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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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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시아 국기

세인트루시아(영어: Saint Lucia, 문화어: 세인트루시아)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소앤틸리스 제도에 있는 섬나라이다. 국어는 영어를 사용하며, 수도는 캐스트리스이다. 국민의 대다수가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이고, 흑인이 대부분이다.

개요

  • 수도: 캐스트리스
  • 면적: 617km²
  • 인구: 185,112명 (2022)
  • 공용어: 영어
  • 정치체제: 군주제(영연방), 입헌제, 의원내각제
  • 군주: 찰스 3세
  • 총독: 네빌 세낙
  • 총리: 필립 J. 피에르 (Philip J. Pierre)
  • 공식 홈페이지: https://www.govt.lc/

역사

기원전 1000년과 500년 사이에, 최초의 거주자들이 세인트루시아에 상륙했다고 보이나, 관련 유물이 적다고 한다. 이후 남아메리카 북부에서 온 사람들이 기원후 200년에서 400년 사이에 세인트루시아에 상륙했으며, 카리브족은 기원후 800년경 상륙한 것으로 보인다.

150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발견하였으며 ‘세인트루시아’라고 명명되었다.  1550년대에 들어서는 프랑스의 해적이 세인트루시아를 찾아와 캠프를 건설했다. 160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인트루시아의 동남부, 지금의 Vieux Fort 지역에 네덜란드인들이 캠프를 건설했고, 1605년에는 영국인 67명이 세인트루시아에 정착을 시도했으나 카리브인의 습격과 질병으로 인해 5주만에 19명만 생존하였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세인트루시아에서 도망쳤다. 1635년 들어 프랑스의 영유권 주장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639년 에는 영국이 다시 정착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카리브인들에 의해 전멸당했다. 몇번의 실패 끝에, 1644년에 프랑스 원정대와 당시 마르티니크의 주지사가 정착지를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1664년에는 당시 세인트 키츠 네비스 주지사의 아들인 토마스 워너가 세인트루시아를 영국이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세인트루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군대를 막아내기 위해 1,000명의 군사를 세인트루시아에 투입했지만, 질병이 돌아 2년만에 89명만 남고 다 사망했다. 프랑스는 1666년에 프랑스 서인도 회사를 통해서 세인트루시아를 되찾았고, 세인트루시아를 1674년 마르티니크의 관리하에 프랑스 식민지로 정식 편입했다.

1700년대 동안, 세인트루시아는 설탕 산업을 통해 번영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은 세인트루시아를 포기하지 않았고, 둘의 다툼은 170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1722년에는 한 영국인이 세인트루시아에 상륙하여 정착지를 설립했지만, 영국군에게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도망쳐 나왔다. 7년전쟁 동안에 영국이 잠시 세인트루시아의 지배권을 획득했지만, 1763년에 파리 조약이 맺어져 다시 프랑스로 지배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지배권을 다시 얻은 프랑스는 1765년부터 세인트루시아를 사탕수수 농장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세인트루시아의 주지사는 1794년, 세인트루시아의 노예제를 폐지한다. 그러나 1795년 설탕의 안정적 생산을 원하던 영국인 지주의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세인트루시아의 지배권은 1803년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영국은 세인트루시아의 노예제를 다시 부활시켰으며,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 섬을 되찾기 위해 2만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이 군대는 3분의 2가 사망했다.

1804년에는 아이티 출신의 지도자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다시 세인트루시아의 지배권을 도로 획득했다. 영국은 지배권을 다시 획득한 이후 노예제를 폐지했지만, 폐지 후에도 한주의 4분의 3을 전 주인 아래에서 일해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프리카계 주민이 유럽계 주민보다 더 우세를 차지하면서 1838년에 완전한 자유를 달성하게 된다. 같은 해부터 세인트루시아는 영국 소속 바베이도스의 관리를 받았으나, 1885년부터는 그레나다의 관리를 받게 된다.

프랑스와 영국의 세인트루시아를 얻기 위한 싸움은 치열했다. 세인트루시아가 프랑스의 마르티니크로부터 관리를 받게된 1674년부터 영국이 완전히 지배권을 얻은 1814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프랑스는 지배권을 6회 얻었고, 영국은 지배권을 4회 얻었으며, 양국 합의 하에 중립 지역으로 결정된 적도 2번이나 있었다.

20세기 동안 세인트루시아의 자치권은 점점 증가해 갔다. 1924년의 헌법에서는 세인트루시아에게 자치정부를 설립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되어 있었고, 1951년에는 세인트루시아의 모든 성인에게 보편적 선거권이 주어졌으며, 1958년에는 서인도 제도 연방에 가입하였으나, 연방은 편협한 민족주의, 연방정부의 결점, 부적절한 연방의 구성, 대중 지지의 부족 등으로 인하여 1962년에 해산되었다. 이후 영국 지배 하의 자치정부 상태를 유지하다가 1979년 2월 22일 독립을 달성했다.

자연

화산섬으로 화산맥이 해안까지 이어지며 섬의 중앙으로부터 남부에 걸친 지역이 높다. 기미산(山)은 958m이며며 남서 해안에는그로스피통(798m)과 페티트(750m)의 두 화산이 있고, 북부에는 해발 300m 내외의 고원이 펼쳐져 있다.

