의 승리로 끝났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1463년 폴란드 포돌리아주의 중심지이자 왕립도시가 되었다. 이후 바위 지형을 이용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보루와 포대 등이 만들어지며 강력한 요새 도시로 변모했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의 요새는 오랜 기간 몽골-타타르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해주는 방패 역할을 했다. 어떤 군대도 전투만으로는 카미아네츠포딜스키의 요새를 점령할 수 없었다. 이 도시를 점령한 통치자들은 속임수를 동반한 협상과 군사적 공격을 병행해서 도시를 차지할 수 있었다.

1672년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잠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게 됐지만, 1699년 다시 폴란드에 반환됐다. 1793년 폴란드 제2차 분할 이후 도시는 러시아제국의 땅이 됐다.

1897년 러시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당시 포딜리아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 무렵 도시는 프로스쿠리브(현재의 흐멜니츠키)시(市)와 직통 철도노선으로 연결됐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5년,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점령되었다. 1917년 러시아제국의 붕괴 후 도시는 우크라이나 독립 세력들과 폴란드에 의해 잠깐씩 장악됐지만, 결국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의 주민은 역사적으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주류를 이뤄 왔다. 또한, 상업 중심지로서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도 중요한 소수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지배하에서 이들은 심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많은 폴란드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됐다. 스탈린 시대에는 빈니챠 학살과 같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학살이 포딜리아 전역에서 일어났다.

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 후 카미아네츠포딜스키주(지금의 흐멜니츠키주)의 행정 중심지는 카미아네츠포딜스키에서 프로스쿠리브로 옮겨졌다.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1941년 7월 11일 독일군에 점령되었다가 1944년 3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탈환됐다.

1991년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무렵,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소련 통치하에서 해체됐던 로마가톨릭 카미아네츠포딜스키 교구를 이곳에 다시 세웠다. 현재 카미아네츠포딜스키는 포딜리아 지방에서 빈니챠, 흐멜니츠키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4]

두나이브치[편집]

두나이브치는 우크라이나의 흐멜니츠키주에 있는 도시이다. 철도역 두나이브치에서 22km, 흐멜니츠키에서 68km 떨어져 테르나브카강에 있다. 역사상 문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때는 1403년이었다. 두나이브치는 그해를 도시 건립 연도로 여긴다. 1577년 폴란드 왕으로부터 도시 지위와 마그데부르크의 권리를 받았다. 도시의 산업은 1870년대에 최고 발전 시기를 맞았는데 54개의 공장이 있었다.

이 도시는 철도역 두나이브치에서 22km, 흐멜니츠키에서 68km 떨어져 테르나브카강 유역에 있다. 도시의 전체 면적은 12.8km2이며, 이 중 시가지 구역은 2.1km2, 농지 등 재배 면적은 0.5km2이다. 거리, 통로, 제방의 총 길이는 93.8km에 이른다. 시내에 철근공장, 수리와 기술공장, 버터가공공장 등이 있다.

역사상 문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때는 1403년이었다. 두나이브치는 그해를 도시 건립 연도로 간주한다. 거의 2세기가 지난 뒤인 1577년, 시기스문트 3세 바사는 두나이브치에 도시 지위와 마그데부르크의 권리를 주었다.

1793년부터 1917년까지는 이곳은 러시아제국의 포돌스크 행정구역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 도시의 산업은 1870년대에 발전의 정점을 기록했다. 당시 54개의 공장이 있었고, 키예프, 바르샤바, 키시너우, 하르코프, 폴타바, 헤르손, 우치, 야르몰린치 등과 긴밀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1년 7월부터 1944년 3월 마지막 날까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점령 기간 동안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끌고 가 학살했다. 1958년에 도시로 승격되었다. 2007년 슈퍼마켓 보파크가 문을 열었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흐멜니츠키주〉, 《위키백과》
  2. 흐멜니츠키주〉, 《나무위키》
  3.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흐멜니츠키〉, 《네이버 지식백과》
  4.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카미아네츠포딜스키〉, 《네이버 지식백과》
  5. 유럽지명사전 : 우크라이나 두나이브치〉,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같이 보기[편집]

동유럽 국가
동유럽 도시
동유럽 지리
동유럽 문화
동유럽 주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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