열대성 기후가 나타나지만, 북동무역풍의 진로에 해당하기 때문에 열대성 서열(暑熱 : 심한 더위)을 완화시켜 대체로 견디기 쉽다. 연강수량은 해안에서는 1,300mm이나 중앙 산악부에서는 3,800mm에 이르며, 우기와 건기로 구분된다. 건기는 1월부터 4월, 우기는 5월부터 8월에 걸쳐 나타난다.

2005년 현재 전국토 중 경지는 22.58%, 경지로 개발 가능한 지역은 6.45%에 그친다. 때때로 허리케인과 화산 폭발로 피해를 입는다.

정치

세인트루시아는 영연방 가맹국으로 영국 국왕을 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이다. 따라서 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총독이 임명되고 있다. 헌법은 독립과 함께 발효되었다.

의회

정체(政體)는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이다. 상원은 11명의 선임의원으로 구성되는데, 6명은 총리, 3명은 야당 당수의 추천에 의해서 총독이 임명하고, 나머지 2명은 총독이 직접 임명한다. 하원은 17명의 선출의원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5년이다. 통일 당시에는 통일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가장 최근에 치루어진 선거는 2021년 7월 26일에 치루어진 선거로, 세인트루시아 노동당이 연합노동자당을 누르고 제 1당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정부

2023년 현재 국가원수는 찰스 3세 국왕이고, 총리는 2021년 7월 28일에 임명된 필립 J. 피에르 (Philip J. Pierre)이다.

외교

외교관계에서는 비동맹에 가입하고 있으나 친서방 온건 중립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지리적,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배경상 미국, 영국EU, 캐나다 등 서방국들과의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를 중시한다. 인근 카리브해 국가들과는 CARICOM, OECS 등 역내 회의체를 통해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CARICOM(Caribbean Community: 카리브해 공동체)의 정회원 15개국 중 하나로 1974년 5월 1일에 가입하였다. 동카리브지역의 단결과 결속을 목적으로 하는 OECS(Organization of Eastern Caribbean States: 동카리브국가기구)에 1981년 가입한 9개국 중 하나로, 그 본부 사무국이 세인트루시아의 캐스트리스에 위치해있기도 하다.

군대

세인트루시아에는 정규군대는 없고, 로열 세인트루시아 경찰(특수경찰, 해안경비 포함)이 있다.

인구

주민은 90%가 아프리카계이다. 또 혼혈이 6%, 인디오가 3%, 백인이 1%이다. 언어는 공용어가 영어이다. 또 프랑스어 파트와로 불리는 크리올어가 사용된다. 세인트루시아는 영연방과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기독교와 프랑스어에 바탕을 둔 크레올어는 비록 최종적으로는 영국에 밀렸지만, 한때나마 이 나라를 지배했던 프랑스의 유산이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90%에 달하는 기독교 사회이다.

경제

세인트루시아 경제의 주축은 관광, 농업, 제조업인데 건설업도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관광산업은 세인트루시아 경제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무역적자를 해소하는 최대 외화 소득원이다.에 달한다. 세인트루시아의 주요산업은 농업으로 오랫동안 사탕수수를 주작물로 하고 있었으나, 최근 바나나·코코넛·코코아·과실·서류(薯類) 등이 주로 재배된다.

제조업은 동카리브지역에서 가장 다각화되어 있으며, 의류, 전자부품 조립, 럼주(酒) 양조, 감귤류의 가공 등이나 영국·미국·캐나다 등의 경제원조에 의해서 경공업도 발전하고 있다.

문화

세인트루시아의 문화는 세인트루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민족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민족들은 자신들의 믿음과 전통을 현재 세인트루시아의 일상에 반영하고 있다. 비옥한 화산 토양이 수확해 낸 풍부한 수확물은 다양한 음식문화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는데 시금치와 비슷한 잎이 넓은 야채로 만드는 칼라루(Callaloo) 스프는 국가적인 요리이다. 또한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는데 한 명은 아더 루이스(Sir W. Arthur Lewis) 경으로 1979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으며 나머지 한 명은 시인 데렉 월컷(Derek Walcott)으로 199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세인트루시아 문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민족으로는 카리브해의 토착 원주민이 있다. 유럽인의 출현으로 그 수가 많이 줄었으나 몇몇 마을에서는 아직도 카누에서 물고기를 잡는 고대 예술을 행하고 있다. 유럽인들은 세인트루시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영국인들은 언어, 교육시스템, 법 제도와 정치구조에, 프랑스인들은 예술, 춤, 음악 등에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들 농장의 노예로 와서 그들의 문화를 퍼트렸다. 이들도 현재 세인트루시아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세인트루시아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세인트루시아 국민은 춤추는 것을 가장 좋아하며 전통축제로는 칼립소경연대회, 마거릿 축제, 장미축제가 있다.

세인트루시아 지도

동영상

참고자료

소앤틸리스제도 같이 보기

소앤틸리스제도
리워드제도 1
리워드제도 2
윈드워드제도
리워드 앤틸리스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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